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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금정산의 보배, 금정산성 막걸리
서민의 술, 막걸리 열풍을 타고 부활하다
막 걸러서 만든다고 이름조차 막걸리가 된 술. 전통주 가운데 가장 서민적인 술 막걸리는 농가에서 만들어 농주(農酒)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탁한 색깔 때문에 탁주(濁酒)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하였다. 청주와 같은 고급술에 비하여 맛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영양이 풍부한 탓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술이었다.

그러나 주식이던 쌀이 부족하던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쌀을 원료로 하는 술의 제조를 금지하였다. 이후 보리, 밀 등을 원료로 쓴 막걸리는 맛과 품질이 떨어지면서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고, 이윽고 막걸리는 잊혀진 술이 되었다. 그 결과 서민층은 소주로, 중산층 이상은 맥주와 양주로 기울어졌다. 쌀 생산량이 늘면서 1977년 쌀 막걸리 제조가 다시 허용되었지만, 막걸리 시장은 이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데 5년여 전부터 막걸리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막걸리는 지역을 대표하는 토산주로 주류 시장에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런 가운데 막걸리 중 유일하게 향토 민속주로 지정된 금정산성(金井山城) 막걸리가 부산을 대표하는 막걸리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부산의 유일한 산성인 금정산성 안에 있는 금정산성 마을의 막걸리로서, 누룩을 사용한 전통적 양조 방식을 따르는 자연 발효주로 유명하다. 현재는 1980년 마을 주민들이 설립한 유한 회사 ‘금정산성토산주’에서 ‘금정산성 막걸리’라는 이름으로 생산·공급하고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 방식의 막걸리
금정산성토산주의 대표인 유청길 사장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막걸리의 99.9%는 일본식 입국(入麴) 방식으로 만든 막걸리이며, 금정산성 막걸리는 전통 방식을 따르는 몇 안 되는 막걸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누룩을 사용하는 전통 양조 방식과 일본식 입국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유청길 사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통 방식이란 단사입이죠. 우리 조상들이 한 방식은 고두밥을 쪄서 누룩하고 섞어 버무려 가지고, 그걸 바로 독에 넣어서 물과 함께 발효를 시키는 겁니다. 이걸 단사입이라 합니다. 근데 일본식 입국은 뭐냐면, 찐 고두밥 위에 누룩곰팡이 균을 뿌려요. 가와치 균이라고 하는데, 백국 균(白麴菌)이에요. 흰 누룩곰팡이 균이에요. 그걸 뿌리면 이 균이 고두밥에 붙어서 하얗게 변합니다. 이걸 [다량의] 고두밥에 버무려 섞어요. 이걸 독에 넣어서 물을 붓고 막걸리를 만드는 게 일본식이죠. 결국 우리처럼 재래식 누룩을 안 쓰는 거죠. 누룩 균의 가루를 쓰는 거죠.”

입국이란 고두밥에 누룩곰팡이 균을 붙여 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누룩을 쓰지 않고 막걸리를 담그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까다로운 누룩 빚기를 생략할 수 있고, 속성으로 막걸리를 제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막걸리 제조업체가 일본식 입국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금정산성 막걸리는 누룩으로 발효시키는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이 때문에 금정산성 막걸리에서는 누룩 특유의 깊고 묵직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의 유래, 산성 누룩의 역사,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언제부터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를 담그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기 어렵다. 다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선 시대인 1703년(숙종 29)에 동래의 금정산성을 개축하였는데, 이때 인근 각지에서 동원된 인부들에게 금정산성 마을의 주민들이 새참으로 금정산성 막걸리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금정산성은 둘레가 1만 7,336m에 이르러,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다. 따라서 당시 동원된 인부의 규모도 상당하였을 터인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금정산성 막걸리의 남다른 풍미를 잊지 못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정산성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산성에서 만든 누룩이다. 산성 누룩의 인기는 인근 지역의 쌀값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멀리 일본과 만주까지 수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금정산성 막걸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누룩은 모두 유청길 사장의 모친인 전남선[83세] 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다. 전남선씨는 경상남도 양산의 물금에서 태어나 6·25 전쟁이 나던 1950년에 이곳 금정산성 마을에 대대로 거주하는 강릉 유씨 유봉갑에게 시집을 왔다. 이때 금정산성 마을에는 유청길 사장의 증조부 유도관의 여동생인 유도순이 술도가[양조장]를 경영하면서 금정산성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었다. 전남선씨에게는 시고모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이 술도가는 당시 금정산성 마을에서 유일한 양조장이었다. 유청길 사장은 유도순 할머니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증고모할머니의 술도가 자리가] 제2 공장 자립니다. 제가 그곳을 사게 된 이유가 옛날에 우리 증고모할머니가 거기서 술도가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일제 시기부터 하였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1960년대 초까지 하였으니까 산성 분들,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알아요. 그 할머니를 ‘공장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옛날에는 술도가를 공장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한테는 ‘공장 할매’라고 불렸지요. 술도가는 그것 하나뿐이었어요.”

현재 금정산성토산주는 지금 공장의 3~4배 규모에 달하는 제2 공장을 신축 중인데, 제2 공장의 부지가 바로 유도순이 술도가를 한 자리였다. 이는 금정산성 막걸리에 대한 금정산성토산주의 계승 의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특히 유도순의 증손인 유청길 사장은 이러한 계승의 적임자인 셈이다. 유도순은 1960년대 초까지 술도가를 경영하다가 폐업하였는데, 이 무렵은 쌀로 막걸리를 담그는 것이 금지되면서 막걸리의 인기가 떨어진 시기이다. 그러나 양조장은 문을 닫았지만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누룩 빚기는 계속되었다. 금정산성 마을 주민에게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남선씨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거 안 하면 죽는 판이라. 여기 뭐 농사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누룩 이거 디디가지고[딛어서] 시내에 갖다가 팔고, 이래 하는데, 동래에도 가고, 구포도 가고, 부산[중구, 동구 등 원도심]도 가고, 천지로 댕깄지[다녔지]. 마산이고 어데고, 경상남도 어데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믄 어데든지 갔어요. 산성 누룩이 인기가 있었거든. 산성 누룩이라 하믄 알아주었어요. 우리 누룩이 좋아서. 산성 기[누룩으로 술을 담그면] 틀림없이 술이 좋고. 그때는 누룩 파는 사람이 있어도 우리 누룩한테 못 대고[상대가 안 되었다].”

금정산성 마을은 해발 800m가 넘는 금정산의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다. 금정산에는 최고봉인 고당봉을 비롯하여 계명봉·상계봉·원효봉·장군봉·파리봉·의상봉 등 높이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이런 가운데 금정산성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금정구 금성동은 해발 400m의 고지대이다. 이 때문에 논농사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통적 산업 구조 아래서는 마땅한 생계 수단이 없는 곳이었다. 이에 누룩 빚기는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것이다.
누룩 빚기는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하였나
유청길 사장의 모친인 전남선씨 역시 금정산성 마을로 시집온 뒤 시고모할머니인 유도순씨에게서 누룩 빚는 법을 배웠다. 당시 금정산성 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집에서 누룩을 빚었지만, 지금까지 누룩을 빚고 있는 것은 전남선씨뿐이다. 전남선씨는 올해로 63년째 누룩을 빚고 있다.

“얼마 전에 인천서 사람이 배우러 왔다. 우리 집에서 근(近) 한 달 동안 자기까지 하면서. 그렇지만 그게 잠깐 옆에서 배운다고 되는 기[것이] 아니다. 결국 두 손 들고 돌아갔다. 그러고 여기서 누룩을 사 간다. 또 한 번은 누룩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일본에서도 왔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보고 일본으로 가자고 하였다. 뭐든, ‘해 달라는 거는 전부 해 주겠다’ 하면서. 그래서 내가 [자신의 가게를 가리키며] ‘저기 저런 집을 하나 지어 주면 가겠다’고 하였더니, 답이 없더라. 내가 안 갈라고 그런 말 하였지. 말라고[뭣 하려고] 내가 우리 기술을, 이것도 기술인데, 내가 일본까지 가서 가르쳐 줄 기고[것이냐].”

전남선씨에 따르면 누룩을 빚는 일은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몸에 밴, 고도의 감각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누룩 기술을 익히기에 한 달이란 기간은 ‘잠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고, 누룩 기술이 극소수에게 전승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전남선씨는 누룩 빚는 자신의 솜씨를 일종의 민족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전남선씨의 누룩 기술은 두 딸에게 전승되어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하는데, 어릴 적부터 옆에서 어머니의 누룩 빚기에 참여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룩을 빚는 기술은 가업으로 전승되기에 적절한 것이라 여겨진다.
누룩 만들기, 그 시작은 반죽
금정산성 막걸리를 만드는 첫 단계는 누룩을 빚는 것이다. 누룩 빚기는 밀을 갈아 가루를 내고 물과 섞어 반죽을 한 뒤, 누룩 보자기에 넣어 딛는 작업을 거쳐 누룩방에서 발효시키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럼 누룩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산성 누룩은 어째서 독특한지, 전남선씨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누룩이란 곡류에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것으로, 이때 곡류는 밀·보리·옥수수·쌀·콩·팥·귀리·호밀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된다. 금정산성 마을에서는 이 가운데 적맥이라 불리는 호밀만을 써서 누룩을 만든다.

“우리는 밀가루 가운데서도 적맥을 씁니다. 적맥은 점성이 낮고 고소하거든요. 호주산과 미국산이 있는데, 국적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을 씁니다. 잡티가 많이 나오거나 쭉정이가 나오면 사용을 안 하지요. 씹어 봤을 때 살이 없고 통통하지 않고 고소한 맛이 있는 것을 씁니다.”

전남선씨의 딸로, 누룩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고 있는 유미옥씨의 말이다. 현재 금정산성 마을에서 누룩을 빚는 일은 전남선씨의 감수 아래 유미옥·유영옥 두 딸이 관장하고 있다. 누룩을 만드는 첫 단계는 호밀 가루의 반죽이다.

“먼저 밀을 디라가지고[먼지를 털어서] 가는 데 넣는 기라. [간 밀가루를] 물하고 섞어 반죽을 하지. 옛날에는 반죽을 전부 발로 밟아서 했어. 지금도 발로 밟아 하는 사람도 있어. 우리는 기계로 반죽을 하지마는. 이때 반죽이 한 덩어리가 져야 되지.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우리는 물을 팔팔 끓여 가지고 네 통을 넣는데, 따뜻한 물 2통, 찬 물 2통 하는데, 요즘은 여름이 되다 보니까 따뜻한 물 1통 반, 찬 물 1통 반, 요래[요렇게]. 여름에는 밀이, 아무래도 물을 많이 안 먹어. 이게 하기 애럽아[어려워].”

반죽을 할 때 중요한 포인트는 물의 양과 냉·온수의 비율이다. 물의 양과 온도를 잘 맞추어 반죽의 밀도와 점성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를 조절하지 못할 경우 누룩의 모양이 유지되지 못하고 풀풀 날리며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의 양과 냉·온수의 비율은 건조한 겨울과 습한 여름이 다르고, 누룩 빚는 장소의 고도(高度)에 따라서도 다르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반죽에 들어가는 물의 양과 온도를 표준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금정산성 마을의 경우 산 아래 지역과의 연평균 기온차가 4~5도가량 되고 습도 또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현재 전남선씨가 구현하고 있는 산성 누룩의 반죽은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최적의 비율이라 할 수 있다.
누룩 딛기
이렇게 반죽된 것을 누룩 보자기에 넣어서 발로 딛어서 모양을 잡는다. 발로 밟아서 고르게 펴 주는 것을 ‘딛는다’고 표현하는데, 발로 밟은 쪽이 푹 패어 들어가지 않고 두께가 고르게 딛어야 한다. 이렇게 누룩을 딛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숙련이 필요하다. 현재 금정산성 마을에서 누룩을 딛고 있는 여성들은 얼른 보아도 70세가량 되어 보이는데, 이들 모두 ‘여남은 살 되는 어릴 적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누룩 딛기 경력이 50년을 훌쩍 넘는 ‘기술자’라는 이야기다.

이들 모두가 금정산성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인 것은 물론이다. 공장 한쪽에 누룩을 딛는 기계가 있긴 하지만, 누룩 딛기에 익숙지 못한 전남선씨의 딸들이 사용한다. 그래 봤자 기계의 속도는 기껏 이들 ‘기술자’의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도 ‘기술자’의 누룩 딛는 솜씨는 매우 날렵하니 속도감이 있고, 마치 기계에서 뽑아 낸 듯 모양도 균일하다.

딛기가 완료된 산성 누룩은 동글납작한 모양으로, 다른 지역의 누룩에 비하면 두께가 얇은 편이다. 그런데 테두리 부분이 약간 도톰해서 그 모양이 마치 피자와 비슷하다. 그런데 유청길 사장에 따르면 산성 누룩의 이런 형태는 단순한 모양의 문제가 아니라 누룩 띄우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리 누룩은 테두리가 두껍지요. 누룩이란 것이 물로 섞어서 반죽을 해서 만들기 때문에 두꺼운 테두리 부분은 습기를 오래 머무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습기가 있어야 곰팡이가 피는 거니까, 습기를 오래 머무르게 한다는 거는 [누룩의] 안까지 [곰팡이가] 골고루 피는 데 좋지요. 우리 조상들의 지혜죠. 그게 과학이에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즉 누룩의 테두리를 두껍게 딛는 것 역시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다. 산성 누룩의 크기는 지름이 30㎝를 조금 넘기는 정도이고, 두께는 너무 두껍지도 않고 너무 얇지도 않다. 이렇게 누룩 딛기를 일주일이면 세 번 한다고 한다.
누룩 띄우기
딛기가 끝난 누룩은 누룩방으로 옮겨진다. 지방에 따라 온돌방에 쌓아 두거나 매달아 놓고 발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금정산성 마을에서는 선반 위에서 누룩을 발효시킨다. 좁고 길게 생긴 누룩방은 중간의 좁은 통로 양편으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빼곡하게 선반이 들어차 있다. 이 선반에는 누룩곰팡이를 옮겨 놓은 나무 발이 깔려 있다. 이 나무 발 위에 누룩을 얹어 발효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누룩 빚기의 핵심 공정이고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다.

“[앞서 말한] 인천에서 온 그 사람은 동그랗게 딛지를 못해서 네모잽이로[네모 모양으로] 해서 하였는데, 딛는 요거는 네모잽이로 해도 되거든. 근데 누룩방에 넣어 띄우기만 하면 되는데, 띄우지를 못해! 띄우는 기술이 있어야 되거든. 내가 와 이리 [직접 하는 일도 없이 나와 앉아] 있나 하믄, 조시[때, 상황] 맞추느라고 [앉아 있다]. 후꾼하게 해도 우짜믄 익하 뿌거든[누룩방의 온도를 후끈하게 해야 하지만, 어쩌다 보면 익혀 버리거든]. 익하 뿌믄[익혀 버리면] 누룩이 술이 안 되거든. 약한 불에 해야 되지만, 너무 약한 불에 하면 누룩이 발효가 안 되고 빼짝[바짝] 말라 삐거든[말라 버리거든]. 그러니 [누룩] 띄우기가 쉽지 않지.”

발효, 즉 누룩 띄우기의 핵심은 온도이다. 누룩을 띄우는 기간은 보름가량인데, 그 동안 누룩방의 온도는 48~50도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으로 약간 부주의해도 실패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누룩 빚기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많은 이들이 누룩 반죽과 딛는 것까지 숙련이 되고서도 결국 발효의 감각을 익히지 못하여 포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간혹 누룩방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름철에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철에는 누룩방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 때문에 방문을 열어 두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한다.

“누룩을 방에 딱 넣어 놓고 조시 맞출 적에 사람들이 와 가지고 보자 할 때가 있거든. 그럴 적에는 겨울에는 퍼특[얼른] 닫아야 돼, 문을. 그래서 겨울에 [구경을] 오면 더 곤란해요. 요새는 [여름이라] 좀 봐도 날이 [따뜻하니까] 괜찮은데, 겨울 같은 때는 와서 보자 하면, 문을 좀 오래 열어 놓으면 우리가 겁이 나.”

누룩 띄우기에 어떤 비법이 있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전남선씨는 간단하게 답한다. “없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잘 띄우는 것 뿐. 근데 그게 어렵어[어려워]. 여름에는 문도 가끔 열어야 돼. 조시 맞춰서. 그래야 누룩이 안 익는다. 익으면 안 되니까.” 공정이 간단할수록 그 작업은 더욱 감각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감각이란 오랜 기간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누룩 띄우기는 가업으로 계승되기에 적합한 기술이다.

현재 전남선씨의 두 딸은 어머니의 도움 없이 곧잘 누룩을 띄우는데, 그럼에도 전남선씨는 누룩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누룩 띄우기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누룩에 곰팡이가 피면 누룩방의 유일한 창문인 지름 10㎝ 정도의 공기창을 연다. 그리곤 누룩이 마른 다음 곰팡이를 제거한다. 이로써 누룩 빚기가 완성된 것이다.
산성 누룩에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는데
하지만 지금은 보물로 여겨지는 산성 누룩도 어려움을 겪은 시절이 있었다. 쌀 막걸리가 금지되면서 막걸리가 인기를 잃고 술도가도 문을 닫아야 하였던 때가 그 시기이다. 술도가를 폐업한 뒤에도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은 누룩을 빚어야 하였는데, 생계가 막막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성 누룩은 허가를 받지 않은 무허가 제조였고, 이 때문에 세무 공무원과 막걸리 제조업자들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전남선씨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치곤 한다.

“아이고, 그기사[그거야] 말로는 못 해. 세무서서 누룩 뺏으러 오고, 벌금 매길라고 오고 했어. 단속반이 오면 누룩을 산에다 갖다 놓기도 했어, 안 뺏길라고. 그때는 문패를 달아 놓은 집이 없어. 와 그라노 하면 문패를 보고 이름 적어서 벌금을 매기니까. 지금은 문패를 달지만 그때는 못 달았지. 나도 누룩 뺏기기도 하고, 벌금도 내고, 법원까지도 가 보고 다 했어. 이 동네 사람들 모두 다 한 번씩은 그랬어, 얼추. 많이 그랬어.”

누룩 단속반은 그 시절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룩을 숨기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난 집인 양 금줄에 고추를 꽂아 단속반의 출입을 막으려 한 이야기며, 누룩을 숨긴 이불 속에 드러누운 아낙의 이야기는 유청길 사장의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 선연히 남아 있다. 당시 단속반 가운데 세무서 직원은 소수이고 대부분 막걸리 제조업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누룩이었다. 압수한 산성 누룩을 자신의 양조장에 가져가서 막걸리를 담그는 데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가 놓은 술 단지까지 들고 갔기 때문에 단속반이 한번 들이닥치면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이 입는 경제적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불법적인 누룩 빚기를 그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누룩은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임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였다. 그 시절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에게 금정산성 막걸리는 밥이고 가족인 동시에, 눈물이고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이 1979년 민속주 지정과 1980년 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의 설립이었다.

여기에는 마을 사람들을 불법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역 명품 토산주를 만들어 보려 한 박영수 부산시장의 정책적 판단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 이전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금정산성 막걸리를 맛보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산성 누룩의 역사는 금정산성 마을 여성의 역사
또 한 가지 산성 누룩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금정산성 마을의 아낙들이다. 산성 누룩의 역사는 곧 금정산성 마을 여성의 역사이다. 이곳에서 누룩을 빚는 것은 여성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청길 사장이 기억하는 금정산성 마을의 옛 모습이다.

“누룩은, 옛날에는 여자들이 다 했지요. 남자들은 안 했어요. 남자들은 술 먹고 노름이나 하고. 그리고 농사가 조금씩 있었어요. 여기 보면, 자투리땅이 조금씩 있는 거, 그런 거 짓고 이랬지, 누룩은 안 했어요. 전부 여자들이 다 했지요. 누룩 반죽 같은 것이 힘들어도 여자들이 다 했다니까. 아[아기] 업고도 하고 그랬다니까요. 지금은 기계로 반죽을 하지만 예전에 기계가 없을 적에는 마당에 갑빠[두꺼운 비닐]를 깔아 놓고 거기에 밀가루를 부어 놓고 물과 섞어서 발로 밟았어요. 그러니 이 산성이 꼭 제주도하고 같았어요. 산성 여자들은 정말 힘들었어요.”

현재도 전남선 할머니의 누룩 띄우기는 두 딸이 전승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산성 마을 아낙들의 억척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전통 누룩의 명맥은 지켜지지 못을지 모를 일이다.
단사입, 막걸리 담그기
이렇게 완성된 누룩은 산성 마을 유일의 술도가인 금정산성토산주의 공장으로 넘어가서 막걸리를 담그는 공정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누룩과 고두밥을 섞는 단사입으로 시작된다. 금정산성토산주의 대표인 유청길 사장의 시선을 따라서 가 본다.

술도가에서는 먼저 쌀을 물에 불려 고두밥을 쪄서 식힌다. 금정산성 막걸리를 만드는 데 드는 쌀은 당연히 100% 국산 쌀이고, 정부미와 일반미를 절반씩 섞어서 사용한다. 식힌 고두밥과 분쇄한 누룩을 섞어 덩어리 없이 잘 버무려서 발효 탱크에 넣고 물을 붓는다. 이때 누룩과 쌀의 배합 비율이 막걸리의 맛을 좌우한다. 너무 많이 넣어도, 너무 적게 넣어도, 최상의 맛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배합 비율은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고 금정산성토산주에서는 홈페이지에 이를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술을 담그는 비결이요, 남에게 알려 줄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이 절묘한 배합 비율을 구하기 위하여 유청길 사장은 오랫동안 절치부심하였다. 부산양조에서 공장장을 지내는 등 부산·경남 일원의 막걸리 업계에 널리 알려진 정진구씨를 금정산성 마을로 모셔서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합 비율을 자신만의 노하우로 생각하였던 정진구씨는 끝끝내 이를 알려 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청길 사장은 오랫동안 애를 태웠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유청길 사장은 최적의 배합 비율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금정산성 막걸리의 품질은 다시 한 단계 상승될 수 있었다. 현재 금정산성 막걸리의 배합 비율은 쌀 140㎏에 누룩 80㎏와 물은 약 180리터[10말] 정도이고, 온도는 20도 이상으로 한다. 발효 탱크에 들어간 배합물은 이틀 정도 지나면 저어서 아래 위를 섞어 준다. 이렇게 섞어 주는 것을 ‘교방’이라 하는데, 일반 가정에서 단지에 술을 담을 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이 부분이라고 한다.

“집에서 술을 담글 때는 술을 섞지도 않습니다. 그걸 전문 용어로 교방이라 하거든요. 교방이라 하는데, [소량으로 술을 담글 때는] 섞지를 않아요. 근데 이거는 안 섞어 주면 큰일 나요. 우리는 안 건드리 주면 탈이 나요. 왜 그런고 하면, [발효 탱크의] 밑에 하고 우[위]에 하고 온도 차이가 크니까. 그러니까 관리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얘기예요.”

집에서 소량으로 술을 담글 때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실제로 건드리면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대량으로 술을 담글 때 교방은 반드시 필요한 공정이다. 현재 금정산성토산주의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발효 탱크의 단위 용량은 무려 750리터[약 41말]이다. 이럴 경우 아래 위의 온도 차이가 크게 나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아래 위의 농도와 성분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섞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막걸리 담그기는 온도와의 전쟁
누룩을 띄울 때와 마찬가지로 막걸리를 담글 때도 온도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다. 막걸리가 발효 식품인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듯도 한데, 누룩 빚기와 양조 과정을 통하여 막걸리 담그기는 그야말로 온도와의 전쟁인 것이다. 유청길 사장의 말을 들어 보자.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겨울철에는 스토브를 틀어 주기도 해요. 근데 여름철에는 방법이 없어요. 여름철에는 술이 개서 거품처럼 넘어요[넘쳐요]. 그걸 우리 어머니들은 ‘재 넘는다’고 하였는데,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부정 탄다’ 하고, ‘옆에 가지 말라’ 하고 그랬어요. 술이란 게 굉장히 예민한 미생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술 만드는 것을] 사람들한테 잘 안 보여 줄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술 담그는 날에는 초상집에도 안 갔어요. 그리고 잡균이 많이 들어간다든지 이럴 경우에[도 넘치게 됩니다].”

오랫동안 술도가에서는 술 담그는 날에는 초상집에 가지 않고, 술을 담그는 근처에는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터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터부가 생겨 난 것도 바로 이 온도와 관련이 있다. 술을 담그는 사람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초상집에 출입을 자제하고, 술독 근처에 외부인의 근접을 막는 것은 잡균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술을 담그는 날에는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 유청길 사장은 고사를 지내거나 터부를 지키는 등의 일은 미신으로 여기고 일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담그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경건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 선조들의 정신만은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금정산성토산주에서도 막걸리의 청결과 위생을 위해 양조장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딱 환절기 때 제일 많이 그래요. 균 활동이 환절기 때 제일 변동이 많아서 그랬지요. 결국은 제일 관건은 온도입니다. 온도가 너무 널뛰기 때문에, 온도의 변화가 격심할 때는 재를 넘는 일이 많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잡균이 많이 들어간다든지 이럴 경우에[도 넘치게 됩니다]. 술을 집에서 단지에 조금씩 하는 거는 상관이 없어요. 크게 할 적이 문젭니다. 집에서 하는 경우에는 장마철이 아니면 재 넘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근데 크게[대량 생산을] 할 때는 그런 일이 굉장히 많지요.”

누룩과 배합된 고두밥의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탱크 속에서는 누룩의 유산균이 부글거리며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격렬해진다. 이 때문에 유산균이 부글거리는 모습을 보면 발효의 진행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지면 술이 개서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개서 넘치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막걸리를 대량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유청길 사장은 수 년 간을 이 문제에 매달려야 하였다.

“에어컨으로는 감당을 못 해요. 에어컨을 틀어 놓으면, 2개월만 되면 에어컨의 기판 자체가 줄줄 흘러내려 버려요. 술 가스 때문에. 그 정도로 독해요, 술이.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술 공장 오래하면 혈압이 올라서 오래 못 살아요. 예를 들어 아침에 공장의 문을 열면 가스가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균이 안에서 활동을 하면서 배설을 해 내는 그것이 바로 이산화탄소 아닙니까.

그러니 공장에 가스가 꽉 차 있다는 건 유산균이 살아 있다는 증거죠. 이 유산균이 배설을 하니 술이 자꾸 시그러워지는[시어지는] 거죠. 그래서 식초가 되는 거죠. 그러니 정진구씨도 그걸 못 잡더라고요. 그걸 인제, 제가 잡았죠. 술 안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고안했어요.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거는 아니지요. 진짜 술 많이 갖다 버렸어요. 안 잡히더라고요! 한 4, 5년 걸렸어요. 이건 나만의 비결이고 비밀입니다.”

술독에 담근 술을 내다 버리기를 수백 단지, 막걸리 담그기에 나선 지 4~5년이 되었을 무렵 마침내 유청길 사장은 술이 개서 넘치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그만의 비밀 노하우다. 이 과정에는 금정산성 마을이 평지보다 기온이 평균 5도가량 낮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유청길 사장은 온도와 기압 등을 고려할 때 해발 400m라는 고도가 누룩 균이 번식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높이라고 여기고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금정산의 선물
이와 관련하여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금정산(金井山)의 물이다. 금정산의 물에 대해서는 전남선씨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리 시누[시누이]가 우리 집에 제사 때 와서 이틀 밤만 자면 설사를 해요. 물이 살이 많이 씬[센]가 봐요. 물이 되게 거신[거센] 택이라, 사람으로 치면. 그런 물이 술에는 좋은 갑데요. 그렇건대 술이 잘 되지. 산성 술이라 하는 거는 딴 데 가서 하니 파이라[안 좋더라]. 그 맛이 안 나고. 누룩도 우리가 딴 데 가서 한번 해 봤어요. 안 되데요. 파이데요. 우리가 그때 단속을 너무 많이 해서, 김해에 가서 한번 해 봤어요. 영 파이라. 산성에서 누룩 한 거하고, 술 했는 거하고 통 틀리더라. 영 파이라.”

전남선씨의 경험에 따르면 누룩을 빚는 데는 단물[軟水]보다 센물[硬水]이 좋다고 한다. 누룩의 맛을 좋게 하여, 막걸리의 맛을 좋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금정산은 이름에 우물 ‘정(井)’ 자가 들어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사시사철 물이 끊이지 않는 산으로 유명하다. 금정산의 풍부한 수량 또한 막걸리 만들기에 큰 도움을 준다고, 유청길 사장은 말한다. 금정산성 막걸리를 빚는 데 쓰는 물은 100% 전량 산성의 물이기 때문이다.

즉,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경험에 의하면 해발 400m라는 마을이 지닌 고도는 물과 온도 및 기압 등의 조건을 통해 금정산성 막걸리의 맛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누룩 빚는 기술이나 막걸리 담그는 갖가지 노하우 못지않게, 금정산성 막걸리의 맛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불가결한 요소는 금정산성 마을 그 자체인 셈이다. 발효가 끝나면 그토록 격렬하던 거품이 거짓말같이 없어진다. 그리곤 제일 윗부분에 막과 같은 것이 형성된다. 숙성이 끝난 것이다.

“술을 담근 지 3, 4일 정도 되었을 때는 술이 달달하니 그렇습니다. 처음에, 덜 익은 술이 답니다. 덜큰하니. 좀 더 있으면 떫게 되지요, 술이. 떫어야 됩니다. 그게 제일 맛있지요.”

누룩과 고두밥을 배합하여 발효를 시작해서 숙성에 이르는 기간은 계절마다 달라서 여름철에는 5일 정도, 겨울철에는 7~8일 정도 걸린다. 원래 막걸리는 숙성 과정이 끝난 술로 고급 청주를 거른 뒤, 청주의 술 찌개미를 물을 넣고 치대서 다시 걸러낸 술이다. 하지만 청주의 수요가 줄어든 요즘에는 처음부터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양조되고 있다. 이럴 경우 청주를 거르지 않는다. 금정산성 막걸리도 숙성 과정이 끝난 술에다 술 찌개미를 물에 넣고 치댄 것을 합쳐서 걸러 낸다. 술 찌개미를 물에 넣고 치대는 마지막 공정을 마친 막걸리는 유청길 사장이 직접 맛을 본 뒤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정산성 막걸리는 도수 8도의 막걸리로, 다른 막걸리에 비해 도수가 약간 높은 편이다.
‘금정산성 막걸리’ 날개를 달다
현재 금정산성 막걸리는 금정산성 마을의 모든 음식 및 주류 판매 업소에 공급되는 것은 물론 시내의 대형 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 납품하게 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전국 각지에서 배달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와서 사 가고 있다.

“제가 이 공장 맡았을 때 하루 세 말[약 54리터] 팔고 있더라고요. 둘이서 근무하는 데 인건비도 안 나오더라고. 공장으로서 기능을 영 못한 거지요. 지금은 매출이 대략 400배 정도 늘었지요. 지금 제2 공장을 새로 짓고 있는데, 제2 공장 규모는 현재 공장의 서너 배 정도 됩니다.”

1979년 민속주 1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980년 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를 설립하기는 하였지만, 당시 막걸리 시장은 협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1998년 현재의 유청길 사장이 대표로 취임한 이래 품질 개선과 맛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된 데에, 막걸리 열풍이 맞닥뜨리면서 금정산성 막걸리는 일약 막걸리 열풍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동안 금정산성 막걸리는 이름도 ‘금정산성 토산주’, ‘산성 마을 막걸리’, ‘부산 금정산 막걸리’를 거쳐 현재의 ‘금정산성 막걸리’로 바뀌었고, 매출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유한 회사는 사원과 주주가 동일하기 때문에 사원이 곧 회사의 주인이다. 따라서 유한 회사의 주주는 일반 주식회사의 주주와 달리 주인 의식이 확연하다. 이것이 유한 회사의 장점이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한 회사는 중소기업에 적합한 형태라고 평가된다. 이를 두고 유청길 사장은 유한 회사의 ‘가족끼리 운영하는’ 회사라는 개념이 ‘같은 동네 사람끼리 운영하는’ 금정산성토산주에 적합하였다고 말한다.
막걸리의 미래, ‘금정산성 막걸리’의 내일
요즘 들어 유청길 사장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금정산성 막걸리’의 고급화이다.

“함양의 용추미 이런 거 가지고 술 만들어 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맛이 상큼하니, 입에 짝 달라붙는다니까요. 그만큼 재료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 저는 금정산성 막걸리도 프리미엄이 나와야 된다, 한 병에 만 원 정도 하는 고급스러운 게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좋은 쌀과 최고의 좋은 누룩으로 만들어, 맛과 풍미를 진짜 당기게 하는 그런 술이 나와야 돼.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인제, 앞으로 저의 과제지요, 풀어야 할 과젭니다.”

이런 생각은 금정산성 막걸리의 진로와 관련하여 자연스러운 모색이지만, 최근 들어 막걸리 열풍이 사그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도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는 막걸리의 원천 기술인 누룩 빚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청길 사장은 막걸리 열풍이 시작되기 10년 전부터 이미 금정산성 막걸리의 품질을 향상시켜 온 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막걸리 열풍을 재현시키는 데도 나름의 구상을 가지고 있는데, 지역 밀착형 막걸리가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걸리 산업이 현재 내리막길인데, 이걸 다시 부흥을 시키는 길은 팔도 막걸리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부산의 금정산성 막걸리는 이런 맛이 나고, 서울 가면 서울의 어느 막걸리는 또 다르게 어떤 맛이 있고, 이래야 된다[는 겁니다]. 근데 지금의 막걸리는 부산 생탁이나 서울의 무슨 막걸리나, 먹으면 똑같다 말입니다. 매력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매력을 발산시키는 게 팔도 막걸리라. 지방마다 기후도 다르고, 물도 다르고, 미생물도 각각 다르다 말입니다. 그러니 독특한 맛을 낼 수 있단 말입니다.”

지역마다 자기 환경에 맞는 막걸리를 개발하고 육성하는 일은 개별 사업자뿐 아니라, 관계 당국과 해당 지방 자치 단체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금정산성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과 금정산성 역사 문화 축제
금정산성을 찾은 사람치고 한 번쯤 금정산성 막걸리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때로는 등산을 갔다가 금정산성 막걸리를 먹는 것인지, 숫제 금정산성 막걸리를 마시러 금정산에 오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부산 사람에게 금정산과 금정산성 막걸리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다. 등산에 취미가 없지만 금정산성 막걸리를 마시기 위하여 금정산을 오르는 이도 많았는데, 금정산 아래서 대학 시절을 보낸 필자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금정산성 막걸리의 맛은 무엇일까? 입에 대면 텁텁한 거친 맛에 새콤하게 톡 쏘면서도 약간 달짝지근하고, 걸쭉하면서도 매끈하게 넘어가며, 누룩의 구수한 맛이 여운으로 남는 맛이 아닐까? 막걸리 열풍을 타고 등장한 수많은 막걸리 가운데서 금정산성 막걸리를 돋보이게 한 것도 바로 이 특유의 맛이었다. 누룩을 알지 못해도, 누룩과 일본식 입국의 차이를 알지 못해도 맛의 차이는 혀끝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맛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또 다시 금정산성 막걸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2011년 제1회 금정산성 막걸리 축제가 개최된 이후 매년 봄이면 금정산성 마을에서는 축제가 열린다. 2013년부터 그 이름이 금정산성 역사 문화 축제로 바뀌면서 외연이 더욱 확장되었다. 금정구의 역사와 예술을 바탕으로 특색 있는 지역 문화를 만들기 위한 이 축제의 중심에 금정산성 막걸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축제가 벌어지는 5월이 되면 금정산성 마을이 있는 금성동 일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막걸리 향이 마을을 감싼다. 금정산성 막걸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찾는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무르익는 봄기운과 함께 온통 막걸리 향으로 넘실대는 막걸리 마을을 찾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누룩 장인의 일과는 이른 아침 누룩을 빚는 것으로 시작되고, 술도가의 하루는 밤새 양조장에 가득 찬 이산화탄소로 누룩 유산균의 활동을 체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대로 누룩을 빚어 막걸리를 만들어 온 금정산성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그 기술을 보전하고 맛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장인의 하루는 다시 계속된다. 생계를 위한 몸부림으로 시작하여, 맛과 풍류를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되었다가, 이제는 전통을 이어 간다는 자부심이 된 금정산성 막걸리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금정산성 마을 사람들의 역사이고 장인의 일상이다. 장인의 손맛이 계승되는 가운데 금정산성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의 즐거움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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