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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80년 대를 이는 손맛, 동래 파전
파전 먹는 재미로 동래장에 간 사람들
부산의 동래에는 파전이라고 하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있다. 이름 하여 동래 파전이다. 쪽파라고 불리는 작은 파에 해물을 비롯한 갖가지 부재료를 더한 파전, 곧 파 지짐이다. 예부터 부산 지역은 음식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산물을 제외하고는 부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나 요리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런 가운데 동래 파전은 이름부터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것만큼, 오랫동안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아 온 음식이다. 동래에서 4대째 동래 파전을 가업으로 이어 오고 있는 동래 할매 파전의 김정희 대표는 동래 사람들의 파전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동래 제일의 번화가가 장이 서는 동래 장터였지요. 여기서 장이 설 때면 솜씨 있는 할머니들이 파전을 지졌고, 그 맛이 퍼져 나가게 되었대요. 그래서 ‘장 보는 건 둘째 치고, 파전 먹는 재미로 동래장에 간다’는 말이 생겼고, 동래장에 가는 것을 ‘파전 먹으러 간다’고 했대요. 1994년도에 제가 동래 할매 파전 가게를 맡고, 얼마 뒤에 카탈로그를 제작하면서 동래 파전의 유래라고 구전되어 오는 이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지요.”

동래장은 지금의 동래구청 부근에서 닷새마다 서는 5일장이었다. 2일과 7일마다 열리는 동래장은 전국에서도 큰 장으로 꼽혔고, 내상(萊商)이라 불리는 동래 상인의 중심지였다. 기장과 양산 등 주변 농촌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거래되면서, 동래장은 이 지역의 문화와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런 동래장에 동래 파전이라는 새로운 명물이 등장했던 것이다. 동래에 5일장이 서던 시절, 사람들은 ‘동래 파전 한 접시를 먹지 못하면 동래장에 다녀온 축에 속하지 못한다’고 했고, 장을 볼 일이 없더라도 동래 파전을 맛보는 재미에 장날이 돌아오길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동래 파전을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임금에게 진상한 명품 요리, 동래 파전
그렇다면 동래 파전은 지체 높은 귀족들이 즐기던 요리였다는 것인데, 이런 동래 파전이 언제부터 일반 서민들도 먹는 음식이 되었을까? 이와 관련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에 동래 시장의 동문 입구에 있던 유명한 요릿집인 진주관의 주 요리로서 동래 파전이 등장하여 손님상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즉 일제 강점기 동래 일원에서는 이전에 양반들이 즐기던 동래 파전이 평민을 대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래 할매 파전 김정희 대표의 시증조모인 강매희가 파전을 구워 동래 장날에 내다 팔았던 것도 이 즈음이다.

“할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으니까 사람들이 ‘장 서는 날에 솜씨 한번 발휘해 봐라’라고 했어요. 이때는 가업이라기보다는 생계형으로 했겠지요. 팔자가 좋았으면 [집에] 가만히 있었을 건데, 솜씨는 있지,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했겠지요. 당시에는 가게가 없어도 장이 서는 날에는 영업을 할 수 있으니까, 장이 서는 날만 하신 걸로 제가 들었어요.”

강매희 할머니는 평소 음식 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우연히 만든 동래 파전을 맛본 주위 사람들이 시장에 내다 팔아 보라고 권유했고, 이것이 동래 파전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동래 파전에 전업적으로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가게를 열어서 영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동래에 장이 서는 날마다 파전을 구워 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파는 정도였다. 그래도 강매희 할머니의 동래 파전은 맛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정산에도 파밭이 많았고, 기장에도 파밭이 많았다고 해요. 부곡동 거기는 논이 비옥했기 때문에 벼농사를 지었지요. 그리고 동래는 바닷가 가까이에 있으니까 해산물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서 나오는 파와 찹쌀, 해산물 이런 걸 가지고 와서 [파전을] 만들었지요. 우리 [시]할머니, [시]어머니 때에는 기장에 밭이 있었어요. 파밭이. 직접 재배하는. 거기서 공수해 오고 했어요.”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제 강점기에 기장은 조선 쪽파의 주요 산지였다. 동래는 194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산에 편입되기 전까지 부산과는 별개의 지역이었으며, 금정산 일대와 기장은 행정 구역상 동래에 속해 있었다. 당시 기장과 동래는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런 기장에 파밭을 소유한 것은 파전 가게를 운영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추강 이윤선의 할매 파전
정식으로 가게를 열어 파전 영업을 시작한 것은 강매희의 며느리이자 김정희 대표의 시할머니인 이윤선이었다.

“우리 집안이 [동래 파전으로 가업을 이은 것은] 4대째인데, 이렇게 허가 낸 가게를 하면서 운영을 한 것은 2대째 할머니 이 자 윤 자 선 자, 이윤선 할머니부터 했어요. 강매희 할머니[시증조]가 가업으로 시작은 하셨지만, 정식으로 영업적인 매장으로 한 거는 이윤선 [시]할머니 때부터였어요. 동래 파전이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입에 오르내리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된 거는 이윤선 [시]할머니 때부터입니다. 제일 식당이라고 해서, 1960년대에 이윤선 [시]할머니가 이런 정식적인 가게를 하셨어요.”

이 무렵 동래 시장 일대에는 제일 식당 외에도 파전 가게가 여럿 있었다. 지금은 명맥이 끊어졌지만 용각, 수정집, 이화장 등이 모두 솜씨 있는 이들이 운영하는 파전 가게였다. 이 가게들은 각각의 특징을 살린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 가운데 제일 식당은 주인의 온후한 품성이 특징이어서 할매집으로 불리었다. 뒤에 가게 이름을 동래 할매 파전이라고 고친 것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에 동래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최해군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할매는 추강(秋江) 여사였는데, 깔끔하면서도 온후한 가운데 교양과 화술을 가진 분으로 당시만 해도 60대 나이였습니다. [중략] 비록 조그마한 가정집 구조에 그 무슨 장식도 없는 온돌방이었지만, 향파[이주홍]가 가면 솥에서 전을 붙이던 추강 여사[할매]는 ‘아이고, 향파 선생님’ 하고 그 온후한 기품 있는 얼굴에 너그러운 웃음을 담뿍 담고 환대했습니다.

먼저 파전과 집에서 빚은 특유의 동동주 또는 막걸리로 상으로 차린 뒤, 함께 간 사람이 두어 사람이면, 당시 일하는 사람이 아주머니 한 분이었는데, 그 아주머니에게 파전을 붙이기 위해 버무려 둔 파전감을 이래라 저래라 이르고는 자리를 같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오래도록 향파의 해학과 추강의 응수가 무르익다 보면, 자리에 안주와 술이 얼마나 나왔는지를 몰라 대충 잡아 술값을 매겼는데, 손님 쪽이 되레 더 나왔을 거라고 우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인이자 향토사학자인 최해군씨에 따르면 이윤선은 추강 여사로 불리었고, 수산대[현 부경대] 교수이자 문학가인 향파 이주홍을 비롯해서 동래고보[현 동래고] 출신으로 민의원 의장을 지낸 곽상훈, 교육대 학장 김하득, 동래 민중병원 원장이자 수필가인 박문하, 부산대 국문과 교수 박지홍, 교육대 교수 이주호 등 지역 문인들이 단골손님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서울 등지에서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지영, 시인 구상, 소설가 송원희 등 벗이 왔을 때도 이들은 동래의 특미 동래 파전을 맛보며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추강이라는 이윤선의 호 역시 이렇게 어울리던 문인 가운데 누군가 붙여 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 박문하는 동래 지역을 대표하는 항일 운동 가문의 일원이다. 동래청년동맹, 신간회, 근우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 의사는 박문하의 형이자 누이였다. 그래서인지 박문하는 동래의 향토 음식인 동래 파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추강 이윤선과의 인연도 각별했다. 그 시절 박문하는 동래 파전과 추강 여사의 파전 가게에 대한 글을 다수 남겼는데, 이 글귀들은 지금까지 동래 할매 파전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런 인연으로 최근까지도 박문하의 자손들이 동래 할매 파전을 찾아와 옛 일을 이야기하며 정담을 나눈다고 김정희 대표는 말한다.

“그때 제일 식당이 있던 자리는 현재는 철거되어 도로가 되었지요. 지금 우리 가게[동래 할매 파전] 바로 앞에 있는 잔디밭의 끝 부분이 옛날 제일 식당이 있던 곳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좁은 골목을 따라 아주 작은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제일 식당은 이 골목의 입구에 있었어요. 도로를 내면서 골목을 따라 줄지어 있던 집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현재 그곳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넓은 골목이 되었지요.”

최해군씨는 당시 제일 식당을 출입했던 이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동래 할매 파전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면서, 현재 동래 할매 파전 근처의 다른 파전 가게를 옛날 제일 식당이 있던 자리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라는 것이 김정희 대표의 이야기다. 예전과 달리 골목과 도로가 넓어진 것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 이유일 것이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뒤 제일 식당은 점차 확장되어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다.
동래 파전에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는데
하지만 세월의 변화와 함께 동래 파전도 부침을 피할 수 없었다. 경제 개발의 성과가 가시화되었던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래 음식이 들어오고 입맛도 서구화되면서 서구적인 음식 문화가 요리 세계를 평정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전통적인 음식들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되었다. 동래 파전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더 이상 고급 요리로 인정받지 못했고, 자부심도 상처를 입었다.

“[시]할머니 때는 많은 사람이 와서 드신 게 아니에요. [시]할머니는 작은 영업장에서 자신과 콘셉트가 맞는 손님을 위주로 해서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규모도 작고 하니까 일대 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시절이었지요. 그걸 우리 [시]어머니가 물려받았을 때는 그냥 일반 음식점이 되어 버렸어요. 근데 이게 다른 음식에 비해 모양이 예쁜 것도 아니고, 음식점 분위기가 고급 레스토랑 이미지도 아니고 하다 보니, 점차 특징도 없어지고 설 자리가 좁아졌어요.”

이윤선이 운영하던 시절에 동래 파전 가게는 대중음식점이 아니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방식도 대단위로 손님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래 파전을 선호하는 소수의 고객을 상대로 하였다. 하지만 시어머니인 김옥자가 가게를 물려받았을 무렵 동래 파전은 이제 명품 요리가 아니라 그저 색다른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찾는 별미 음식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시어머니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동래 파전은 대중 음식으로 변하였고, 단골손님도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동래 시장 인근의 여러 동래 파전 집들은 명맥을 잇지 못하고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김정희 대표가 가업을 물려받은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제가 처음에 가게를 물려받았을 시절에는 사람들이 전통 음식에 별로 애착을 가지지 않았어요. 어떤 때는 한정식에서 다른 요리는 다 메인 요린데, 이건 전거리밖에 안 되더라고요. 저잣거리의 간식밖에 안 되는 대접을 받았어요. 심지어 구청에서 나와서 ‘이게 무슨 향토 음식이냐!’라고 하면서 무시할 때도 있었어요. 그만큼 향토 음식이고 전통 음식이고 간에 너무 천대를 받았어요. 그러니 그 시절에는 정말 속이 많이 상했어요.”

그러나 20세기 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로 상징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각과 각성이 사회 전반을 휩쓸게 되면서 전통의 맛, 향토색 짙은 음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동래 파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고, 동래 할매 파전은 부산시에서 지정하는 민속 음식점 1호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동래 파전 역사의 제2 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는 셈이었고, 1930년대 동래장에 좌판으로 등장한 이래 가업으로는 4대째이고 기간으로는 80년을 넘기고 있다.
조선 쪽파 이야기
대체 동래 파전의 어떤 것이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어떤 이의 인생을 던지게 만들고, 어떤 이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동래 할매 파전 김정희 대표의 안내에 따라 동래 파전을 만드는 과정과 동래 파전을 굽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파전인 만큼 먼저 쪽파 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뭐니 뭐니 해도,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재료가 좋아야지요. 우리 파전은 조선 쪽파, 어른들이 말하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처럼, 키가 작달막한 조선 쪽파를 써야 합니다. 제가 새댁 때 우리 [시]어머니께 물으니까, ‘조선 쪽파는 대가 짧고 흰 부분하고 파란 부분의 선이 분명한데, 그런 게 우리 파전을 만드는 데 제일 좋다. 제일 부드럽고 달고 맛있다’고 했어요. 그걸 껍질을 벗기면 그렇게 매워요.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시]어머니는 ‘그게 불 위에서는 단 맛으로 바뀐다’고 하시더라고요.”

쪽파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육질이 단단한 조선 쪽파는 요리를 했을 때 물이 적게 나오고 단맛이 나는 반면, 수분 함량이 높은 물파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자란 듯 보여도 요리를 하면 물이 나와 반죽을 희석시키고 단맛도 적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지마다 맛의 차이가 있어서, 기장 쪽파는 파전의 재료로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기장에서 쪽파밭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1990년 무렵까지도 파를 많이 재배했지만, 최근 시가지 개발에 이은 관광 단지 조성 바람에 경작지가 급속히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동래 파전은 새봄의 기운을 전하는 음식
쪽파의 맛을 결정하는 데는 계절적 요인도 작용한다.

“쪽파의 맛은 계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따뜻한 봄날의 파전이 제일 일품이다’고 하셨는데, 추위를 이겨 내고 견뎌 낸 봄에 핀 쪽파가 가장 좋기 때문이지요. 그때의 파전은 정말 맛있습니다. 근데 그 철이 아닌 거는 좀, 물파이지요. 물이 많이 생기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은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절기다. 이날을 전후로 조선 쪽파는 가장 물이 오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래 파전은 새봄의 기운을 전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원래 쪽파는 이 철이 제철이었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해 일 년 내내 쪽파가 생산되지만, 본래 그것은 사철 농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동래 파전도 계절 음식이었다. 그러면 쪽파가 생산되지 않는 철에 동래 파전 가게는 어떻게 운영됐을까.

“[시]할머니 때는 쪽파가 나지 않는 철에는 가게 문을 닫아야 했어요. 이 점에서 이윤선 할머니는 과감한 성격이었지요. 그 시절의 영업 마인드라고 하는 것이 요즘하고는 좀 다른 것도 있었고요. 어차피 단골들이 주요 고객이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시]어머니 때는 사시사철 쪽파가 생산되었어요. 그래서 가게도 일 년 내내 열 수 있었지요.”

이 때문에 지금도 오래된 단골일수록 봄철에 동래 파전을 찾는다고 한다. 쪽파의 겉껍질을 모두 벗겨 내고 부드러운 속대만 사용하는 것도 동래 파전의 특징이다. 이것은 쪽파의 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한때 동래 할매 파전의 김정희 대표는 프랜차이즈 체인 운영을 제의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가장 우려되었던 것이 체인점에서 쪽파의 속대만을 사용하는 원칙을 지킬 수 있을지 하는 점이었다고 한다. 예전에 동래 파전에는 동래읍성(東萊邑城) 일대에서 나는 미나리를 넣어 부쳤지만, 현재 김정희 대표는 미나리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쪽파는 동래 파전에 들어가는 재료 가운데 유일한 야채이다. 그만큼 쪽파의 비중도 커진 것이다.
동래 파전에는 오징어가 없다
쪽파와 함께 동래 파전의 특징은 싱싱한 해산물에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파전이 오징어를 듬뿍 넣는 것과 달리 동래 파전에서는 오징어를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내륙 지방에 있으면 어려운 일인데, 바닷가에 있으면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지요. 근데 다른 데서는 파전을 만들 때 오징어를 넣지만, 우리 동래 파전에는 전통적으로 오징어는 안 들어갔습니다. 대합, 굴, 새우, 바지락, 키조개, 조갯살 같은 것을 넣습니다. [시]할머니 때부터 좀 품격 있는 해산물만 넣더라고요. 그리고 해산물은 손질한 것을 바로 넣어 굽습니다. 해산물을 미리 볶아 두면 단맛이 다 빠지고, 반죽에 해산물의 맛이 어우러지지 않아요. 그러면 파전이 맛이 없습니다. 우리 집 파전이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반죽 역시 밀가루, 찹쌀가루, 멥쌀가루를 비롯해서 예닐곱 가지 정도의 곡물을 사용한다고 하니, 웬만한 미식가가 아니고서는 반죽에 들어가는 곡류를 모두 알아맞히기가 어렵다.

“다른 파전과 달리 동래 파전은 찹쌀가루를 좀 많이 넣어서 바삭거리지 않는 파전, 좀 질척한 파전입니다. 부드럽고 연한 맛이죠. 요즘 우리 음식은 어떻습니까. 자극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합니다. 과자도 바삭거리는 과자가 아니면 안 좋아하지요. 동래 파전은 이런 것과는 다른 맛이지요. 저는 동래 파전의 부드러운 맛이 우리 할머니들의 부드럽고 온화한 품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일반적인 파전과 동래 파전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특히 반죽에 들어가는 찹쌀가루는 쫄깃한 맛과 영양뿐 아니라 반죽의 점성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한다. 동래 파전을 굽는 과정에서 반죽의 점성은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반죽에 사용하는 물은 따로 맛국물을 내서 쓴다. 맛국물 역시 일반 다시 국물의 재료 이외에 대파와 잔 파 등 파뿌리와 각종 한식 재료를 넣어 함께 끓여 만들어 사용한다. 반죽의 양념은 재래식 간장으로 하는데, 이것 역시 동래 파전을 다른 것과 구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를 두고 김정희 대표는 ‘우리 재래의 장 문화를 파전과 접목시킨 것으로, 남과 차별화되는 자기만의 색깔’이라고 말한다. 이외에 소고기를 다져 두면 재료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다.
파전,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동래 파전 기술 익히기
준비가 끝났으면 이제 동래 파전을 구워 본다. 파전을 굽는 기름은 유채 기름을 고집한다.

“할머니 때부터 유채씨 기름을 썼어요. 요즘이야 여름 휴가철이 제일 성수기지만 할머니, 어머니 때만 해도 파전은 봄철이 제철이었거든요. 유채꽃이 봄에 피기 때문에 그래서 썼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전이라는 게 기름에 넣어 지지는 음식이기 때문에 느끼하잖아요. 근데 유채 기름은 기름 중에서 좀 덜 느끼하거든요.”

동래 파전은 굽는 방법도 매우 독특해서, 단순히 앞뒤를 뒤집어서 굽는 것이 아니다. 이는 파전에 들어가는 재료들 때문이다.

“번철에 유채 기름을 두르고 쪽파를 펴 줄지은 다음 그 위에 해물과 다진 소고기를 얹습니다. 그 위에 쪽파를 한 번 더 놓고 반죽 물을 끼얹지요. 그러면 파전이 상당히 두껍게 됩니다. 근데 그걸 그냥 놓아두면 밑은 타고 위는 전혀 안 익고,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걸 탁 뒤집어 갖고 쭈욱 펼쳐 줘야 됩니다. 펼쳐 주면 해산물과 소고기가 낱개 낱개 모두 다 불에 닿게 되지요. 그래야 익습니다. 그 두꺼운 게 익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아닙니까.

그 위에 또다시 반죽 물을 넣습니다. 이렇게 재료를 모두 익힌 뒤에는 다시 파전을 오므려서 원래 크기로 줄입니다. 마치 아코디언 연주할 때 건반을 벌렸다가 모았다가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펼쳤던 파전이 감쪽같이 다시 붙는 것은 찹쌀가루를 넣어 반죽의 점성을 높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손님들은 파전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기상천외하다. 벌려 펼쳤다가 오므려 모았다가, 이런 비밀 공정이 들어 있는 줄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흥이 나서 파전을 굽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희 대표는 동래 파전은 흥이 있는 음식이며, 맛도 있고 멋도 있고, 풍류도 있고 가락도 있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이 굽는 과정은 동래 파전을 다른 음식과 차별시키는 또 하나의 독특함이다. 그래서 동래 파전을 굽는 번철은 일반적인 것보다 크고 두껍다고 한다. 펼쳤다 오므렸다 하기 위해서는 커야 하고, 찹쌀가루가 든 반죽이 눌러 붙지 않게 하려면 두꺼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계란을 깨서 올리고 잠시 뚜껑을 덮어 살짝 익혀 냅니다. 마치 찜을 하듯이 마무리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파전은 굽는 것인데도, 마지막 단계에서 익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특징을 지닙니다. 이 때문에 동래 파전은 바삭한 것이 아니라 쫄깃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지요.”

원래 ‘전(煎)’이란 굽는 것이고 ‘적(炙)’이란 찌는 것인데, 동래 파전은 이 두 가지 조리법을 섞어서 독특한 질감을 만드는 것이니 마지막까지 반전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만든 파전의 양념장은 초고추장이다. 지금은 손님들의 취향 때문에 초간장을 함께 내지만 원래 동래 파전의 양념장은 초고추장이라고 한다.

“본래 소스는 초고추장이 맞아요. 우리 어머니, 할머니가 쓰시던 거는. 아무래도 파전이 기름에 굽는 것이다 보니 좀 느끼하지요. 그래서 양념장은 개운한 맛을 주기 위해 초고추장으로 냅니다. 이건 예전부터 그랬어요.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느끼한 걸 싫어하잖아요. 그러니까 초고추장으로 파전의 느끼한 맛을 좀 감해 주는 거지요. 초고추장에는 감식초를 섞어 씁니다. 이렇게 하면 톡 쏘는 맛을 좀 줄인, 은근한 맛이 나는 초고추장이 되거든요. 반찬도 좀 칼칼한 것으로 냅니다.”

말하자면 양념장을 초고추장으로 하는 것은 맛의 조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외국 사람들도 오고 젊은 손님도 있어서, 두 종류를 제공하여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처럼 재료의 손질에서 굽는 과정과 양념장에 이르기까지 동래 파전은 큰 변화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는 동래 파전과 함께한 동래 사람들의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동래 파전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
재료의 손질에서 굽는 과정과 양념장에 이르기까지, 80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 동안 동래 파전은 원형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동래 파전과 함께한 동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로놓여 있다.

“1970~1980년대 그 즈음에는 이 동네 할머니들이 와서 파를 다 깠어요. 우리 집 뒤에 비좁은 집들이 많았거든요. 거기 사시던 할머니들이 우리 집에서 늘 파를 까고 하셨어요. 요즘이야 교통이 발달해서 인건비 조금만 더 준다면 어디서라도 일하러 올 수 있지요. 근데 그때만 해도, 요즘으로 치면 연제구만 돼도 ‘멀어서 다니겠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러니 옛날에는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이 다 와서 일했어요. 그래, 우리 집 입구에서 늘 할매들이 앉아서 파를 까고 있었지요.”

동래 파전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파의 겉껍질을 까는 일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어서 언제나 동원 가능한 인력이 필요했다. 이 일에는 주로 가게 주변의 이웃들이 품을 팔았다고 한다. 동래 파전에는 쪽파의 속대만 소용되었기 때문에 쪽파의 겉껍질은 작업에 참여한 이들이 가져갈 수 있었다. 파뿌리는 한약재로 사용되기도 하는 만큼 살뜰하게 챙겼다고 한다. 그러니 동래 파전은 동래 지역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온 음식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가게에서 먹고 자고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결혼했을 무렵에는 종업원들이 다 그랬어요, 지금은 그렇게 할 사람도 없지만. 그래서 우리 집에는 수십 년씩 일하신 분들이 많아요. 지금 우리 집에서 파전을 굽는 할머니도 2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계시지만, 이전에 파전을 굽던 ‘모야 할매’는 20대에 우리 집에 와서 30년 넘게 일을 하셨거든요. 그분이 돌아가실 때 희한한 일이 있었어요. 돌아가신 날 밤에 저의 꿈에 나타나서,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 간데이[간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 제가 생각했어요. ‘아! 우리 집을 지켜 주셨던 분은 [시]어머니, [시]할머니뿐이 아니고 수십 년을 여기서 몸담았던 사람들도 있구나’, ‘돌아가셨다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구나’ 하고요. 그래서 제 생각에 동래 파전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 가게만의 자산이 아니고, 동래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온 것입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음식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은 왕왕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동래 할매 파전도 이런 경우에 속했던 것이다. 동일한 가게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하는 것도 이런 근무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며 수십 년을 보내는 경우 이들 간의 유대감은 특별한 데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이들은 어느덧 동래 파전 역사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특히 할매들이 일을 많이 했어요. 우리 집 이름이 동래 할매 파전이 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시]할머니가 제일 식당을 쓰다가 [시]어머니가 할매 파전이라고 간판을 쓰셨어요. 손님들이 다른 파전 집하고 구별할 때 ‘할매집’, ‘할매 파전’이라고 불렀거든요. 우리 [시]어머니도 할매고, 우리 [시]할머니도 할매였지만, 우리 집에서 수십 년 동안 파전을 굽는 사람도 할매였고, 다른 일을 하는 분도 할매였어요. 전체적인 경영은 저나 [시]어머니나 [시]할머니가 하셨지만, 일선에서 직접 일을 하시는 분들은 모두 다 할매였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의 동래 파전 집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것을 보면서 [시]어머니가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래서 동래 파전이라는 이름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동래 할매 파전이라고 간판을 내걸었어요. 그러니까 동래 파전은 동래 할매들의 파전이지요.”

동래장에 파전이 나온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래 파전이 변함없이 전통의 맛과 풍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수십 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동래 할매들의 손맛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래 파전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래 파전 이야기에 손님, 단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80여 년을 이어 온 가게이고 보니 손님도 다양하다. 1960년대 추강 이윤선이 가게를 운영할 때와 같이 문화 코드가 맞는 단골은 아니더라도, 동래 파전 맛을 즐기는 단골이야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동래 파전의 맛을 ‘뭉클하다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맛’,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라고 한다. 또한 ‘고급스러운 재료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것도 변덕스런 손님들의 입맛을 80여 년이나 붙잡아 둘 수 있었던 동래 파전만의 독보적인 장점이라고 말한다. 단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추억에 젖어, 향수를 좇아 동래 할매 파전을 찾는 나이 든 이들도 특별한 느낌을 주는 손님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떤 분은 인생의 추억 여행을 하는 중에 우리 집에 들른 거예요.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비싸서 사 먹지 못했다’면서요. 아들 손을 잡고 왔어요. 어떤 사람의 추억 여행에 우리 집이 들어 있다는 게 참 뿌듯하데요. 그리고 다른 나라에 이민 갔다가 30년 만에 들렀다는 분도 있고. 이런 분들 가운데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파전에 대한 소감을 적은 손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땐 무척 감동을 받지요. 한 번은 외국 분이 오셔서 우리 집에서 파전을 드시고는 ‘지하철이 어디냐’고 묻기에 메모지에 긁적거려 주었는데, 몇 년 뒤에 그분의 자식이 그 메모지를 들고 우리 집을 다시 찾은 거예요. 자기 글씨는 단박에 알아보잖아요. 그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요즘에는 손님의 연령층이 다양해져 젊은이들도 많이 오는데, 그 취향에 맞추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김정희 대표가 가게를 맡고 난 뒤에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늘어났다. 외국인 가운데 가장 먼저 동래 파전을 찾은 것은 일본인이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일본인의 입맛에 잘 맞았던 게 아닐까 하고 김정희 대표는 짐작하고 있다. 일본인들 사이에 동래 파전 또는 동래 할매 파전 가게는 꽤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한국인들이 동래 파전을 무시할 때 일본인들이 먼저 동래 파전에 주목하여, 신문과 방송 등에서 여러 차례 취재를 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올해부터는 외국인의 경향이 좀 바뀌어서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반반 정도 된다고 한다. 김정희 대표는 앞으로 일본인보다 중국인 손님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인 손님도 있는데,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가운데 서양인 비율이 낮은 것을 생각하면 꽤 많이 오는 편이라고 한다.
동래 파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말하는 동래 파전
동래장의 명물로 등장한 이래 80여 년 동안 동래 파전을 찾는 사람들에게 동래 파전의 의미는 부단히 변해 왔다. 처음에 그것은 장터를 찾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되었고, 때로는 지역 문화인들의 멋과 풍류를 더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세월의 무상함으로 천덕꾸러기 전통 음식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이제 다시 외국인도 주목하는 가장 한국적인 향토 음식으로 되살아났다.

그동안 동래 파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동래 파전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에게 그것은 가업을 이어야 하는 책무감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 그것은 노동으로 이어 가는 일상이었으며, 동네 주민들에게 그것은 이웃이 함께 공유하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동래 파전은 수십 년을 함께 나눈 땀이고 눈물이고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동래 파전의 흥과 멋, 맛과 풍류, 그리고 가락을 지키며 함께한 사람들에게 동래 파전은 자신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작업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일생을 통해 지키고 싶은 소중한 과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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