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로장이 되기까지
어로장 김관일은 1944년생으로, 고향은 가덕도 대항동 대항 마을이다. 대항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외양포로 와 40년 넘게 살다가, 다시 대항으로 넘어간 지가 이십 몇 년 전이다. 바다 마을에서 태어난 어부의 자식인 만큼 가난을 이기기 위해 어릴 적부터 배를 탔다. 그 배가 숭어들이 배였고, 지금까지 50년 넘게 바다, 그리고 숭어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옛날에는 다 어렵다 아입니꺼? 겨우 국민[초등]학교만 나와 가지고 배타는 거밖에 더 하겠습니꺼, 못 먹고 살 때니까. 저도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문턱은 갔습니더. 부모가 워낙 재산이 없으니까 중퇴 안했십니꺼. 학비를 내야 다닐낀데, 학비가 없으니까. 그라고 나서 나도 숭어들이 배 탔습니더. 타다가 동네 어촌계에서 망보는 사람들이 은퇴하면 볼 사람이 없으니까 젊은 사람들 중에 연수생을 키우자, 그래가 저도 연수생으로 올라왔거든 예. 연수생을 7년 정도 봤습니더.”
앞서 보았듯, 어로장은 망대 위에서 육안으로 바닷속 숭어 떼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숭어가 완전히 그물 내에 들어왔을 때 메가폰으로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재빨리 그물로 숭어를 들어 올리는 일을 진두지휘한다. 그래서 ‘숭어들이’이고, ‘어로장’이다. 숭어 떼가 몰려올 때는 바닷물 색깔이 벌겋게 갈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 같은 일반인의 눈에도 그것이 간파된다면, 어로장 같은 특이한 직업은 애초에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로장이 되기 위한 연수 과정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저 밑에까지 가서 고기 올라오는가 보고 그러지, 여기 앉아서 배우는 게 아닙니더. 고기 마중 가는 거지, 쉽게 말해서. 원망은 여기 앉아있고 저 짝까지 마중 가서 올라오는가 안 오는가 보고, 고기 따라 올라오고 그런 일이나 하는 거지.”
어로장이 연수생 시절 고기 마중 나갔다던 ‘저 밑’은 숭어 떼의 이동 경로인 ‘포구나무개’와 ‘큰내끝’이다. 그곳에서 숭어가 노는 것을 관찰하다가 숭어가 이동하면 내동섬까지 산비탈 길을 뛰어서 원망에게 알려 준다. 일종의 척후병 역할이다. 이 과정을 통해 물속의 숭어 움직임을 보는 법을 익혔다.
“원망수하고 부망수하고 있고, 저는 연수생으로 들어왔으니까. 그래가 본래[원망] 하시던 분이 나이가 들어서 그만두고 나서, 내가 원망은 못되고 부망으로 들어갔다 아입니꺼. 부망 거쳐서 원망되는 거니까. 그래 있다가 허창호가 부망으로 되고, 내가 원망이 되어가 한 동안 둘이서 봤습니더.”
‘조망(助望)’이라고도 하는 연수 과정을 거쳐 부망이 되고, 다시 세월이 가면 원망이 된다. 앞서는 편의상 ‘어로장’과 ‘차석 어로장’이라 하였는데, 일종의 명예의 차이일 뿐 대우나 급여는 똑같았다고 한다. 김관일 어로장은 함께 연수생을 지낸 허창호 어로장과 나란히 원망과 부망을 하다가, 몇 해 전 몸이 불편하여 2~3년 쉬었다. 그 공백 기간에는 허 어로장이 맡아 했고, 작년부터는 원망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김관일 어로장은 누구에게 어로장 일을 사사 받았을까. 망대 뒤편에는 역대 어로장 13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역대 어로장의 수를 통해 대략 숭어들이의 역사를 짐작하는데, 어떤 이는 160년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170년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흔히 ‘200년 전통’이라고 한다.
“300년은 안됐을 겁니더. 옛날 왜놈들 오기 전에 했다고 하거든. 왜놈들 와서는 여기서 못보고, 저 밑에서 세워 놓고 봤다고 하거든. 왜놈들이 이 산에 한국 사람들 출입을 못하게 했다 안 합니꺼. 그렇게 계산하니까 한 200년이라는 계산이 나오지예.”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이니 대략 2백 년이나 된다. 열세 분의 역대 어로장 중 11대 김성관, 12대 주평원, 13대 구삼석 어로장은 김관일 어로장도 아시는 분들이라 한다. 특히 구삼석 어로장은 현 어로장과 원망-부망의 관계로 직접적인 스승이다.
숭어들이 철이면 이들 역대 어로장 제사도 지내고, 배에서 풍어제도 지낸다. 고사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선원들이 임의로 좋은 날을 받는다. 그러나 규모가 대단하거나 절차가 엄격한 건 아니고, 오늘 모인 3명의 어부들 말로는 ‘그냥 술이나 한잔 올리는 것’이란다.
“그냥 저녁 먹을라고 하는 거지 뭐.”
“본래는 선원들 먹일라고 하는 거지. 옛날에 먹을 거 없고 할 때 돼지나 한 마리 잡고 하면 큰 거 아이요? 선주하고 선원들 회식으로.”
농담처럼 툭툭 내뱉는 뱃사람들의 말투에 한바탕 크게 웃는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산신과 여서낭, 그리고 역대 어로장에게 지내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어촌계 주관의 고사가 있었다. 백설기와 흰밥[메], 과일, 마른 명태와 나무새, 그리고 술뿐인 간단한 고사상이지만 음복에는 돼지까지 잡았다. 여서낭 제단에는 따로 가위, 칼, 화장품, 실패 따위의 여성 용품이 든 플라스틱 바구니와 흰 여자 고무신 한 켤레를 오색 깃발의 서낭기와 함께 진설하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부들의 이러한 시큰둥한 농담에는 세상의 지나친 관심에 따른 피곤함도 한몫 하였다. 예전처럼 연일 만선이면 없는 얘기라도 지어내어 해주련만, 가뜩이나 맨날 빈손이라 울상인데, 이방인들의 호기심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 취급하듯 김치 한 사발 두고 먹는 밥그릇까지 찍어 가고 있다. 움칫하는 필자를 보고는 오늘은 어차피 글렀으니 괜찮다며 또 한바탕 웃었지만, 경황없이 산길을 올라오느라 알사탕 하나 못 사들고 온 빈손이 자꾸만 오그라든다.
지금이야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예전 숭어들이 재미가 좋을 때는 어로장의 지위가 꽤 높았다.
“숭어들이 배 탈라 카믄 이런 어르신들 집에 가서 똥·오줌 안 퍼주면 안 돼.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요즘 같으면 ‘촌지’의 의미가 ‘똥·오줌’이라니, 청탁치고는 정감 있다.
“옛날에는 어로장의 후보가 몇 있어서 연습생으로 있으면서 어로장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현재는 연습생이 없지.”
가덕도 숭어들이, 이방인인 필자가 보기에는 당장 내년을 보장 못할 것 같은데, 웬일인지 정작 이들 어부들은 느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