부산의 시간에 대한 기억-일제 강점기
중구 화목 노인정의 서중봉씨는 자신이 겪은 일제 강점기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때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어. 지금은 소나 말이나 먹는 콩 껍질을 삶아서 죽을 만들어 배급했어. 배급도 배급 일지를 갖고 와 도장 받지 않으면 받을 수 없었어. 일제 때 동광동 일대에 목조로 된 2층집이 많았어. 그서[거기서] 왜놈 야쿠자들과 헌병들이 많이 살았는데, 우리 자형이 동광동에 살던 야쿠자에[의] ‘조선인 시다바리[졸개]’였는데, 야쿠자 패거리들이 국제 시장에서 세금 걷고, 극장 관리했어. 조선인 패거리가 있었지만 야쿠자한테 잽이[상대가] 안 돼. 왜놈 순사들이 야쿠자 편을 들어 주고 뒤를 봐 주고 하니….”
3대 토박이 영주동 할아버지[성명 미상, 79세]가 기억하는 일제 강점기도 조선인들에게는 역시 힘든 시기였다.
“나도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녔는데, 내가 덩치가 좋아 왜놈 아[학생]들하고 많이 싸웠어. 내가 하도 많이 싸우니까 우리 아버지가 경찰 명단에 올랐어. 그런데 한날 밤에 친구 분들과 ‘피전(皮廛)’을 하다가 경찰에 잡힌는데[잡혔는데], 다른 분들은 ‘훈계’ 조치를 받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손가락 2개를 잘랐어. 정말 숭악한[흉악한] 놈들이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꺼내 오기 위해 집 앞에 있는 헌병 대장한테 찾아가 온갖 잡일을 하며 용서를 구해 갖고, 그 덕에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어. 무서운 세월이지…. 이런 것도 생각나네. 일본 아들하고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조선인은 수업료가 1~2전인데 일본 아들은 수업료가 무료였어. 그 1~2전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조선인이 많았어.”
그런 엄혹한 시절에도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영근씨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금메달 받았을 때 동네에서 또래들과 ‘손, 귀, 택’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선연하다.
“여섯 살 땐가 그럴 겁니다.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받았다고 모두들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했지요. 그때 우리 동네 두세 살 많은 선배가 연필 2자루를 상품으로 걸고, 달리기 시합을 시켰어요. 현 중구청에서 고관 입구까지…. 그 거리가 얼맙니까?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그리고 우리한테 놀이를 가르쳐 줬는데, 이런 겁니다. 손뼉을 치며 ‘손’, 귀를 잡고 ‘귀’, 턱을 만지며 ‘택’, 그렇게 소리 내고, 그리고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게 했어요. 아마 우리가 뛰면서도 그리 했을 겁니다. 그 선배가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한테 손기정 선수를 생각하도록 핸 거지요.”
왜 손기정을 손귀택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 어린 학생들은 손기정의 이름을 제대로 몰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영근씨는 일제 강점기 말 봉래국민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애국 조례와 신사 참배, 학예회 등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가지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 운동장에서 아침 조례[애국 조례]를 했는데, ‘교육 칙어’ 낭독을 하고, 국민 선서[황국 신민 서사] 그것도 외워야 되고, 봉안전(奉安殿)이라는 집 모양인데, 작은 집 모양의 물건인데, 그 앞에서 절을 하고 (했어요). 이 봉안전은 현관 중앙 옆에 설치되었는데, 학교는 현관 서편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해방 되어 갔고 없어졌지요. 태평양 전쟁 나고 나선가? 그 전에도 신사에 참배를 가라 마라 뭐 이렇게 했는데, 우리[학교]는 용두산 공원이 가까웠으니까, 그때 부산에 대표적인 신사가 용두산 신사였지 않습니까? 그때 학교에서 걸어서… 1, 2, 3학년은 안 갔지, 아마 4, 5, 6학년들은 남녀 학생들은 모두 매주 월요일 날 조례가 끝나며는 행진을 해 가지고 영선 고개를 넘어서 (현재의) 백산 거리로 해서 (현재의) 타워 호텔로 해서 용두산 공원으로 계단으로 해서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신사 입구에는 도래이가 있는데,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 입구에 도래이가 있고, 계단 양쪽에 사철나무가 주욱 있는데, (현재의) 팔각정 그 앞에서 좌악 줄을 맞춰 가지고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데, 우리는 그때 그기 뭐 강요인지 뭔지도 몰랐지요.”
“학예회를 하면 음악, 독창도 있고 중창도 있고, 시 낭송, 무용. 그런데 그때 무용은 별로 한 게 없고, 일본 무용은 배울라 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우리 무용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학교서는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나무로 만든 칼이 있습니다. 그기 이름은 모르겠네, 나무로 만든 칼, 그놈으로 율동을 하는데, 여학생들은 그런 걸 했고, 일종의 검무, 검무죠. 우리는 나무총을 갖고 ‘야!’ 하며 총검술을 그런 것을 했지요. 그런데 이기 따로 하는 기 아니고 연극의 일부로 들어갔지요. 학예회 때는 연극을 한다 아입니까, 어떤 해군 제독인데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라고, 이 도고 헤이하치로를 주로 소재로 해 가지고 연극을 했는데, 그때 검무나 총검술 이런 기 부분적으로 들어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