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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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밤바다를 밝히는 사람들
등대 가는 길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기 힘든 바닷가 외딴 섬에 등대가 홀로 서 있다. 처음 등대가 세워졌을 백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발길을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벽 위에서 망부석처럼 망망대해를 비추며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다. 지금은 외항선이나 컨테이너 선박이 등대 앞을 분주히 드나들고, 공간에 따라서는 복합 문화 공간,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찾고 있지만, 등대가 비춰 온 백여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결코 가벼이 볼 것이 못 된다. 등대 주위의 바위 절벽, 그 속의 오래된 고목 한 그루에서도 대를 이어 온 등대지기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또한 등대가 살아온 세월의 품격이 아닐까.

디지털화된 항법 장치로 등대의 사용 가치가 옛날보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의 바다에는 등대의 인도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특히 부산은 바다를 낀 해양 도시이자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배들의 기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들의 안전한 운항을 위해 부산 앞바다에는 영도 등대와 가덕도 등대, 오륙도 등대 등 3개의 유인 등대가 운용되고 있으며, 사람이 없이 독자적인 자동 설비에 의해 운용되는 무인 등대도 수십 개가 있다. 이러한 등대를 찾아가는 길, 우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설레고, 또 백 년을 묵묵히 자리 지켜 온 등대의 거룩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한적한 포구였던 인천 제물포항에 우리나라 최초로 석유 불을 이용한 하얀 등대가 솟아올라 칠흑 같은 밤바다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등대의 역사는 고요한 바다처럼 계속되고 있고, 등대를 찾는 우리들 또한 그 역사의 파도 위에 서 있다.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탄생한 등대
우리의 등대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 앞바다에서 일본 상선이 빈발한 해상 사고를 일으키자,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게 연안 등대 건설의 설비에 따른 측량 조사 등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등대 설치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895년(고종 32) 일본의 등대 전문가들이 한국의 전 연안을 측량 조사하였고, 이들이 실시한 측량 조사를 바탕으로 등대의 종류와 등대를 건설할 위치, 설계를 위한 조건들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1901년(고종 38)에 항로 표지의 위치를 확정하여 서울과 가까운 인천 항로에 5기, 서해안과 남해안 항로에 9기, 부산항에 3기, 목포항에 1기, 마산항에 3기, 동해안 항로에 2기, 성진 항로에 1기, 대동강 항로에 4기 등 모두 30여 기의 등대를 건립하였다. 즉 우리나라 등대의 시작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등대 건설이었고, 이는 곧 일본의 불빛이 한국으로 뻗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이어 1902년(고종 39) 인천에 해관 등대국이 설치되었고, 비로소 우리나라의 등대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후 등대 업무는 세관 공사 등대국-등대국-항로 표지 관리소로 이어지게 된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불을 밝혀 주다
부산항을 상징하는 명물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부산 사람들은 오륙도를 제일 먼저 말할 것이다. 오륙도는 우삭도[방패섬 또는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밭섬[일명 등대섬]의 다섯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우삭도가 밀물에는 하나로 되었다가 썰물에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오륙도로 불리게 된 것이다.

선착장 바로 앞에 서 있는 방패섬은 글자 그대로 방패 같은 바람막이를 해 준다는 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으며, 송곳섬은 송곳같이 뾰족해서 멀리서 보면 제일 높게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오륙도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인 굴섬은 섬에 커다란 굴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으며, 밭섬은 제일 평탄한 섬이자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그래서 밭섬에 등대가 축조되었고, 사람들은 이후 이곳을 등대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낭떠러지 위에 하얀 창을 만들다
밭섬에 등대가 축조된 때는 1937년 11월이다. 1876년(고종 13) 부산항이 개항되고, 부산의 북쪽 관문인 오륙도 앞으로 배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등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부산항을 드나드는 모든 선박은 반드시 오륙도 등대를 지나쳐야 했기 때문에 등대는 축조되자마자 부산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의 등대는 1998년에 재탄생한 것이다. 오륙도라고 하는 바위섬에 등대를 축조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로 등대는 위태롭게 서 있다. 위태롭기 때문에 더 예술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등대로 오르는 난간은 급격한 경사면의 벼랑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또한 등에 한줄기 땀이 흐를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을 자아낸다.

오륙도 등대에 오르면 멀리 한국해양대학교가 보이고 영도 등대와 주전자 바위도 보인다.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가는 페리를 타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해질녘에 반짝이는 영도 등대와 오륙도 등대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가를. 밭섬은 오롯이 등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 듯하다.

오륙도 등대는 여타의 등대와는 달리 삼교대가 아니라 2교대로 운영된다. 즉 총 네 명이 근무하는데, 2인 1조로 3박 4일씩 교대 근무를 한다. 예전에는 한 번 들어가면 6일씩 근무하고 뭍으로 나가 며칠 쉰 다음 다시 들어오는 식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풍랑에 따라 며칠씩 더 등대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육지와 이어진 다른 등대보다는 훨씬 힘이 드는 곳일 터이다.
처음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가덕도 등대
부산에 있는 등대들이 모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 등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운 면이 있다면, 가덕도 등대는 백여 년의 역사를 두 눈으로 오롯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당시의 등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가덕도 등대에 가려면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지금은 거가 대교가 생김으로써 도로가 많이 정비되어 육로로도 갈 수 있지만, 뱃길이 훨씬 더 운치가 있고 등대로 찾아간다는 설렘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일단 뱃길을 이용하면 외양포에서 내려 산길을 30여 분 걸어야 한다. 조금은 수고스러울 것 같은 산책길이지만, 바다를 옆에 끼고 거닐 수 있기 때문에 그 수고스러움도 감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가덕도 등대는 방문하기 최소 일주일 전에 부산지방해양항만청 해양교통시설과에서 방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등대가 해군 군사 보호 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등대가 먼저 있었지만, 해군이 초소를 설치하면서 등대로 접근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일단 해군 초소에서 두 번의 신분 확인 과정을 거쳐 등대를 향해 걸어가면 눈부시게 파란 수평선과 하얀 등탑이 눈앞에 다가온다. 가덕도 앞바다의 아름다운 물결과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등표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거친 바다를 수놓고 있다.
처음 등탑에 불이 켜진 1909년 12월
가덕도 등대가 위치한 외양포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령부를 최초로 주둔시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본군은 여기에 군 막사와 화약고, 무기고를 두고 화약고 주변에 네 개의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를 구축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때 설치한 일본군들의 막사와 화약고, 포대의 흔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중요한 요충지에 가덕도 등대가 세워진 것은 아마 필연적이었으리라. 가덕도 등대는 섬의 동쪽 국수봉 자락 동두말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천애의 절벽 위에 세운 것인 만큼 천하의 절경이 펼쳐져 있고, 시야 확보가 말끔하여 오가는 배들이 쉽게 눈에 띤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가덕도 등대는 국권 피탈을 8개월 앞둔 1909년(순종 3) 12월에 첫 불을 밝히게 된다.
백 년의 건물이 풍기는 시간의 향기
가덕도 등대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옛 등대를 중심으로 새 등대와 직원 숙소, 등대 체험 숙소 등 세 개의 건물군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옛 등대는 1909년 12월에 첫 불을 밝힌 이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팔각 백색 콘크리트 건물로, 작지만 단아하고 기품 있는 고딕 형상을 띤 서구식으로 건설되어 있다. 그래서 서양 고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보수라고는 외벽을 흰색으로 칠한 것일 뿐, 백여 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래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지만 그 위에 흰색을 칠했다고 한다. 특색이라고 한다면 일본식 건물의 현관에서 흔히 보이듯 돌출되어 있는 현관이다.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밀치면 공간 좌우에 회의실과 직원 숙소로 쓰던 방 두 칸이 있고, 뒤꼍에 자그마한 부엌이 있다. 가덕도 등대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등대는 거의 없는 상태이다.

1978년 현재의 등대장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등대원 관사 및 체험 숙소가 있는 신축 건물 터에는 함석지붕으로 된 일제 강점기의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에 이를 없애고 슬레이트 건물로 지었다가 다시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유리창 건물로 재건축했다고 한다. 현재 사무실이 딸려 있는 새 등탑은 2002년 7월에 신항만을 건설하면서 함께 완공되었다. 옛 등대의 높이가 너무 낮아서 멀리서는 잘 보이질 않아 신항 개장을 앞두고 새 등대를 개장하였다고 한다. 높게 솟은 등탑에 오르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많은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날 모든 등대들이 그러했겠지만, 가덕도 등대 또한 육지와 떨어져 있는 외딴 섬에 있었기 때문에 등대원들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었다. 예전에 기름으로 불을 밝혔을 때는, 등대에 쓸 기름이 선창에 도착하면 등대원들이 연일 지게로 기름통을 산꼭대기까지 져 날라야 했다. 기름 운반도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었으니 그네들의 삶을 어찌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등의 낭만적 수사 어구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유조차를 배에 싣고 와서 등대까지 유조차가 달려와 기름을 붓고 돌아가는 방식으로, 예전에 비하면 많이 편리해졌다.

2010년에는 가덕도 등대 100주년 기념관도 새로 만들어졌다. 체험실과 세미나실, 자료실 등을 꾸며서 등대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사람은 등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여름 한 철에는 2박 3일 여름 등대 해양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1박 2일 등대 체험도 가능하다. 가덕도 등대의 근무자는 3명, 한 사람이 6박 7일 일하고 3박 4일 쉰다.
다누비를 타고 등대 찾아 떠나는 길
영도 등대는 1906년(고종 43) 12월 1일, 부산의 유인 등대로는 최초로 점등을 하여 백여 년 동안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 왔다. 건축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대 건축에 콘크리트를 사용한 효시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영도를 ‘목도(牧島)’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여 목도 등대로 부르다가 1948년에 절영도 등대로 개칭하였고, 이후 1974년 12월 31일에 영도 등대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절영도’라는 말은, 영도에서 군사 훈련용 말을 길렀는데 영도에서 기른 말들은 빠르기가 비호같아서 순식간에 말 그림자가 보이질 않는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처음 설립될 당시 영도 등대는 한갓 바다만 밝히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등대는 전신소의 기능도 겸하고 있었고, 영도 등대는 부산으로 오가는 전신을 취급하는 전략적인 중추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영도 등대는 전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태종대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또는 닿을 수 없는 곳,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뛰어난 풍광으로 365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은 일반인들이 가장 찾아가기 쉬운 등대이기도 하다.

일단 영도 등대를 찾아가려면 태종대 공원 입구에서 승용차나 버스에서 내려 3분가량 걸어 들어가면 보이는 ‘다누비’라고 하는 무궤도 차를 타야 한다. 예전에는 태종대 안에 차들이 마음대로 다녔지만, 환경 오염 등의 문제와 점점 늘어나는 관광객들의 안전사고 등을 고려하여 다누비로 대체하였다. 날씨가 좋으면 태종대 입구에서 등대까지 걸어가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다누비가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걸어가야만 하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좋은 사람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등대 입구에 내리면 바로 앞에 나무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을 따라 바닷가 절벽 쪽으로 1분가량 내려가면 하얀 등대가 저 멀리서 반짝이고 있고, 바로 앞에는 빨강, 파랑색이 선명한 아치형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조형물은 영도 등대 100주년 기념탑이다. 그 오른쪽에는 SEE&SEA 갤러리가 위치하고 있는데, 영도 등대를 방문하는 시민들과 방문객들을 위해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 작품들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교체되고 연중무휴로 전시가 진행되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을 언제든지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미술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전시회를 보는 일은 정말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다.

갤러리에서 좀 더 내려와서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옆으로 난 길을 가면 태종대 신선 바위를 걸을 수 있고, 왼쪽 계단 위로 가면 직접 등대를 만나 볼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영도 등대의 오르내리는 층계는 모두 나무판으로, 안전하고 편하게 다듬어 놓았다. 등대 안에는 간단한 세미나를 할 수 있는 시설과 도서관, 자료실 등이 구비되어 있다. 영도 등대가 전국에서 최초로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재탄생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대중들에게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다. 4월에서 10월까지 매달 넷째 주 토요일 오후 두 시에는 음악회도 열린다고 하니, 한번쯤 영도 등대를 찾아 한여름밤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영도 등대는 등탑 전망대로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등탑으로 올라가는 벽면에는 등탑 내부 변천 과정을 패널로 전시해 놓아 영도 등대의 변천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영도 등대에서 만난 기분 좋은 사람들
원래 등대원들의 인터뷰를 하려면 부산지방해양항만청 해양교통시설과에서 먼저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절차를 몰랐던 나는 접근성이 쉬운 영도 등대이기에 날씨가 좋은 날 나들이 삼아 친구와 함께 등대로 향했다. 우리들이 흔히 외롭고 쓸쓸하며 고독한 직업이라고 여기는 등대지기들이 과연 그러한지 호기심이 먼저 발동했기 때문이다. 등대로 가는 길, 다누비 티켓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날씨가 무척 청명하여 태종대 오솔길을 친구와 함께 걸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해안 산책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멀리서 모자상(母子像)과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일단 전망대에서 한숨을 돌린 우리는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서 등대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을 발견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단숨에 등대로 내려가니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장관이다. 태종대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릴 적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와 본 기억밖에 없는 나에게 새삼 놀라움을 안겨 주는 경관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 도도히 서 있는 등탑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SEE&SEA 갤러리에서 한숨을 돌린 우리는 곧장 등대 사무실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간 우리들이지만 사무실 분들은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이날은 안타깝게도 인터뷰를 담당하는 소장님이 휴일이라 인터뷰는 진행하지 못했고, 우리들의 목적만 알릴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등대지기.’ 이 주제를 들은 등대원들은 하나같이 ‘우린 외롭지 않습니다, 일이 많아 바빠 죽겠는데 외로울 틈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껄껄 웃는다. 공무원들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행정 처리도 많고, 태종대 공원 내에 있는 관계로 시설물 점검이라든지 민원 처리라든지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럼 제목부터 먼저 수정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외롭겠거니 고독하겠거니 하는 생각만 가지고 갔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첫날은 이렇게 인사만 하고 헤어지고 이튿날 다시 등대를 찾았다. 그날은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등대지기란 말은 이제 쓰지 말자
우리는 등대라고 하면 제일 먼저 고독함, 외로움, 쓸쓸함 등을 당연한 듯이 떠올린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등대지기라고 낮춰 부른다. 외로운 등대지기는 자연스레 서글픈 음률의 노래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생활은 항상 외롭고 고독하기만 한 걸까. 등대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등대지기라는 말을 싫어한다. 이튿날 비 내리는 태종대를 찾은 우리들은 영도 등대 배영식 소장님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소장님 또한 그 전날 등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외롭고 고독하다는 표현에 대해 지적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등대지기라는 명칭에 대해 섭섭함을 늘어놓는다.

“등대지기라고 하는 것은 놀림의 대상이 아닙니까. 우리도 엄연히 직업인이고 공무원인데. 지금은 항로 표지 관리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원래 등대지기라는 명칭이 맞기는 맞아요. 그런데 이 명칭을 안 쓴 지 25년 정도 되는데……. 등대지기라는 말 자체는 없어져야 합니다. 정부에서 쓰라는 명칭을 써야지, 쓰면 안 되지요.”

항로 표지 관리원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고 그 명칭에 따라 공무원으로서 엄연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들인데, 왜 우리는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등대지기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우리는 일상에서 등대를 낭만적 대상으로 치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등대지기라는 이름으로 대상화한다. 최소한 우리들 인식 속에 이 등대지기라는 단어는 고단한 삶, 외로움, 소외감 등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들은 등대에서의 생활은 「등대지기」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그리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인터뷰를 곤란해 했다. 힘들고 바쁜 일상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바다가 좋아서 시작한 일
소장님은 원래 경남 통영 출신이다. 항상 바다를 끼고 생활하다 보니 각박한 시내에 있는 것보다 바다를 보고 있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등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등대와의 인연이 벌써 22년. 1991년에 발령받은 첫 근무지는 통영 홍도였다. 사실 지금은 복지가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체계가 잘 잡혀 있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전기라든지 수도라든지 모든 시설이 열악했어요. 한 달 근무하고 한 달 뭍에 나와도 집에서 안 놀고 사무실에 출근해야 하고. 원래 24시간 근무하면 24시간 쉬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체계가 안 되어 있었거든요. 요즘은 교통은 물론이거니와 시스템도 많이 좋아진 셈이죠.”

이후 소장님은 경남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2005년에 부산으로 전근 왔다. 그리고 2011년에 영도 등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공무원이기에 2년에 한 번씩 옮겨 다녀야 한단다.
힘겨웠으나 추억이 많은 경남 홍도에서의 근무
홍도에서 근무할 때는 일도 익숙하지 않았고 여건도 썩 좋지 않아 많이 힘들었는데, 2005년 부산으로 전근 오고부터는 그리 힘든 일은 없었다. 홍도에서 근무할 때는 태풍이 오면 관광객, 낚시꾼들을 등대원들 숙소에 머물게도 했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유난히 홍도에서는 해난 사고가 많았다.

“떠내려가는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수영은 잘 못하지만 바다에 뛰어들어서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영도에 와서는 그런 일도 없었고, 나이가 들어서 뭐……. 하하하. 그때는 젊었으니까 정식으로 수영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간첩선[소장님은 간첩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을 목격한 일이다. 옛날에는 수상한 배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큰 배들 옆에 조그마하게 붙어 오는 배들이 있는데, 이런 배들은 밀수선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날 밤은 좀 달랐다.

“깜깜한 밤이었지요. 그날 저녁에 여덟 시쯤 돼서 낚시를 하러 나갔는데 고기가 잘 안 잡히더라고요. 그런데 뭔가 바닷속이 이상해서 보니까 쪼매난 부리가 있는 거라. 아차, 반잠수정이구나. 뭔가 이상하잖아? 이게 바닷가에 보이더니 바로 빠져나가더라구요. 그래서 간첩 신고를 했지요. 그런데 그쪽에서 좀 있어 보라고 하데. 그래서 기다렸지. 그랬더니 별 말이 없더라고. 분명 간첩선 같았는데.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다른 낚시꾼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도 반잠수정 같은 것을 봤다고 하더라고. 알고 보니까 그날 내가 본 것하고 같은 것이었지요.”

이렇듯 처음 근무지였던 경남 홍도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 영도에서는 큰 해난 사고가 없었다. 파도가 많이 치거나 태풍이 불 때에는 아예 사람들이 등대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그랬고, 태풍이 불면 항상 비상근무를 하면서 바다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명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도 등대에서는 고독할 틈이 없다
영도 등대는 태종대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1년 365일 관광객들이 들끓는 곳이다. 그런 만큼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아 다른 등대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주간에 두 명, 야간에 한 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항상 일손이 모자라다. 일상적인 등대 업무가 만만치 않게 많지만, 요즘은 대부분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해 꼼꼼하게 시스템 점검만 해 주면 별 문제가 없다.

“업무는 저녁에 주로 등대 점검[등대 모터, 전구 교환 등]을 하는데, 18초에 3섬광을 맞춰야 합니다. 등대마다 광파 표지가 다르거든요. 우리는 18초이지만 오륙도는 10초, 가덕도는 12초에 1섬광으로 다 다릅니다. 이 주기를 맞춰야 하니까 이것을 점검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요. 이게 등대 본연의 임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장마철이나 안개가 끼는 날엔 불빛이 안 보이니까 음파를 내보내는데 그것도 점검하고, 건물 시설 쪽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도 하고. 또 중요한 일은 해수 온도나 염분을 측정해서 기상청에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걸 하루에 다섯 번씩 하거든요. 이 정도가 일상 업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민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지키고 민원을 해결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할 터이다.

“여기는 외부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시설물 점검이 중요하지요. 목재 난간도 오래된 것이 있으면 점검하고, 피스도 고정시키고. 화장실 청소, 등대 내·외부 청소 등등. 시설물이 크니까 꼼꼼하게 점검하는 일이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특히 요즘 제일 힘든 것은 민원이 생기면 인터넷에 바로 올리는 일이에요. 인터넷에 올리면 회사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다 보잖아요. 우리들한테 바로바로 말씀하시면 즉각 처리가 되는데, 인터넷에 올려 버리면 참…….

예를 들어 화장실이 왜 이렇게 더러운 것이냐, 책 보는 사람도 없는데 도서실은 왜 있는 것이냐부터 별별 민원이 다 들어옵니다. 요즘은 등대 업무보다 이 업무가 더 많습니다. 몇 명 안 되는데 이 민원 처리하다 보면 너무 힘이 드는 거지요. 여기는 바닷가에 있으니까 염분에 의해서 철골 구조물에 녹이 잘 습니다. 닦아도 염분 때문에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녹이 슨 데 기댔다가 옷을 버렸다고 하면서 물어내라고 하는 관광객도 있고. 허허허.”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별난 사람들도 많다는 소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 외롭고 고독한 등대지기들의 낭만적 일상을 스케치하려고 했던 나의 생각들이, 수많은 일들을 묵묵히 처리하는 이들의 일상을 들으며 점점 미안해져 갔다.

“여기 영도 등대는 사람이 많을 때는 밀려 올라가고 밀려 내려오고 하잖아요. 특히 우리나라 등대 중에 해양 문화 공간으로 지정된 곳이 여덟 군데 있는데, 영도가 제일 먼저 지정됐거든요. 항로지도협회라는 곳에서 해양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서관도 있고 갤러리도 있고 세미나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등대 중에서 영도 등대가 제일 바쁠 걸요.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 신경이 제일 많이 쓰이는 곳이지요.”
어둠과의 조우, 고독의 시작
낮에는 관광객들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지만, 밤에는 혼자 있기 때문에 고독할 때가 있다. 그래도 영도 등대에서는 자주 집에 갈 수 있어 견딜 만한데 오륙도 같은 곳은 섬이니까 많이 고독할 거라고 한다. 날씨가 안 좋을 때는 한 달이나 가까이 등대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자동화 시스템이 잘되어 있고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또한 견딜 만하다고.

하지만 관광객들도 모두 돌아간 깜깜한 밤, 시스템 점검 등의 일상 업무를 끝내고 나면 스멀스멀 밀려오는 고독감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소장님은 명상을 주로 한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어둑어둑한 새벽하늘에서 붉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는 명상은 정말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해가 뜰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하다 보면 고독, 외로움 등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릴 것이다.

밤에 혼자 있으면 고독과 외로움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무섭지 않을까. 오랜 등대 생활이 몸에 밴 소장님은 무서울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한다. 무서운 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한다. 귀신 봤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그런 것들은 다 옛날 자살 바위가 있었던 태종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생겨난 일이지 실제 귀신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말도 보탠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찔했던 순간
영도 등대는 해난 사고는 별로 없지만 가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이 찾아와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때는 2005년 12월 24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고 있던 밤이었다. 그날 밤엔 비가 와서 관광객이 없었고, 영도 등대에는 등대원 한 명만이 있었다. 밤 10시가 좀 넘었을까. 갑자기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보니 한 여자가 피투성이가 돼서 서 있는 것이었다. 등대원을 본 여자는 너무 아프다고 울고만 있고, 놀란 등대원은 일단 안으로 여자를 들여서 상처를 치료하고 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혼자 대구에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고,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계획적인 자살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고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래서 신선 바위 있는 데서 바다로 뛰어내렸는데, 중간에 다른 바위에 부딪혀서 살았다. 죽으려고 했지만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너무 아파서 정신에 번쩍 들었고, 순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바위를 기어 올라와 등대 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냘픈 주먹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등대원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돌을 가져와 유리창을 깼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소장님이 직접 겪은 사건인데, 한 2년 전쯤의 일이라고 한다. 그날도 비가 와서 관광객이 등대로 내려오지 않은 날이었다. 비도 오고 관광객도 없고 해서 그는 사무실에서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난간에 기대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확인 차 조용히 밖으로 나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신발을 곱게 벗어 놓고 난간으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소장님은 조심조심 눈치 채지 않게 다가가서 뛰어들려는 사람의 허리를 잡아 확 낚아채서 꼭 안았다. 그 남자는 사업에 실패하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예전 태종대에 자살 바위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렸지만 최근에는 그 자리에 전망대가 들어서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진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삶의 안식과 희망을 얻을 수 있도록 모자상이 만들어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작년 말, 올해 초에 태종대에서만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녹녹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한 번씩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사람들을 보면 예의 주시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날카로운 바위 끝에 서 있는 등대원으로서의 본능이 아닐까.
보람찬 일들이 가득한 일상
요즘에는 배에 항법 시스템에 잘 갖춰져 있어서 배들이 등대의 혜택을 잘 못 느끼지만, 옛날에는 등대 불빛을 보고 선박을 운행하고 날씨가 좋지 않고 안개가 많이 끼었을 때는 등대에서 내는 소리 음파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래서 옛날에는 등대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지금도 등대는 암초를 표시해 주고 있으며, 등부표 등을 띄워서 배가 들어올 적에 항로를 표시해 주기도 한다. 소장님은 그런 등대의 역할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

“우리나라 등대가 바닷가 쪽 위치가 가장 좋은 데 있거든요. 경관이 뛰어난 곳, 식별하기 좋은 곳. 어느 배든지 식별하기 쉽게끔 한 것이지요. 사실 등대는 국민 누구나 찾아와서 볼 수 있고,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시설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등대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교통의 불편으로 일반인들이 잘 찾을 수 없었고, 혹은 군사·행정상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다. 그러나 등대에로의 접근이 훨씬 쉬워진 오늘날, 등대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시원한 경치를 보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아울러 등대의 소중함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등대를 찾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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