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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미동 비석 마을의 비밀
아미동 산19번지
까치 고개는 부산광역시 서구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서구와 사하구를 잇는 우회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87번 버스를 타고 까치 고개를 오르다 천주교 아파트 앞에서 내려서 감천 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르다 보면 계단 형태의 주택가를 만날 수 있다. 경사가 너무 급해서 오르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지만 한참을 올라 한숨 돌리고 뒤를 돌아다보면 용두산 타워며 고층 빌딩과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저 멀리 부산항까지 시야를 가리지 않는 탁 트인 전망은 속까지 시원하게 만든다. 여기가 바로 아미동 산19번지이다.

아미동 산상교회 주변에서 감천 고개로 이어지는 아미동 산19번지는 고지대인데다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에 좁은 골목, 전형적인 산동네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곳의 골목골목을 지나다 보면 여느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 벽이랑 주춧돌, 가스통 받침대, 골목의 계단 등 곳곳에 반들반들한 대리석이 보이는데, 한자로 보이는 글자도 새겨져 있고 요상한 그림도 그려져 있다. 어느 돌에는 큰 글씨로 ‘서산가지묘(西山家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무덤에나 두는 상석과 비석들이다.

일명 ‘비석 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개항 이후 용두산 인근의 일본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해 가던 일본인들은 처음에 용두산 북쪽 자락인 복병산에 일본인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1905년 북항을 매축하면서 필요한 토석을 복병산에서 채굴해 갔는데, 이때 공동묘지를 아미산으로 옮겼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인데다가 규모만 해도 약 8만 2644.63㎡[25,000평]에 이르렀다. 공동묘지가 있어서인지 1909년에는 지금의 서구 대신동 쪽에 있던 화장장도 아미동으로 옮겨 와 자리를 잡았다.

광복 후 귀환 동포들이 부산을 찾은 데 이어 6·25 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주로 시내 주변에 자리를 잡고 터전을 마련하였으나 정부의 철거 정책 등으로 갈 곳을 잃자 다시 가까운 서구 아미동으로 옮겼다. 당시 아미동에는 광복으로 서둘러 돌아간 일본인들이 미처 수습해 가지 못한 묘지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묘지든 무엇이든 우선은 살고 봐야 하였던 사람들은 묘지 위에다 천막을 치고는 집으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죽음의 공간이었던 아미동 산19번지는 그렇게 산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난히도 더웠던 8월의 어느 날. 작은 집들 사이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을 걷다가 알루미늄 새시 현관문 앞에서 유리에 붙여진 푸른색 필름을 예쁘게 정리하고 계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옛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나 찾을 수 있던 조그만 검은색 카터 칼로 필름의 가장자리를 정성스럽게 정리하고 계시던 할머니. 길갓집이라 목욕을 하거나 하면 밖에서 보일까 신경이 쓰여 붙였다 하시는데, 며느리가 와서 붙여 줬다며 전화를 하면 바로 온다고 자랑이 늘어지신다.
내 가족
올해로 86세가 되시는 김순녀 할머니는 경상남도 창원시 월포동에서 1년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셨는데, 인물이 참 좋으셨고 입담도 있으셔서 많이 배우지는 못하였어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분이셨다. 동네에서 ‘얌전이’로 불렸던 어머니는 위로는 언니와 오빠, 아래로는 2살배기 동생까지 남겨 두고 그만 돌아가셨다. 올해로 꼭 81년째. 당시 할머니 나이는 고작 5세였는데, 너무 어렸던 탓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언니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싹싹하고 야무졌던 언니는 천생 여자였는데, 14세 어린 나이로 홀아버지에 동생 3명까지 돌보며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야 하였던 언니의 고단함을 그때는 잘 알지 못하였다. 가족을 위해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한 언니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래 살지도 못하고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뜬 언니가 할머니는 문득문득 사무치도록 그립다.

“은자 우리 엄마가. 그래 우리 언니가, 내 위에 오빠가 있고. 우리 언니가 욕을 봤지. 14살 묵어 가지고 엄마 죽고 동상 3명 다 키우면서 살림을 살았어. 언니 저거를 못 잊어서. 거의 엄마였지. 예, 말 몬 합니다. 동생을 업어 가지고 허리가 아프다 안 카나. 업어 가지고, 밤낮으로 내리면 울어샀코 젖이 없어 나이 밥을 해 먹이고 밥. 울면 시근이 없어 14살 먹은기 밥을 자꾸 먹이 가지고. 밥을 억지로 먹이 가지고 가가 천식이 있습니다. 그러자 천식이 있어서 한 번씩 병이 나면 숨을 헉 모아 쉬서리. 그래저래 하다가 세월이 좋아 가지고 지가 시집을 가서 며느리 봐 놓으니카네 간호사라. 그 그거 천식 약을 차리 줘 가지고 그래 가지고 묵고는 괘안쿠만. 그래 이적지 저래 살아가 있어요.”

‘가시나가 배우면 못 쓴다’고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4남매 중 유일하게 학교에 다녔던 오빠도 5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둔 오빠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조금 배웠는데, 학교를 길게 다니지는 못하였어도 천자문까지 뗀 똑똑한 오빠였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이후 남자인 오빠가 맞닥뜨려야 한 현실은 더욱 험난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말 극으로 치닫던 전쟁의 광풍을 오빠 역시 피하지 못하였고 광복되고 나서는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돌아왔다. 혼기를 놓쳐 27세에 겨우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6·25 전쟁 참전 당시 팔이며 다리며 몸 이곳저곳에 박힌 파편을 무슨 ‘삶의 흔적’이라도 되는 냥 죽을 때까지 끼고 살다가 고이 가진 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오빠도 군인 댕기며 고생 많이 했어요. 6·25 사변에 대동아 전쟁 때. 일제 시대 때 군에 나갔지 6·25 사변에 나갔지 4·19 혁명에 나갔지. 고생 많이 하다가 파편 맞아서 그것도 못 빼고 안 죽었소. 말 몬 하요.”

바늘 하나까지 배급받던 암울한 시절
할머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은 어둡고도 고단한 시간이었다. 원래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인데다가 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공출이다 배급이다 일제 강점기 말 갖은 수탈까지 더해져서 퍽이나 힘이 들었다. 10세 조금 넘어서부터는 근로 보국대에 끌려 다니며 훈련도 받고 노동에도 종사하였는데, 소녀에게 소박한 꿈조차도 꿀 여유를 주지 않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인견으로 와이셔츠 만들어 입고 훈련에 나갔던 일이며, 지금은 주로 고무줄을 넣어 만들어 입지만 그때는 끈으로 묶어서 입었던 ‘몸뻬’ 바지를 갖추어 입고 갖은 노동에 나섰던 기억까지. 10세 남짓의 소녀가 감당해야 하였던 고된 일상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보국대 카는 거는 내나 노가다 일 아인교. 가면 저거 시키는 대로 안 하는교. 풀도 매라 카면 풀도 매고, 괭이질 하라 카면 괭이질 하고, 삽 하라 카면 삽 하고, 삽 가지고 흙을 퍼 넘기라 카면 퍼 넘기고. 저거가 나오라 카면, 뭐 12살 13살 먹으면 다라이 이고 나가면 저거 집 지을 적에 모래 이고 흙도 여자 삽에 담아 주면 여자 붓고 이래 안 했는교. 반에서 순서대로 나오라고 반장들로 그래 해 가지고 일본놈들, 그때만 해도 우리 조센징들 사람으로 쳤는교. 일본놈들 저거 명령대로 전쟁 치르다 보이카네 반에서 몇 명, 한 집에 사람 있는 거를 뽑아가 나가 가지고. 인제 머시마들 있는 사람은 머시마 나가고 사람 없는 사람은 딸 아들도 내보내고.”

홉으로 하루 2홉 반씩 배급받아 풀을 섞어서 죽을 쑤어 먹고 바늘 하나까지 배급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일제 시대 그놈들, 일본놈들, 모질고 모진 놈들”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전쟁 말기 일제는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로 시작되는 「황국 신민 서사」를 제정해서 암송하도록 하며 일제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배급을 탈 때도 유창하게 외우지 못하면 주지 않았다. 배급을 받기 위해 “고고쿠 신민나리~”를 수도 없이 외웠던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자연스럽게 외우고 계셨다.

“참말로 그때는 어느 것 공출 안 바치고 배급 안 바친 것이 없었어요. 이 시집간다고 신발 하나 배급 줄라 카면 안 주고 바늘 저거 실 요런 것까지 다 배급받고, 이 바늘까지 다 배급을 받아 가지고 살았으니카네. 그랬지, 일제 시대는. 지독하이 일제 시대는. 얼매나 참 어렵게 어렵게 살았나. 촌에 살면 전부……. 짚신을 삼아 가지고 짚신을 삼아 가지고 요래가 주고. 그 미나카이 배급 타러 가면 그 동해물과, 우리 한국 같으면 동해물과 그걸 외워야 아 배급을 주지, 그거 안 외우면 배급 안 주고. 고고쿠 신민나리……. 그걸 외워야 배급을 받아 오지. 그걸 못 외우면 배급도 안 주고. 그랬지, 일제 시대. 참 말 다할라 카면 안지까지 끝이 없다.”
정신대를 피해서 한 첫 번째 결혼
할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제의 인력 동원은 전 방위로 확대되었고 어린 학생에서부터 여성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렸다. ‘정신대’가 무엇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소문에는 “처녀의 기름을 짜 가지고 기계에 사용하면 싸움에 이긴다”고 해서 처녀들을 끌고 간다는 무서운 얘기들이 떠돌았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끌려가면 죽는다는 정신대로 보낼 수가 없어서 딸들을 일찍 결혼시키던 시절이었다. 할머니 역시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시집을 갔는데, 남자가 뭔지 여자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첫날밤 시어머니 품만 그렇게 파고들었다 하신다.

“말 못 하요. 그때는 사는기 사는기 아이요. 참 그때는 행핀없었요. 아 요새 세월이 이래 살아서 그렇지. 그때는 일제 시대 정신대 안 뽑혀 갈라고 일본놈의 정신대에 안 뽑혀 갈라고 숨어서 숨어서 있다가, 또 처녀는 뽑아 가고 각시는 안 뽑아 간다 해서 결혼을 또 16살 먹었을 때 결혼을 시켜 놓으니…….”

결혼을 한 할머니는 부산으로 건너와 영도에서 잠깐 살았다.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는데, 광복이 된 다음 날 영도 시장 광경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17살에 8월에 해방이 됐다 아이요. 8월 15일 밤인데, 딱 밤 1시 딱 10분인가 요래 되가지고 눕어 자이카네. 그전에는 텔레비도 없고 라디오 쪼매는 거 캐 놓고 머리맡에 놔 놓고 전장 때가 돼서 누워 자이 일본놈 손들었다 이런 소리가 딱 나이. 배겉에 나가이카네 뭐뭐 불이 환하게 켜 가지고 마 굉장하데요. 해방됐다고. 아이고, 그질로 그렇게 탁 튀어 나가니카네 시장에 가이카네 별기 별기 다나와. 그리 귀하던 쌀도 천지고 깨도 천지고 땅콩도 천지고 보리쌀도 천지고. 신발도 그리 숨켜 놓고 신발 한 켤리 없어 짚신 삼아 신고 시집을 갔는데 신발 공장 신발이 천지고. 일본놈들 다 차지하고 있던 거 다 내삐리고 맞아 죽을라고 안 맞아 죽을라고 줄행랑한 거 도망가고 숨어 가지고. 뭐뭐 해방됐다 카이 일본놈 손들었다고 하이 마 피해 가지고 마 형편없이 되어가 있대요. 그래 저거 살던 살림 다 내삐리고 일본 사람들 그때, 어이구 그놈들 지독합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미국이다 소련이다 세계를 주름잡던 열강의 간섭으로 좌우가 대립하던 불안한 정국 속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에 참전한 남편은 한 장의 편지로만 소식을 알려온 채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 나이 21세 때였다. 남편과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뒤에 재혼을 하면서 연락이 끊어진 후로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사조차도 모르겠다.

“결혼해서 바로 갔지, 바로 갔지. 올케 몇 년 못 살았어요. 연에 죽었다카는 전사 편지가 안 옵니까. 아이고 얘기할라면 끝도 없고 말라고.”
아미동은 공동 산
남편을 여윈 후 할머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회사에 취직하였다. 집도 회사에서 가까운 범일동으로 옮겼는데,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 세를 놓고 있는 집이었다. 같이 세 들어 살고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의 소개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는데, 수출 관련 회사에 다닌다던 할아버지는 첫눈에도 인물이 참 좋으셨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옷을 차려입고 나서면 무척이나 단정해 보였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양반이라는 소리를 듣는 깔끔한 성격의 점잖은 분이셨다고 한다.

결혼에 한 번 실패한 할머니인지라 쉽게 결혼할 마음을 먹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의 끊임없는 구애에 할머니는 그래 또 한 번 살아보자 하고 생각을 바꾸셨단다. 결혼 생활이 무엇보다도 평탄하기를 바랐던 할머니.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할아버지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데려온 아들도 있었다. 이미 아들딸 쌍둥이를 출산한 뒤였지만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할머니는 딸아이만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였고 할머니로서도 두 아이까지 데리고 할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따라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곳이 아미동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미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1년 만이었다.

할머니가 처음 올라왔을 때 아미동은 노루가 뛰어 다닐 정도로 깊은 산이었다고 한다. 살림을 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댁이 코흘리개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야 하였던 막막함이란. “오다가 오다가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할머니 말씀은 달리 선택할 길은 보이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였던 그때의 막막하고도 절박한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렇게 아미동을 찾은 사람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첩첩산중에 바글바글 사람들은 참 많기도 하였다.

“여기 본래 옛날에는 아주 일본놈들 공동 산 아이요. 저기 비석 천지요. 공동 산 아니요. 공동 산인데. 그래 인제 뭐뭐뭐 살기가, 해방되고 힘이 들고 살기가 답답하니 이 만대기로 하나씩 올라와서리. 우리도 여기는, 순 여는 일본 사람들 공동 산 아이요, 공동 산인데. 그래가 거기다가 공동 산이기나 말기나 일본놈이 여 똘방하니 해 가지고 위에다 그걸 친 그 위에다 뜯어뿌고 전부 마 깔대 꽂아가 천막 치듯이 그걸 사가지고 가께목 사가지고 집을 지아가 이래 가지고…….”

6·25 전쟁 당시 아미동으로 밀려온 피난민들은 공동묘지의 어른 허리 높이인 묘지 경계석에다 자갈치 시장에서 얻어 온 생선 상자 같은 널빤지나 천막을 얹어서 집으로 만들었다. 건축 자재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시절 비석과 상석들을 집을 짓는 건축 자재로 그대로 이용되었다. 할머니가 올라오셨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무덤 위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 상태여서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여느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담벼락이며 축대며 계단이며 눈 돌리는 곳마다 발이 닿는 곳마다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비석들은 이곳이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젊은 새댁의 무섬증을 꽤나 자극하였다.

“와 안 무섭어요, 전신에 무덤인데. 첨에 저기 댕길 때는 무덤이……. 여기는 비가 오면. 다 일본 사람 무덤은 전부 비석을 해 가지고. 이 비가 오고 구름이 끼도, 비가 오고 구름이 끼도 여는 항상 달이 뜬 것처럼 환~ 비석이 있어 가지고. 비석이 있어, 그 비석 다 팠뿌고 다 꾸부러 냈뿌고. 저기도 하나 안 있나, 저저 아래 문지방에 드가는데. 이거 다 비석 아이가. 파묻어가 인자 집 지어가 뺑키칠을 해가 그렇지. 저저게도 가스통 밑에도…… 일본산 여 공동 산이 되이 전부 안 그러나…….”

누워 자는 방 아래에 유골이 있다는 사실이 참 무섭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하였지만, 모진 목숨 죽지는 못하겠고 아이들이랑 먹고살려면 어디든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만큼 나이가 드니 지금은 무서운 것도 모르겠다고 하신다. 하기야 이웃 할아버지 중에는 명절날 제사 지낼 때 밥 한술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 일본인 혼령을 위로해 주고 계신 분도 있다고 할 정도니, 아미동에 묻힌 일본인들은 어쩌면 갈 곳 없어 마지막으로 아미동을 찾은 주민들에게는 귀한 삶의 공간을 제공해 준 고마운 넋일지도 모르겠다.
무덤 위에서 살다
할머니 집은 골목길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음력으로 정월 10일, 가장 추운 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올해 55세인 아들딸 쌍둥이가 4세, 그 아래로 막둥이가 1세인 해였다. 앞서 올라와 무덤에 집을 짓고 살던 사람이 떠나면서 내놓은 집을 구입해 들어가셨는데, 루핑을 덮고 있는 집이었다. 루핑은 아스팔트 찌꺼기로 기름칠한 일종의 방수용 종이로 지금까지도 아미동에는 루핑을 덮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집도 있다. 동네에서 할머니는 좀 늦게 올라온 편이라 하시는데, 그때는 이미 무덤 위에 만들어졌던 천막집들이 루핑집이나 판잣집으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지금은 방도 넓혀서 어른 세 명을 족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고 이층에는 다락방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처음 이 집을 샀을 때는 한 칸짜리 방에 한 사람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두세 평짜리 묘지 하나 위에 한 채의 집을 지어 살던 시절이었으니 좁은 건 당연하였을 것이다.

“집을 지어 가지고 살다가 간 사람 거를 샀지. 그때 요새 돈으로 이 집을, 요새 돈으로 치면 180원인가 1,080원인가 1원 80원인가 그걸 모르겠다. 돈의 액수가 원체나 그게. 지붕 위에 루핑 덮인. 루핑이 덮여 있고 문도 없고 그런 집을. 그래 가지고 누워 자고 살았지.”

변변한 부엌 하나 제대로 갖출 공간 없는 단칸방 생활은 녹녹하지 않았다. 비바람은 겨우 피한다 하지만 추운 날은 추운 대로 더운 날은 더운 대로 그대로 노출되는 부실한 집이었다. 그나마 할머니네 집은 길가에 위치하다 보니 조그마한 창문이라도 낼 수 있어 안쪽의 집들보다는 조금 나았다. 집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 창은 있어도 햇빛이 드는 것까지는 바라지 못하겠지만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산들산들 들어오니 답답함은 한결 덜하였다.

“지금 크게 내서 그렇지 그때는 쬐끄만한 창문이 여기 있었어. 그래 올라와 가지고 따라 와 가지고 인자 아랑 여서 살았는데, 그질로 시작어서 여 이제 딴 데도 가 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안 하고 내 이 집에서 살았어요. 한칸 마마 여어 부엌도 없고, 요 부엌을 인자 맹글어서 그렇지. 여 방에다가 옛날에 난로 화리 연탄 화리를 갖다 요 놔 놓고 그걸 방에서 밥을 안 해 먹었습니까. 여 온돌도 아이고. 여가 일본산 공동 산이지. 거기다가 인제 요기다가 일본산 공동 산 우에다가 세멘이 되가 있으니까네 거기다가 인자 자리를 깔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살고 누워 잤지. 그래 잤지.”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 웃지 못할 일을 겪기도 하였다.

“우리도 여 방 온돌 놓을라고 구들을 파니까 요만한 단지가 하나 나왔어. 사다가 쪼깨 형편이 낫어서 방이 춥어서 온돌을 놓아 가지고 살라고 연탄보일러를 넣을려고 하니까네 비석이 요런 게 딱 걸쳐 있고 고 밑에 단지가 하나 있어. 물이 요렇게 덮이가 있어. 그 뭐 내삘이지 뭐하겠노.”

단지라는 것은 화장한 후에 인골을 담아 묻었던 유골함이다. 집터에서 이런 단지가 나왔다는 얘기는 할머니 댁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것을 항아리로 사용하거나 팔기도 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유골함까지 팔아서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였다는 얘기는 당시 아미동 주민들의 어려웠던 살림살이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 더불어 기모노 입은 귀신을 보았다거나 여자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둥 밤새도록 ‘게다’ 소리가 나서 잠을 못 잤다는 둥 별별 이야기들이 주민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그래사터만 첨에 여 온 사람은 그걸 팔아 가지고. 문 앞에 단지가 요래 차마고 예뻐서 못 내삘이고 아까봐서 문 앞에 열어 노께. 말을 허~ 하는 말이 일본말로 그 단지 안에서 하더라카께. 일본~이거 뭐꼬 인자 말도 잊아뿌다. 일본말로 뭐 곤방와 칸다 카더라. 곤방와 카면 사요나라 카더라 그런 소리가 듣기사터라. 그래 단지가 좋아서 팔러 가가 파는 사람은 팔고 이래사. 팔아 가지고 묵고 살라고 그때는. 목구넝이 포도청이라고 뭐시든지 입에 드가는기 최고라요 그때는.”
사람이 살려면 물도 마셔야지 똥도 싸야지
아미동 산19번지는 원래 사람들이 살도록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었던 탓에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지대가 워낙 높아서 아래 시내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길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꼬부랑꼬부랑 산길로 산길로 그런 길을 다녀야 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물이었다. 상수도 시설이 전혀 없는 마을이었으므로 물은 아래로 내려가서 길어 와야 하였다. 대개는 경남도청, 그러니까 지금의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도청에서 나누어 주는 공동 수도를 이용해야 하였고, 할머니처럼 자갈치 시장에서 길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도청까지 가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많이 기다려야 하였다.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아는 형편에 없는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나눠 가며 빌려 쓰기도 하며 지냈지만 물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자갈치 시장 걸어가는 것이야 마마 누워 떡 먹기지. 자갈치 시장서 물로 이고 이래 올라오는데, 점더럭 아 엎고 장사하다가 저녁에 올 때는 물동이를 갖다가 어디 맡기 났다가 물 한 통 이고. 물이 귀해서 여는 밥은 갈라 먹어도 물은 안 갈라 묵었다. 다 길러 올라오는데. 자갈치는…… 여 법원까지 가서 물 길러 올라오고 하는데, 공동 수도 거기서 길러 가지고 올라오고. 그래 가지고 한 푼 버리 가지고 쪼개 버리면 참 국시를 또 사 가지고 지물에 끓이 먹고. 국시를 삶아 가지고 건지가 해 묵을 형편도 안 되고. 그때 1원 2원 3원. 1원 2원을 국시를 삶어가 지물에 삶어가. 물이 있나 또 올라오면서 물 한 동이 이고 아를 업고. 자갈치 시장에서 물을 한 동이 이고 올라와 그 물로 가지고 해 묵고. 그 고상 입에 담기가…….”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화장실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엌도 없이 다리 뻗고 누울 공간만 마련해서 서둘러 만든 집에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마을 곳곳에는 자연스럽게 공동 화장실이 만들어졌는데, 천막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기둥을 세운 뒤 가마 등으로 비바람을 피할 지붕과 벽을 만드는 정도였다. 지금도 아미동에 가면 예전에 사용하던 3칸짜리 공동 화장실이 수풀에 쌓인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처음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 갈라면 공동 화장실이 안 있어. 요기 돌아가면 있는데. 그게 인자 정부서 지어 주 가지고 구청서 지어 주 가지고 깨끗합니다. 요새는 깨끗해요. 옛날에는 행편없어요, 행편없었어. 행편없는 거 똥이 넘으면 갔다 내삘 데가 없어 퍼 가지고 저 산에 올라가 퍼다 내삘이고 이래 살았어. 주민들이 다 그래 가지고 살았지.”
좋은 이웃
당시 아미동에서 아미동 토박이에서부터 광복 후에 들어온 귀환 동포, 6·25 전쟁 때 난을 피해서 온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래쪽 화장장 근처로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인들이 거주해 온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피난민들은 주로 산19번지까지 올라와 터를 잡았다. 어수선한 시국에 넉넉하지 못한 시절이기는 하였지만 가진 것 없이 삶의 터전을 옮겨 와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사는 형편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매한가지요, 한가지. 똑같은 입장이요. 다 한때 먹고 나면 때꺼리가 없고. 죽자고 벌고 올라 와 봐야 저녁에 한때 먹고. 하나는 또 저녁에 해 먹고 아직에 해 먹는 것도 예상도 없고. 쌀 한 홉 찌밀 한 홉. 한 홉쓱 한 홉쓱……. 이래 가지고 아직 해 먹고 가가 벌이가 또 저녁에 한때는 국시 삶아 먹고. 아직에는 밥한다고 또 쌀 한 홉 찌밀 한 홉. 뭐 보리쌀이나 한 홉. 그때 한 대도 없고 대로 못 팔아먹고 홉으로 팔아먹고.”

밥해 먹기도 어려운 살림들이었다. 밥 대신 고구마며 감자며 삶아 먹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국수를 삶아도 멸치로 다시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하여 삶은 물에 그대로 국수를 말아서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밥해 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전부 고구메를 삶아가 먹고. 찌밀이나 갖다가 죽을 끼리 먹고. 국시를 사 가지고 지물에 삶아가 먹고. 삶아가 안 건지고 물 부가 지물에 삶아가 먹고. 다시 이런 건 몬 하지. 삶아 가지고 그냥. 사는 게 형편없었지…….”

타향살이하는 똑같은 처지가 서로 의지가 되었던 것인가, 힘든 살림살이였지만 이웃과의 관계는 좋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같은 아미동이지만 여기 산19번지는 아래쪽 동네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고 한다. 아랫마을에서는 날마다 싸우고 뭐 훔쳐 갔다는 소문이 들리곤 하였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가진 것은 없어도 인심이 좋아서 서로 정겹게 잘 지냈던 것으로 기억하신다. 똑같이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랬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해 주었고 부족한 살림이나마 나눠서 쓸 줄 알았다.

“인제 동네가 얼매나 좋다고. 여 오본 사람들은 아미동 동네가 인심이 좋다가. 여기 부근에 다 같은 아미동이라도 요요 우리 부근에 요게가 참 사람들이. 요 부근에는 그래도 전부 사람들이 다 촌에서 온 사람들이라. 요리요리 우리 이웃에는 모두 사람이 제 죽음 체면이, 한 사람이 젊잖으니까네 같이 따라서 체면을 지키 가고 살던 사람들이라. 서리 빌리 주고 서리 주고받고 이래가 묵고…….”
목구멍이 포도청
할머니의 아미동 생활은 당시 ‘꿀꿀이죽’으로 불리던 음식을 배급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주민들이 산책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도 공터로 남아 있었다는 지금의 놀이터에서 죽을 끊여 나눠 주었는데, 남은 음식을 모아서 푹 끓인 죽이었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하지만 나누어 주는 배급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보살펴 키워야 할 자식이 셋이나 있다 보니 할머니는 무슨 일이라도 하러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니까 아들을 거다 노코 있을 수가 있는교. 아는 밥도 밥도 해도 뭐 있어야 죽을 주제. 말 몬 한다. 그래 다 큰아들이요. 첨에 이사 와 가지고.”

되는 대로 별거를 다해 보셨다는 할머니. 아미동에 둥지를 튼 사람들 대부분이 자갈치 시장이나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부두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자갈치에서 장사를 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셨다.

“별것 다했다 카이까네. 고기 장사도 채소 장사도 하고 마. 난 뭐 그래 하루 갔다가 걸어갔다가 걸어오지요. 장사할 때는 노점에서 하지 점방 내 놓고 할 데가 있는교, 그전에는 다라이 같은 것 내 놓고. 우리 여 점방 내 놓고 장사할 그런 형편에 없어요. 노점도 앉아가 있으면 하지만 쫓아사서 쫓기 댕기는데.”

장사는 시원찮은 날이 많았고 팔지 못해서 상한 물건들로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할머니는 고물 줍는 일을 병행하셨는데, 장사보다 나을 때가 많았다.

“그거 카면 그래도 고물을 주우니까 그래도 낫대요. 파는 거 잘못 팔면 며칠 가뿌고 생선은 물 가뿌면 파이고 채소도 진작 안 팔리면 시들어지면 파이고. 고물은 다리야 나 살리라 죽자 사자 뛰면, 여물기나 하면 부지런하면 부지런하면.”
중앙동, 내 발 안 간 데가 어디 있는교
쌍둥이가 중학교로 입학하던 해 할아버지가 그만 집으로 들어앉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원래부터 약골이었다 하시는데, 폐가 좀 좋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그 무렵 늑막염이 발병하면서 경제 활동을 접어야 하였다. 혼자서 식사도 하시고 화장실 가고 하는 간단한 일상생활은 할 수가 있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 통증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니 바깥일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아구 마 질리서 생각 안 한다. 아바이 띠만 졌지, 뭐. 가르쳐 봤나 결혼을 시켰나. 내 혼자서러. 까다롭고 고풍을 많이 지키는 성품이었지. 아프이 짜증도 많이 내고. 미안해하기는 하지. 미안해하지. 미안해 양심은 있어가 술은 안 먹고 하이카 미안해하고. 아들 인자 가르켜 놓으면 괘안을끼라 하고.”

그 길로 11년. 딸아이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는 자식 셋에 할아버지까지 부양해야 하였다. 그동안은 적은 돈이나마 할아버지와 함께 벌어서 유지해 오던 가정이었지만 이제는 오롯이 할머니만의 몫이 되었다. 없는 살림에 병원비다 약값이다 해서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그래하다가 여 사는 것 형편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있다가 살다가 또 영감이 또 아파서, 아들은 밥은 줄라 케샀고. 아들은 밥은 줄라 케샀고 할 짓이 있나. 또 배가 고파서. 엄마 밥 줘 밥 줘 카는데 밥 줄기 있어야제. 뭣이 있어야 우째 보제. 여는 빌리러 가도 빌리 줄 사람도 없고. 똑같은 살림을 살다가 보이카네 배가 고파서러, 똑같은 살림을 살다 보이 저거 묵기도 바쁜데 넘 줄기 없다 아이요, 여기는 사는기. 그래 가지고 할 수 없어가 시내로 나가가 여 부산이 가까우니카네. 이 고지대라도 부산이 가깝고 걸어댕기기는 참 걷기 좋거든. 요기요기 첨 올라올 때는 그래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자 휴지 줍기를 시작했다 아인교.”

할아버지의 투병 생활이 시작된 후로 할머니는 주로 중구 중앙동 사무실을 돌면서 청소를 하거나 종이를 줍는 일을 시작하셨다. 당시 중앙동에 있던 회사 사무실에서는 따로 청소하는 사람은 두지 않았고 외부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는 간단한 청소만을 의뢰하곤 하였었다. 말이 청소지 특별한 청소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비닐봉투 하나 들고 들어가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를 줍고 재떨이를 비우고 연탄난로의 재를 비워서 나오면 되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씩 가서 할머니가 한 달 동안 받았던 돈은 한 사무실에서 2,000원씩, 한 달 꼬박 모으면 5만 원은 너끈히 되었다고 한다.

“아침나절에 전부 사무실에 옷이 추집으면 안 된다고 아직에 갈아입고. 씻어 놓은 좋은 옷은 아니더라도 씻어가 입고 갈아입고 가면 아직에 한 12시 안에는 출근 안할 때까지 출근해서 늦가 가는 데는 늦가 가고 일찍 가는 데는 일찍 가고 한쪽 옆으로 싸알 들어가 옴아 가지고 고 인자 재도 붓고 꽁초도 붓고 그래 와 가지고 모아 가지고 모으는 데가 있어요. 그래 모아 놓았다가 그거를 그래 모아 놨다가 모아놓고 또 요 사무실 가고 저 사무실 가고 중앙동 내 발 안 간 데 없다. 그래 댕기며 모아 가지고 청소차가 인자 한 10시나 되면 그때 오는 데가 있어요. 그래 갔다가 내다 인자 내다 갔다 주면 내삘이고.”

청소하는 틈틈이 종이를 주워 모았는데, 당시에는 종이가 귀해서 팔면 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동 사무실을 돌면서 모은 종이는 부평동 시장에 있던 고물상까지 가져가 팔았는데, 그러고 나서도 할머니는 날이 저물 때까지 배가 고프거나 말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국제 시장을 배회하며 종이를 주웠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제야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생각도 나고 할아버지 밥도 챙겨드려야 하고. 급한 마음에 내 몸 고단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경사 급한 아미동 길을 서둘러 오르곤 하였단다.

“그때는 종이는 참 귀해 가지고 종이금이 좋았어요. 1㎏에 색깔 종이도 다르고 흰 종이도 다르고 박스도 다르고 여러 종자가 있어요. 지고 댕기면 한 번에 지면 적어도 몰라 50~60㎏ 넘겨 지지. 이래 가지고 고래 가지고 해 가지고 그서 전부 다 선별해 가지고 나오면 여 국제 시장에 나오면 부평동에 나오면 12시나 이래 되요. 반도 호텔에서 부평동 시장에, 시방 부산은행 안있소, 그기 옛날에 고물상인데. 확 태산같이 모아 가지고 이고 걸음도 못 걷고 이 모가지가 붙어 가지고 돌아가지를 않아요. 지똥같이 해 가지고 이고, 이 목이 무거워서 침이 안 넘어 갑니다. 한참 딱 꼬불치 놓고는 한 3분 5분 있어야 목에 침이 넘어갑니다. 중앙동 그 반도 호텔에서 시작해서 부평동 시장까지 올라케 보소, 이고. 이 허리가 그래가 물러 가지고 물렁뼈가 물러 가지고 뼈가 튀어나와 가지고 이래 못 신다. 그런 장사를 내가 하고 다니면서러, 그때 시작어서 인자 국제 시장 다니면서 종이를 줍는다.”
새끼는 가르쳐야지
할머니가 고생을 마다않고 악착같이 돈은 번 데에는 물론 할머니가 아니면 온 가족이 당장 입에 풀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이유도 컸다. 저녁이면 으레 국수를 삶아 먹었고, 아침에 밥을 해 먹어도 대개는 보리쌀을 삶아 먹는 것으로 때웠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 보니 할아버지와 막내아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쌀을 섞어서 밥을 지어 주었지만, 쌍둥이 딸 아들과 할머니는 영락없이 보리쌀로만 배를 채워야 하였다. 그런 살림이었지만 어떻게든 자식들 가르치는 일만큼은 할머니가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얼매 받나 하면 한 달로 댕기면 이틀에 한 번쓱 가며 한 달로 모두 댕기면 한 달에 2천 원쓱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말 몬 하요, 목 맥히고 눈물 나고. 그걸 그래 가지고 똘똘 꿍치 가지고 그걸 또 줌치 넣어 가지고 뭐가 닳도록 넣어 가지고 안 있나. 그걸 또 아들 회비 줄라고 안 씨고.”

쌍둥이를 중학교로 보내기 위해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던 그날은 아직까지도 할머니가 잊을 수가 없다. “일하러 가던 차림새 그대로 수건을 덮어 쓰고 앞치마를 입고 내려가다가 학교 정문 앞에 서서는 머리 털고 수건 벗고 앞치마를 벗어가 똘똘 거머쥐고 가방 안에 넣고는 교문을 들어섰다”는 할머니. 아이들 입음새를 봤을 때 저 아이들은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겠구나 생각이 드는데 아이들은 자꾸 중학교에 간다고 얘기하더라, 어떻게 하실 거냐는 선생님 말씀은 참 야속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였다. 보내다가 그만두더라도 지금은 보낼 마음이 있으니 꼭 보내 달라며 할머니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오셨단다.

“할아버지가 그래가 집에서 있고 아들 학교는 보내야 되지. 그기라도 눈을 뜨고 보내야지, 안 보내면 우찌하겠노. 아무것도 지 이름자라도 알아야지. 너무너무 답답고. 그래 가지고 내가 생각할 때는 우리 동생하고 언니고 사는 거는 좀 괘안아 가지고 저거들은 자식을 다 갈채는데 재산도 없고 못살고 응 이래가 만약에 저거가 커 가지고 장성해서 이종 간에 대화를 하면 말끼라도 좀 알아듣그러. 그래서 갈치야 되겠다 카고 머리가 딱 돌았지. 죽자 사자 다리야 나살리라 느거를 중학교라도 내야, 내 힘대로는 함 갈치 보자 싶어서.”
미안한 딸아이
부모에게 아프지 않은 자식이 있겠냐마는 할머니에게 딸아이는 유달리 미안한 아이다. 인물이 좋고 부지런해서 귀한 딸이었다며 생각만으로도 흐뭇해하신다.

“딸아도 납닥하이 얄큼얄큼얄큼하이 요 웃으면 그 전에 요 보조개 있지 자연 보조개 그대로 들어갔어요. 요기 팬 것처럼 양쪽에 들어갔어요, 우리가 젊었을 때 양쪽에 보조개 들어갔다카네. 그걸 유전을 받대. 그래 딸이 인물이 좋은데.”

쌍둥이를 중학교에 보낸 뒤 할머니는 이내 돌아오는 회비 납입 날짜를 힘겹게 맞추며 그럭저럭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또 아이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중학교까지는 어떻게든 둘을 다 보냈는데 고등학교는 아들은 모르겠지만 딸아이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3살 아래로 있던 막내아들도 1년 뒤면 중학교를 보내야 하였다.

“도저히 니를 못 보내겠는데, 니를 못 보내겠는데, 니가 이렇카면 우찌하겠노. 내가 자신이 없다. 하다가 중단을 하면 뭐가 되노.”

기특한 우리 딸. 장래를 봤을 때 남동생을 보내야 되지 자기가 가서 되겠나 하며 양보하고 나선다. 대신에 딸은 통신 학교에 다니겠다고 한다. 당시 친구의 소개로 태양산업이라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던 딸은 라디오를 하나 사서 집에서 공부해 자격증을 딸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큰아들만 고등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통신 학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따겠다던 딸아이의 꿈마저도 할머니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침 일찍 나서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던 할머니는 장성한 딸이 이제는 살림을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니가 그래 할라 카면 회사를 갔다 오면 전부 니 시다로 빨래고 작업복이고 니가 댕기는 외출복이고 내가 다 씻어 줘야 되고 니가 다 해야 되고 내가 다 해야 되는데, 니는 갔다 오면 밥만 해 주면 밥만 먹고 공부를 해야 되는데, 내가 그리 못 해낸다. 자신이 없다. 내가 밤 늦가 와 가지고 쪼개라도 눈을 붙이야 내가 댕기지, 통 안자면 쓰러지면 이것도 저것도 다 엉망이 되고 안 된다. 도저히 자신이 없다, 가지마라 카이까 3년을 그래 울어샀대, 갈라꼬. 결국에는 못 갔어. 결국에는 못 갔어. 3년을 울어샀터니만 결국에는 못 갔어. 그래 가고 집은 학교를 못 가고.”

끝내 통신 학교를 가지 못하고 3년 동안 그렇게 울던 딸에게는 지금까지도 너무너무 미안하다. 나 역시 딸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길은 전혀 걷지 못하였는데, 그랬던 내가 내 딸에게도 똑같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도 딸아이는 태양산업에 다니면서 야무지게 벌었고 회사도 한 번 옮겨 가면서 제법 많은 금액을 집에 내놓았다. 그것으로 큰아들 작은 아들 학비 넣어 주고 딸아이 시집갈 밑천으로도 하였으니 혼자 벌어서 꾸려 오던 살림에 딸아이의 월급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딸, 엄마가 많이 미안하다.
마산 함박집, 막내아들 때문에
할머니 연세가 예순 두세쯤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아는 동생의 소개로 잠시 마산에 기거하면서 식당일을 하게 되었다. 위로 쌍둥이 딸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빚을 좀 졌는데, 많지는 않은 금액이라도 어떻든 또 자신이 해결해야지 자식들에게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식당 일은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산을 떨며 손에 물을 적셔야 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돈도 꽤 받았고 숙식까지 제공되어 나쁘지 않는 일터였다.

“마산에서 일하는 거는 인자 영감은 죽고 딸 치우고 큰아들 장가보내고 나이 빚을 좀 졌뿟대, 그때 돈으로. 그래 빚이 져서 그거 갚을라고. 작은 기 기술 배운다고 말도 안 하도 댕기는 것을 그걸 모르고. 그래 가지고 내가 마 내삘이뿌고 마산을 안 갔나. 가가지고 있으니카네 그때 마산 가서 한 달에 40만 원씩, 묵고 40만 원 받았다. 함박 식당, 노가다 하는데 함박 식당. 그릇 씻고 인자 음식 만들고 고기 장만하고 닥치는 대로 마마 미역도 빨고 파래도 빨고 반찬 무치고 마마 찌짐도 굽고 별거를 다 안 하는교. 그래 생기는 대로 그날 그날 인자 해 먹일 것을.”

마산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막내아들 때문이었다. 동래전자학교를 나온 막내는 인테리어에 필요한 전기 기술을 배우러 다니고 있었다. 사실 마산까지 간 것은 월급을 받고 있던 아들이 집에는 돈 한 푼 내놓지 않는 것이 야속해서 훌훌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감행한 것도 있다. 받는 금액이 너무 적어서 교통비 하고 점심 사 먹고 그러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야속한 마음이 들더라도 자식은 자식인지라 엄마는 혼자서 지낼 아들 걱정을 떨쳐내지는 못하였다.

“막내이가 일하고 와서 지녁으로 와서 아무도 없고 지가 밥도 해묵어야 되고 밤 늦가 아직에는 쪼깨 9시 10시 되 가면 밤이 되면 2시 3시 오이카네, 마치고 오면 아무도 없고 울어샀코. 밤은 선선하이 춥제 동지섣달 불 안 넣고 이러이카네 운다 소리가 저 소문이 와서 도저히 미치고 못 있게 대요. 돈도 좋지만은 자석은……. 그러니까 마산 주인도. 동상 나는 부산으로 내리갈란다. 카이가 왜요. 막내이가 일하고 울어 사서 손에 일이 안 잡히서 도저히 못하겠다. 그래 내려왔어요.”
엄마, 이제는 일하지 마이소
아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할머니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자식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많이 들긴 하였어도 아직은 충분히 일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당시 마을에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래저래 찾다가 가게 된 곳이 구평에 있는 한 보세 공장이었다. 처음 보세 공장을 갔을 때는 연세가 많으신데 괜찮으시겠냐며 관리자로부터 걱정도 들었으나 할머니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흡족해하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주로 실밥도 따고 다림질하는 일을 하셨는데, 한 달에 받는 월급은 25만 원이었다. 하지만 보세 공장 일은 크게 재미가 없었고 월급도 많지 않아 몇 달 만에 그만두셨다.

그 후에는 역시 구평에 있는 ‘농빠’라고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빼빠’ 같은 것을 닦고 본드 묻히는 일을 하였다고 하는데, 목공소에서 많이 사용하는 사포로 나무의 거칠거칠한 부분을 다듬거나 본드를 사용해서 나무 조각들을 붙여 가구로 만드는 일이었다. 여자가 하기에는 조금 거친 일이었지만 보세 공장에 비해 월급이 2배 가깝게 많아 다니는 재미는 쏠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본드 바르는 일에 열중하다 그만 본드를 들이마시고 쓰러지시고 말았다. 순간 호흡이 나빠지면서 숨이 찼고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곧 죽을 것 같았는데,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결과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보름 가까운 기간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식들이 난리다. “일 좀 그만 하이소, 일 좀 그만 하이소, 엄마 생활비를 어떻게든 우리가 댈 것이니 이제는 가지 마이소.”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저것들 거둬 먹이고 가르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벌어서 키운 자식들인데, 이제는 엄마 일하는 것을 만류할 정도로 많이 컸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고단하고도 길었던 할머니의 돈벌이를 그렇게 끝이 났다. 할머니 나이 60하고도 대여섯은 더 먹은 해였다.

“그때 그리 그질로 마 아들도 못 가라 카고 저거 둘이서 돈을 내고 이래 가지고 퇴원을 시키 가지고 못 가라 케사서. 그라고는 세월도 없고 받아 주도 안 하고, 나 많은 사람은 그래 가지고 못가고 들어앉아 있는 게 이 길로 안 들어 앉아가 있는교. 그리 됐어요. 사연이.”
큰아들
여느 어머니에게 그렇듯 할머니에게도 큰아들은 힘겨운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러 다니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아들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킨 것은 할머니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보람이었다. 아미동 산동네에 큰아들 또래의 친구가 10여 명 있어도 고등학교 졸업한 친구는 아들 한 명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회사를 잠깐 다니다가 곧 입대하였고, 제대해서는 삼성 계열사에 들어가 수금 사원으로 일하였다. 30세 되던 해 야무진 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예쁜 딸도 둘이나 얻었다. 결혼한 후에는 배관 기술을 배워서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는데, 돈을 꽤 벌면서 제법 살 만하였다.

결혼한 지 딱 10년 되던 해, 주인집 공장의 지붕을 손봐 주던 아들은 2층 아래로 떨어지면서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하였다. 동래봉생병원에서 1년 3개월에 걸친 재활 치료도 받았으나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움직여지지 않는 하반신을 팔의 힘만으로 이방 저방 끌고 다니던 아들은 3년 전에는 발목 부위에 욕창이 생겨 한쪽 발목을 절단하기도 하였다.

“인물이나 비미 좋나. 내 참말로. 너무너무 아깝아서. 이 동네 그때만 해도 공부 시킨 사람 하나도 없었어. 우리 큰 거 저거는 한 저거 친구 열 몇 명 있어도 고등학교 나온 거는 그거 하나밖에 없어. 내 복이 그렇게밖에. 애비야 죽는 거 카면 니 얼굴 쳐다 보이 낫다. 마 됐다. 내 복이 그런 건데 우짜겠노. 화내지 말고 살아라.”

힘들게 벌어서 어렵게 공부시켜 놓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남한테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할머니는 그런 한 많은 세상을 살고도 아직 살아 있다며 한탄하신다. 그래도 아들은 각종 부업에다 컴퓨터 관련 일까지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면 마다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 좌절하지 않고 가족들이랑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니 고맙고, 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던 며느리도 떠나지 않고 아들 곁을, 그리고 두 손녀 곁을 지켜 주고 있어 너무너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곡절 많았던 사연을 얘기하시면서 가끔 눈물을 보이시기는 해도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 가시던 할머니는 큰아들 얘기를 끝내시고는 슬그머니 문갑을 열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으셨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아들. 그 아들을 못 본 지도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 추석에는 만나러 갈 작정이라며 너무 ‘추집게’ 보이지 않도록 미장원을 다녀올 작정이라 하신다.
지금은 살기 좋은 마을
일제 강점기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던 화장장이 1957년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전된 후 아미동은 주택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아미동에서도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당시 아미동 주민들의 활동은 특히나 적극적이어서 “이 마을 사람들처럼 새마을 사업을 열심히 한 사람들도 아마 드물꺼라”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이 나오라 하면 어찌 그리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던지, 그 덕택에 마을은 빠르게 변해 갔다.

아미동으로 통하는 도로는 큰길에서 화장장까지 이르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마을 가운데를 종단하면서 괴정으로 이어지는 좁은 언덕길뿐이었는데,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이 길은 1960년대쯤 넓혀졌다가 그 후에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되었는데, 1990년쯤 이 길로 마을버스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인자는 여기 게안소. 인자는 신사다. 도로 저거 다되가. 포장 다했지. 그 전에는 마 그냥 이 길도 없었고 뭐. 여는 천 없는 사람도 골목에 한번 올라오면 골목이 요리조리 요리조리 이래가 있기 땜에 못 찾아와.”

도로가 정비되면서 다니기 시작한 마을버스는 아미동 주민들의 외출을 한층 편하게 해 주었다. 차가 올라오지도 못하는 동네에 갑자기 위독해진 할아버지를 병원까지 데리고 갈 방법이 없어 연탄 나르는 수레에 부탁해서 모시고 갔던 일을 생각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하지만 큰 시내버스가 아미동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버스 나온다 케서 놀랬지 뭐, 참말로. 허허. 암만 돈이 없어도 버스 인자. 그때는 세월도 좀 좋았고. 우리도 아들도 다 컸고 살기도 나았고. 아구 그때만 해도, 시집 장가 다가고 난 뒤에 버스 들어왔지 얼매 안 됐어. 어, 인자 새마을 버스 다니지 큰 버스는 여기 옴니까. 큰 버스는 여기 다닐라 카이카네 모두, 길 낼라 카이까네 길로 못 내가 가지고 장소가 비잡어서. 이 사람들로 모두 떠다가 앵겨야 뭐 우째 되니까네. 여 전부 옛날 이북 사람들 피난 와 가지고 많이 살다가 독립해가 많이 나갔어요.”

물이 없던 동네에 공동 수도가 생기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아래 도청까지 물을 길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공급해 주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수십 명씩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서 순서를 기다렸다가 물을 받아야 하였지만 옛날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불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댁에 수도가 들어온 것은 할머니 나이 일흔도 넘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신다. 2010년 까치 고개에 배수지가 생기면서부터는 아미동에도 24시간 급수도 가능해졌는데, 언제든지 콸콸 나오는 수돗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주민들은 “이 동네만큼 물이 풍부한 지역도 없을 거라”며 지난 고생을 회상하곤 한다.

화장실도 많이 개선되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계셨지만 한 20년 전부터는 집집마다 정화조를 묻는 집들이 생겼고, 지금은 세대 내에 화장실을 가진 집들이 꽤 된다. 아미동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공동 화장실은 3개 정도인데, 수세식으로 리모델링되어 제법 편리해졌다. 할머니가 다니는 화장실은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편이다. 젊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는데, “밥풀이라도 주워 먹을 정도로 깨끗해서 어지간한 집 화장실보다도 낫다”고 하신다.
시대를 못 타고 나서
언젠가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한 다리는 이제는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그래도 나이 80이 되기 전까지는 불편은 해도 지팡이를 짚지 않고 다닐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도 걷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그 높은 곳을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였으니 다리가 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는 요즈음 거의 집에만 계시는데, 이웃들과 골목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외출이라면 아래 대학병원 옆 의원과 서구 충무동 근처에 있는 병원에 다니는 일이 유일하다. 그렇게 내려갈 때면 장을 봐 오기도 한다.

“할머니는 인자 나이가 있는데. 인자 다리를 못해 걸음을 못 걸어. 여를 얼마나, 물을 이고 아를 엎고 물을 이고 말 몬 하요. 그때 세상을 얘기를 하면 목이 맥혀서. 너무 힘들게 살아서……. 버스 타고도 나는 많이 몬 나가요. 집에 있지 뭐. 버스 있어도 내 볼일 보고 이라지. 딴 데 갈 데가 어디 있노 인자. 나가 많고 친정도 없는데…….”

또래 할머니들에 비해 훌쩍 큰 키에 86세라는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고운 피부의 할머니는 젊었을 적에도 곱다는 소리를 제법 들으셨단다. 속 타는 세월은 안으로만 곪은 것인지, 할머니는 모진 목숨 아직까지 죽지도 않는다며 말끝마다 한숨만 늘어지신다. 밤에 가만히 누워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면 그저 눈물만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까마득하기만 한 시간들이 또 어떻게 생각하면 하루 저녁같이 다 지나가 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세상에 태어나 좋은 세월 한 번 못 가져 보고 애 터지는 세월만 살면서 내 청춘을 다 보낸 것이 너무너무 서글프다.

“젊을 때는 참 건강도 좋고 인물도 좋고 모두 그래사서. 키도 크고. 옷 입어 노면 한복이고 양장이고 참 멋이 있다고 케사터만. 시대를 몬 타고 나서 너무너무 힘이 들고.”

그래도 자식들을 이만큼이나 가르치며 키운 건 힘겨운 삶에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자 할머니가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내 후손들이나 우짜든동 잘되어야지, 잘되어야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식 하나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던 전형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때 세월에 그것은, 이 동네치고는. 그때는 공부 시키는 사람 이 동네는 없었고. 그래도 세월이 흘러가니카네 모두 인자 모두 쪼깨끔 쪼깨금 인자 자석들을 여기도 갈채사서 그렇지. 여게는 모두 사는 건 여력이 없지. 밥 못 끼리 묵는 사람 아들 요런 거 요런 거 전부 수건 덮어 쓰고 공장 의자 공장 보세 공장 간다고……. 우리 아들 고등학교 나올 때꺼정 내가 고상을 해서 그렇지 저거들은 일을, 학교 댕기다 보이 일도 몬 하고.”

전쟁 통에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아미동. 그동안 좋은 아파트를 사서 떠난 사람들도 있고, 뒤늦게 이 힘겨운 고개를 올라와 새로운 이웃이 된 사람들도 있고, 60여 년의 긴 세월에 세상을 이미 버린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서 지금 아미동에는 빈집이 많아졌다. 할머니도 50년 넘은 긴 시간을 아미동에서 살면서 떠나고 싶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야 하였던 팍팍한 살림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갈 곳 없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곳 아미동, 사는 내내 고생한 기억으로 가득한 장소지만 청춘을 다 보내며 아이들을 키워 온 이곳. 이 집이 할머니에게는 고향인 것처럼 느껴지신단다. 내 여생까지 잘 지내다 마무리하고 싶은 제2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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