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하나까지 배급받던 암울한 시절
할머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은 어둡고도 고단한 시간이었다. 원래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인데다가 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공출이다 배급이다 일제 강점기 말 갖은 수탈까지 더해져서 퍽이나 힘이 들었다. 10세 조금 넘어서부터는 근로 보국대에 끌려 다니며 훈련도 받고 노동에도 종사하였는데, 소녀에게 소박한 꿈조차도 꿀 여유를 주지 않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인견으로 와이셔츠 만들어 입고 훈련에 나갔던 일이며, 지금은 주로 고무줄을 넣어 만들어 입지만 그때는 끈으로 묶어서 입었던 ‘몸뻬’ 바지를 갖추어 입고 갖은 노동에 나섰던 기억까지. 10세 남짓의 소녀가 감당해야 하였던 고된 일상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보국대 카는 거는 내나 노가다 일 아인교. 가면 저거 시키는 대로 안 하는교. 풀도 매라 카면 풀도 매고, 괭이질 하라 카면 괭이질 하고, 삽 하라 카면 삽 하고, 삽 가지고 흙을 퍼 넘기라 카면 퍼 넘기고. 저거가 나오라 카면, 뭐 12살 13살 먹으면 다라이 이고 나가면 저거 집 지을 적에 모래 이고 흙도 여자 삽에 담아 주면 여자 붓고 이래 안 했는교. 반에서 순서대로 나오라고 반장들로 그래 해 가지고 일본놈들, 그때만 해도 우리 조센징들 사람으로 쳤는교. 일본놈들 저거 명령대로 전쟁 치르다 보이카네 반에서 몇 명, 한 집에 사람 있는 거를 뽑아가 나가 가지고. 인제 머시마들 있는 사람은 머시마 나가고 사람 없는 사람은 딸 아들도 내보내고.”
홉으로 하루 2홉 반씩 배급받아 풀을 섞어서 죽을 쑤어 먹고 바늘 하나까지 배급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일제 시대 그놈들, 일본놈들, 모질고 모진 놈들”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전쟁 말기 일제는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로 시작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제정해서 암송하도록 하며 일제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배급을 탈 때도 유창하게 외우지 못하면 주지 않았다. 배급을 받기 위해 “고고쿠 신민나리~”를 수도 없이 외웠던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자연스럽게 외우고 계셨다.
“참말로 그때는 어느 것 공출 안 바치고 배급 안 바친 것이 없었어요. 이 시집간다고 신발 하나 배급 줄라 카면 안 주고 바늘 저거 실 요런 것까지 다 배급받고, 이 바늘까지 다 배급을 받아 가지고 살았으니카네. 그랬지, 일제 시대는. 지독하이 일제 시대는. 얼매나 참 어렵게 어렵게 살았나. 촌에 살면 전부……. 짚신을 삼아 가지고 짚신을 삼아 가지고 요래가 주고. 그 미나카이 배급 타러 가면 그 동해물과, 우리 한국 같으면 동해물과 그걸 외워야 아 배급을 주지, 그거 안 외우면 배급 안 주고. 고고쿠 신민나리……. 그걸 외워야 배급을 받아 오지. 그걸 못 외우면 배급도 안 주고. 그랬지, 일제 시대. 참 말 다할라 카면 안지까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