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 이윤선의 할매 파전
정식으로 가게를 열어 파전 영업을 시작한 것은 강매희의 며느리이자 김정희 대표의 시할머니인 이윤선이었다.
“우리 집안이 [동래 파전으로 가업을 이은 것은] 4대째인데, 이렇게 허가 낸 가게를 하면서 운영을 한 것은 2대째 할머니 이 자 윤 자 선 자, 이윤선 할머니부터 했어요. 강매희 할머니[시증조]가 가업으로 시작은 하셨지만, 정식으로 영업적인 매장으로 한 거는 이윤선 [시]할머니 때부터였어요. 동래 파전이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입에 오르내리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된 거는 이윤선 [시]할머니 때부터입니다. 제일 식당이라고 해서, 1960년대에 이윤선 [시]할머니가 이런 정식적인 가게를 하셨어요.”
이 무렵 동래 시장 일대에는 제일 식당 외에도 파전 가게가 여럿 있었다. 지금은 명맥이 끊어졌지만 용각, 수정집, 이화장 등이 모두 솜씨 있는 이들이 운영하는 파전 가게였다. 이 가게들은 각각의 특징을 살린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 가운데 제일 식당은 주인의 온후한 품성이 특징이어서 할매집으로 불리었다. 뒤에 가게 이름을 동래 할매 파전이라고 고친 것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에 동래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최해군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할매는 추강(秋江) 여사였는데, 깔끔하면서도 온후한 가운데 교양과 화술을 가진 분으로 당시만 해도 60대 나이였습니다. [중략] 비록 조그마한 가정집 구조에 그 무슨 장식도 없는 온돌방이었지만, 향파[이주홍]가 가면 솥에서 전을 붙이던 추강 여사[할매]는 ‘아이고, 향파 선생님’ 하고 그 온후한 기품 있는 얼굴에 너그러운 웃음을 담뿍 담고 환대했습니다.
먼저 파전과 집에서 빚은 특유의 동동주 또는 막걸리로 상으로 차린 뒤, 함께 간 사람이 두어 사람이면, 당시 일하는 사람이 아주머니 한 분이었는데, 그 아주머니에게 파전을 붙이기 위해 버무려 둔 파전감을 이래라 저래라 이르고는 자리를 같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오래도록 향파의 해학과 추강의 응수가 무르익다 보면, 자리에 안주와 술이 얼마나 나왔는지를 몰라 대충 잡아 술값을 매겼는데, 손님 쪽이 되레 더 나왔을 거라고 우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인이자 향토사학자인 최해군씨에 따르면 이윤선은 추강 여사로 불리었고, 수산대[현 부경대] 교수이자 문학가인 향파 이주홍을 비롯해서 동래고보[현 동래고] 출신으로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 교육대 학장 김하득, 동래 민중병원 원장이자 수필가인 박문하, 부산대 국문과 교수 박지홍, 교육대 교수 이주호 등 지역 문인들이 단골손님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서울 등지에서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지영, 시인 구상, 소설가 송원희 등 벗이 왔을 때도 이들은 동래의 특미 동래 파전을 맛보며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추강이라는 이윤선의 호 역시 이렇게 어울리던 문인 가운데 누군가 붙여 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 박문하는 동래 지역을 대표하는 항일 운동 가문의 일원이다. 동래청년동맹, 신간회,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 의사는 박문하의 형이자 누이였다. 그래서인지 박문하는 동래의 향토 음식인 동래 파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추강 이윤선과의 인연도 각별했다. 그 시절 박문하는 동래 파전과 추강 여사의 파전 가게에 대한 글을 다수 남겼는데, 이 글귀들은 지금까지 동래 할매 파전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런 인연으로 최근까지도 박문하의 자손들이 동래 할매 파전을 찾아와 옛 일을 이야기하며 정담을 나눈다고 김정희 대표는 말한다.
“그때 제일 식당이 있던 자리는 현재는 철거되어 도로가 되었지요. 지금 우리 가게[동래 할매 파전] 바로 앞에 있는 잔디밭의 끝 부분이 옛날 제일 식당이 있던 곳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좁은 골목을 따라 아주 작은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제일 식당은 이 골목의 입구에 있었어요. 도로를 내면서 골목을 따라 줄지어 있던 집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현재 그곳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넓은 골목이 되었지요.”
최해군씨는 당시 제일 식당을 출입했던 이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동래 할매 파전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면서, 현재 동래 할매 파전 근처의 다른 파전 가게를 옛날 제일 식당이 있던 자리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라는 것이 김정희 대표의 이야기다. 예전과 달리 골목과 도로가 넓어진 것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 이유일 것이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뒤 제일 식당은 점차 확장되어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