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막걸리의 유래, 산성 누룩의 역사,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언제부터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를 담그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기 어렵다. 다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선 시대인 1703년(숙종 29)에 동래의 금정산성을 개축하였는데, 이때 인근 각지에서 동원된 인부들에게 금정산성 마을의 주민들이 새참으로 금정산성 막걸리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금정산성은 둘레가 1만 7,336m에 이르러,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다. 따라서 당시 동원된 인부의 규모도 상당하였을 터인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금정산성 막걸리의 남다른 풍미를 잊지 못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정산성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산성에서 만든 누룩이다. 산성 누룩의 인기는 인근 지역의 쌀값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멀리 일본과 만주까지 수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금정산성 막걸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누룩은 모두 유청길 사장의 모친인 전남선[83세] 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다. 전남선씨는 경상남도 양산의 물금에서 태어나 6·25 전쟁이 나던 1950년에 이곳 금정산성 마을에 대대로 거주하는 강릉 유씨 유봉갑에게 시집을 왔다. 이때 금정산성 마을에는 유청길 사장의 증조부 유도관의 여동생인 유도순이 술도가[양조장]를 경영하면서 금정산성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었다. 전남선씨에게는 시고모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이 술도가는 당시 금정산성 마을에서 유일한 양조장이었다. 유청길 사장은 유도순 할머니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증고모할머니의 술도가 자리가] 제2 공장 자립니다. 제가 그곳을 사게 된 이유가 옛날에 우리 증고모할머니가 거기서 술도가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일제 시기부터 하였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1960년대 초까지 하였으니까 산성 분들,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알아요. 그 할머니를 ‘공장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옛날에는 술도가를 공장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한테는 ‘공장 할매’라고 불렸지요. 술도가는 그것 하나뿐이었어요.”
현재 금정산성토산주는 지금 공장의 3~4배 규모에 달하는 제2 공장을 신축 중인데, 제2 공장의 부지가 바로 유도순이 술도가를 한 자리였다. 이는 금정산성 막걸리에 대한 금정산성토산주의 계승 의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특히 유도순의 증손인 유청길 사장은 이러한 계승의 적임자인 셈이다. 유도순은 1960년대 초까지 술도가를 경영하다가 폐업하였는데, 이 무렵은 쌀로 막걸리를 담그는 것이 금지되면서 막걸리의 인기가 떨어진 시기이다. 그러나 양조장은 문을 닫았지만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누룩 빚기는 계속되었다. 금정산성 마을 주민에게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남선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거 안 하면 죽는 판이라. 여기 뭐 농사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누룩 이거 디디가지고[딛어서] 시내에 갖다가 팔고, 이래 하는데, 동래에도 가고, 구포도 가고, 부산[중구, 동구 등 원도심]도 가고, 천지로 댕깄지[다녔지]. 마산이고 어데고, 경상남도 어데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믄 어데든지 갔어요. 산성 누룩이 인기가 있었거든. 산성 누룩이라 하믄 알아주었어요. 우리 누룩이 좋아서. 산성 기[누룩으로 술을 담그면] 틀림없이 술이 좋고. 그때는 누룩 파는 사람이 있어도 우리 누룩한테 못 대고[상대가 안 되었다].”
금정산성 마을은 해발 800m가 넘는 금정산의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다. 금정산에는 최고봉인 고당봉을 비롯하여 계명봉·상계봉·원효봉·장군봉·파리봉·의상봉 등 높이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이런 가운데 금정산성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금정구 금성동은 해발 400m의 고지대이다. 이 때문에 논농사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통적 산업 구조 아래서는 마땅한 생계 수단이 없는 곳이었다. 이에 누룩 빚기는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