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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00년을 이어 온 가업, 명지 김
100년의 가업 명지 김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하중도(河中島) 명지동[면적 15.45㎢, 인구 9,034명(2008)], 명지는 ‘명지도(鳴旨島)’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명지도’는 자연 재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섬의 어딘가에서 먼저 변(變)을 예고하는 북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는 데서 나왔다. 명지는 강서구의 동남쪽에 있으며 북쪽은 대저동, 서쪽은 녹산동, 동쪽은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 남쪽은 낙동강 하구 해안에 접해 있다. 예전에 명지는 남해와 잇닿은 포구였기에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배들이 드나들던 문턱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수륙 양면이 왜군으로 인한 전란의 피해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명지는 이미 조선 시대 진상품이었던 ‘명지 소금’ 생산지로도 유명하고, 현재는 한국 최대의 ‘대파’ 생산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다. 또 섬 전체가 온통 갈대밭이어서 갈대를 이용한 갈발이나 갈삿갓, 갈꽃 빗자루 등 ‘노초(蘆草) 수공품’, 갈밭에서 잡은 갈게로 담근 ‘게 젓갈’, 낙동강 하류에서 특히 많이 나는 ‘재첩’ 등도 인기 특산품에 속하여 많은 애호가들이 찾고 있다. 명지 김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낙동강 아래쪽 삼각주 아래 명지에서 키운 김이라고 명지 김이라 카지예, 옛날에는 말캉[모두] 일본에 수출했지예, 일본에서는 명지 김이라 카면 안 알아줍니꺼.”

명지에 가서 명지 김에 대하여 질문하면 첫째로 듣는 말이다. 김 양식은 파도가 잔잔한 내만(內灣)으로 조류의 소통이 잘 되고 하천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는 곳이 좋다. 특히 낙동강 하구 일대는 다른 하천과 달리 넓은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으며, 수심이 얕고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각종 동·식물성 플랑크톤을 비롯한 영양소가 풍부하여 김 양식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낙동강 하구의 김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1425] 「동래현 토산공물조(土産貢物條)」이고, 여기에는 ‘해의(海衣)’가 등장한다. 해의라는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1454] 「동래현 토공조(土貢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동래현 토산조(土産條)」에도 보인다. 18세기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토산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물산조(物産條)」[1759]·「토산조」[1832]도 동일하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직전에 한반도 어업 실태를 조사하여 그 결과를 수록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志)』 제2집[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수산국, 1911] 「동래부」에는 중요한 수산물로서 ‘도포(搗布)’, 즉 감태(甘苔)가 명시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면 낙동강 하구의 김은 15세기 초에는 채취되었고, 이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 20세기 초까지 계속해서 중요 해산물로서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김여익(金汝瀷)의 묘비명에 의하면 그가 1640년(인조 18)부터 전라남도 광양의 태인도에 와서 살면서 처음으로 김을 양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김 양식업의 최초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15~20세기 초까지 채취된 낙동강 하구의 김은 양식이 아니고 자연산인 돌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명지를 포함하는 낙동강 하구에서 김 양식업이 개시된 것은 1910년대 초였다. 『조선의 수산』 제2호[조선수산회, 1924] 「조선 수산 양식업의 현황(그 2)」에 의하면, 1911년 12월에 경상남도의 촉탁에 의하여 일본인 오카무라[岡村金太郞]가 낙동강 하구를 시찰하였고, 그 결과에 기초하여 1913년부터 도 지방비(道地方費) 사업으로서 김 양식 시험을 실시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민간인도 김 양식업의 유리함을 알게 되었다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17년부터는 일본인 중에 김 양식업을 경영하는 자가 나타났으며, 그 이후부터 점차 보급되었다. 또 『조선어업조합 요람(朝鮮漁業組合要覽)』[조선어업조합중앙회, 1942]에 실린 낙동강해태어업조합[1922년 11월 조직]의 연혁에 의하면, 낙동강 하구의 해황(海況), 수질 등이 김 양식에 적합할 것같이 보여 1912년에 일본인 도마리[泊友吉, 시즈오카 현 출신]가 처음으로 해장죽(海藏竹)[일본명 여죽(女竹)]을 꽂아서[건홍(建篊)] 김 양식을 시도하였으나 양호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여 1년 만에 중지하였다.

그 이듬해에 도(道) 수산과의 지도 아래 당시 하단리 거주의 한 일본인이 시험하여 성적이 양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색택(色澤)과 향미(香味)가 일본 도쿄 아사쿠사 김에 손색이 없는 김을 양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방민의 양식업 경영을 장려하였다. 이후 1925년, 1926년경부터 지방의 한일 양국인 사이에 김 양식업이 보급되고 해마다 김 양식업자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김 양식은 영세 경영에 적합한 양식 종목이었기 때문에 낙동강 하구 거주 어민이 거의 독점하였다.

『어업의 길잡이』[화전장삼(和田長三), 부산, 1938]에 의하면 낙동강 하구에서의 김 양식업은 일본홍(日本篊)[섶] 양식법을 채용하였는데, 이는 대나무를 세워서 김이 착생하는 방법이었고, 여기에 소요되는 대는 1930년대 후반기에 180만 본이었다고 하며, 대의 종류는 해장죽으로서 북 큐슈에서 생산된 것이었다고 한다. 1931년에 낙동강 하구 김 양식장을 답사한 도산(島汕) 정문기(鄭文基)[1898〜1995] 박사는 고희(古稀) 기념 저서 『논문 수필집』[한국수산기술협회, 1968]에서 당시 김 양식의 실태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하단[낙동강 하구 해태장]은 부산 남단, 낙동강 구변에 위치한 포구이다. 부산에서 1리쯤 되는 곳으로 자동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하단에는 낙동강해태조합, 이외에 장어 어업을 목적으로 조선어업주식회사가 있는 곳이다. 해태의 연산액은 1929년도에 6만 원(圓)쯤 되어 전 조선 해태 어장 중 제10위를 차지하였으니, 금년에는 신어장의 확장과 풍작으로 10만 원을 예상하고 있지마는 불경기의 시기라 어찌 될지 알 수 없어서 농사에 대실패를 본 어민들의 염려가 가실 날이 없는 것 같다.

하단은 인구가 1,200명쯤의 포구로 이전에는 곡물의 출입과 숭어·장어 어장으로 생활을 유지하여 오던 것이 교통 관계로 곡물의 출입이 단절되고 그대로 해태의 생산을 보게 되어 비교적 염려 없는 생활이 계속될 듯하다. [중략] 해태어업조합장의 안내로 모타선으로 각 어장을 둘러보았다. 낙동강구 어장은 조선 해태 어장 중 광양·하동 어장과 같이 담수·해수가 상합하는 곳이라 우리 조선에 있는 다른 해태장과는 조건을 달리하고 있다. 마치 동경 천초해태장(淺草海苔場)과 비슷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해태는 대부분이 부산 상인의 손을 거쳐 오사카[大阪] 지방으로 이출된다. 이곳 어장에서 사용하는 히비[篊, 즉 섶을 말한다]는 동경식 히비로, 죽 1개를 그대로 해안에 꽂아 나열한다. 수십 만 평 어장에 꽂혀 있는 죽 히비는 마치 죽전을 보는 것 같다.

모타선으로 2시간 반이나 걸려도 대략을 구경하는 데 불과하였다. 이곳은 다행히 부산 목도(牧島)[영도]]에 있는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이 가까워서 해태 성장에 관한 시험장을 특설하였으므로 동업자의 편리가 많았다. 금년 성적은 신어장인 중앙부가 양호한 것 같고, 다년 계속한 연안 가까운 어장에는 청태가 발생되어 해태의 성장을 압도하여 일면이 청태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곳 신해태는 10여 일 후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명지를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 하구의 김 양식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화되면서 생산량은 급격하게 증가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되었다. 『조선어업조합 요람』에 의하면, 1940년경에 낙동강해태어업조합은 김 양식 면허 어장 2.314㎢을 매년 조합원에게 배분하여 양식업을 경영시켰다. 일제 강점기 말 전국의 김 양식 생산액은 1938년 537만 8,908원, 1939년 762만 4,108원, 1940년 1,447만 9,314원으로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낙동강해태어업조합 관내의 김 양식 생산액은 1938년 약 28만 원이었고, 1939년에는 약 64만 원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나, 1940년이 되면 20만 원대에 머물고 있다. 전국의 김 양식 생산액에서 동(同) 조합이 차지하는 비율은 1938년 5.2%, 1939년 8.3%, 1940년 1.5%였다. 특히 1940년이 되면 김 양식 지역이 서해안까지 확대되어 총 생산고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낙동강 하구의 김 양식 생산의 비중은 매우 저하되었다.

부산광역시에서 편찬한 『시세 일람(市勢一覽)』[1955]에 의하면 광복 이후도 낙동강 하구에서 김을 양식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는 사하구 장림동만이 소개되어 있으나 명지[하단, 녹산 등도 포함]에서도 양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낙동강 하구의 김 양식은 1957년, 1960년의 통계에서도 중요 수산물로 등장하고 있고, 특히 1960년대에는 김 양식이 굴, 조개 등에 비해 양식 업자와 양식 면적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명지를 포함하는 낙동강 하구의 김 생산은 부산의 직할시 승격[1963. 1. 1] 전후를 기점으로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녹색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부산의 양식 미역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낙동강 하구의 양식 김의 생산량은 소량에 불과하였다. 아울러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완공되면서 생태계의 변화로 생산량은 급감하였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동북아시아 경제 발전의 전초 기지 조성의 목적으로 자동차 등 첨단 부품 소재 생산 기지로서 신호 일반 산업 단지[사업 기간 1993~2006년, 사업 시행자 부산광역시]와 국제 업무 신도시 및 외국인 정주 환경 조성을 위한 명지 지구[사업 기간 2003~2015년, 사업 시행자 한국토지주택공사]의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면서 강서구 명지동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어 인구가 감소하였고, 이와 동시에 산업 단지의 조성으로 김 생산지도 축소되고 양식업에 종사하는 어민도 급감함으로써 500년의 역사와 100년의 가업을 이어 온 전통의 명지 김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 낸 최상의 먹거리
1. 6개월의 여정(旅程)

1) 명지동 어촌계 현황

강서구 명지동에는 진목, 중리, 동리, 신전, 대저의 총 5개 어촌계가 있다. 부산시 수산업협동조합[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691-3] 홈페이지에 의하면, 5개 어촌계의 조합원 수는 716명[어촌계원 수 544명, 어촌계 비계원 수 172명]이다. 이 가운데 김 양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저어촌계[붕어·잉어 양식]를 제외한 진목, 신전, 동리, 중리어촌계 소속 어민 61명[전체의 약 8%] 정도이다. 신전어촌계 조합원 한길영[53세]에 의하면, 이들은 대부분 김 양식을 전업으로 한다. 연령은 대체로 40세 중반에서 50세 초반이고, 학력은 고졸 이상이다.

어촌계에 가입에 대한 한길영의 말이다. “조합원 자격은 명지에 거주하면서 3년 이상 어업에 종사한 사람이라야 합니더.” 가입비에 대하여 동리어촌계 조합원 김준철[42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촌계의 자산에 따라 어촌계마다 가입비에 차이가 있지예. 옛날에는 평균 백 만 원이었지만, 지금은 한 삼사백 만 원 할 낍니다. 그러나 가입도 잘 안 시켜 주기도 하지만, 가입하면 뭐 합니꺼! 비용만 내고 별 이익이 없기 땜에 가입하려고도 안 합니더.” 이들 어민의 말에는 낙동 김의 현주소가 배어 있는 듯하다.

2) 자본 현황

김 양식을 위해서는 어선, 인부, 포자[패각, 즉 김 사상체가 붙은 굴 껍데기], 양식장 이 네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김 양식에 필요한 어선은 양식장에서 김을 채취하는 채취선[1척], 채취한 김을 공판장[경매장]까지 운반하는 수송선[1척, 하루 세 번 운반], 소독선[일명 약선, 1척], 작업선[2척]으로 총 5척이다. 이 가운데 수송선 1척의 가격은 7,000만~8,000만 원 정도이고, 300마력이면 1척에 1억 원을 상회한다. 또한 어선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유지비로서 유류비[면세유로서 시가의 절반 가격에 구입 가능, 1일 15말 정도 소비]와 기계 소모품비[수송선의 경우에는 1,000만 원 이상이 들 때도 있음] 등도 필요하다.

김을 채취하는 데 인부도 필요하다. 인부의 출신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재래식으로 수공(手工)으로 할 때에는 여자들이 주로 고용되었는데,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도 하였고, 인근 특히 부산 송정에 사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더. 요즘 인부는 중국인이 대부분이고, 파키스탄, 베트남, 필리핀인도 있습니더. 영광에 모로코인도 두 명 있다 아입니꺼. 한 놈은 키가 크고 힘도 셉니더. 작은 놈도 있는데 이놈도 보통 힘이 아니지예. 앵커[지주]도 쉽게 듭니더.”

인부의 고용은 양식장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3명이 기본이고, 많은 경우에는 6명도 있다. 이들에게 매월 지급되는 급료는 반장[책임자]이 250만~300만 원, 중급 숙련공은 200만~250만 원, 초보는 170만~200만 원 정도이고, 아울러 숙소와 식사, 음료수, 주류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이 지급된다. 신전어촌계의 김신곤[46세]에 의하면 이들에게 소요되는 비용은 연간 대략 6,000만 원 내외라고 한다. 인부는 5〜6월 비수기가 되면 기장의 다시마·미역 양식장에 투입되었다가, 7월에 다시 김 양식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김을 양식하는 데 종묘인 포자의 구입도 필수적이다. 명지 김의 포자 구입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는 삼흥수산[김 양식 전문 업체로 1971년 이후 명지 김 인공 채묘를 전담하였으나 1997년 폐쇄됨]에서 포자를 해상에서 배양한 것을 우리가 받아서 키워서 채취했지예. 인공 채묘이자 해상 채묘지예. 요새는 포자는 삼양수산[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동]에서 일본산 종묘를 구입해서 육상 채묘한 것을 받아 와서 바다에 깔아 키웁니더. 망 1장에 8,000원으로 구입하는데, 나는 망이 700장이 필요하고, 평균이 한 700〜1,000장 필요할 낍니더.”

이에 의하면 각 어촌계 소속 조합원의 1인당 포자 구입 비용은 대략 600만〜800만원 정도가 책정된다. 이 밖에 명지 김은 현재 부류식 양식법에서 ‘무노출 부류식’[김발을 햇볕에 노출시키지 않고 바닷물 속에 담가 양식하는 방법]으로 양식하기 때문에 잡조(雜藻)가 많이 낀다. 이 잡조를 제거하고 또 병해를 막기 위해서는 ‘산(酸) 처리’가 필수적이다. 동리 어촌계장 장동현[50세]의 말이다. “유기산은 1년에 한 사람당 약 17드럼 정도 필요하고, 1드럼에 20만 원 합니더.” 이상을 대략 합산하면 명지 김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은 적게 잡아도 1억 5,000만〜2억 원 정도가 된다.

3) 김 양식장[면허지] 배당

강서구 명지동에 있는 어촌계 소속의 김 양식 조합원 61명은 강서구청에서 위임받은 부산시 수산업협동조합으로부터 면허지[공동 양식장]를 배당받기 위하여 행사 계약을 한다. 이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협에서는 각 어촌계마다 관리비 조[명목]로 가을에 행사 계약을 하는데, 척 수에 의해 한 척에 얼마 얼마 행사 계약비를 줍니더.”

수협과 조합원과의 행사 계약이 체결되면, 조합원[61명]에게 김을 양식하는 면허지가 배당된다. 김 양식장은 다대포 서쪽의 장자도와 진우도, 몰운대와 가덕도 등 남해 넓은 바다에 위치한다. 전체 양식장의 크기는 대략 500㏊며, 조합원에게 1인당 세트로 배당된다. 동리 어촌계장 장동현의 말이다. “면허지는 세트로 계산됩니더. 1망은 세로 2m×가로 40m, 1책은 2.5망, 1세트는 2㏊고, 1㏊는 18책입니더. 1인당 5세트씩 똑같이 배당되니까, 1인당 10㏊[180책]가 주어지는 셈이지예.”

배당은 추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신전어촌계 김신곤[46세]의 말이다. “자재가 부족한 사람은 추첨 전에 미리 물살이 약한 데 신청하지만, 나머지는 개인 면허나 공동 면허나 모두 똑같이 일괄 추첨합니더.” 이때 중요한 것은 배당지의 위치가 김 생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한길영의 말이다. “좋은 자리는 물살이 좋고[세고] 트인 곳입니더. 그러나 기후 상황에 따라 안쪽이 안전한 경우도 있습니더. 물살이 너무 세면 말려[뒤집혀] 버리지예. 훼손된다는 말입니더. 바람이 세고 파도가 세면 등자리가 얕은 데가 말려 버린다 아입니꺼.” 한 해 김 생산의 다과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기후나 수온의 변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4) 생산 기간과 현장

국내 김 양식 과정은 재래식[지주식]인 섶 양식[1640년]에서 시작하여 떼발 양식[竹篊·建篊, 1834년]으로, 떼발 양식에서 부류식(浮流式)[부홍식(浮篊式)]인 망홍식(網篊式)[1970년 말]으로 교체되었다. 포자 생산 방법도 1980년대까지는 바다에 천연으로 자라는 포자를 받는 자연 채묘가 일반적이었으나, 그 이후 인공 채묘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인공 채묘도 1999년대에 이르러 해상 채묘에서 육상 채묘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2002년도 무렵에 완전 성공을 거두어 2005년부터 일반화되었다.

명지 김도 이러한 국내의 김 양식 변천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한길영의 말이다. “옛날[초등학교 무렵]에는 지주식으로 하였습니더. 지주식은……갈대 이걸 추려서 7~8개 정도를 짚으로 엮어서 김 포자가 잘 붙는 가덕도 눌차만으로 가져가서 꽂아 놓으면, 김이 거기서 자랍니더. 완전 자연산 포자지예. 이것을 다시 명지 앞바다 펄에 꽂습니더. 바다에 줄을 쳐서 지렛대로 구멍을 뚫고 포자가 붙은 갈대 묶음을 45~55도 기울기로 꽂습니더. 김이 자라면 밀물 때 채취하지예.”

한길영의 진술은 지주식과 자연 채묘, 해상 채묘의 좋은 사례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명지 김의 경우 포자 부착이 잘 되는 종자장[가덕도 눌차만]에 채묘하였다가 김 성육 어장[명지 앞바다]에 옮기는 이식 채묘를 한다는 점이다. 하신어촌계의 김태곤[47세]에 의하면, 가덕도 눌차만에서 자연산 포자를 받는 방식은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되었다고 한다.

채취한 물김의 가공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채취한 김은 분쇄하는 기계로 잘게 자릅니더. 마을에 공동 우물이 있는데, 거기서 큰 대나무 광주리, 물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더. 거기서 원통으로 세척 작업을 하는데, 기술이 좋은 사람은 눌리면 팍팍 소리가 납니더. 세척이 끝나면 ‘김 뜬다’고 하는 작업을 하는데, 와꾸[상자] 발짱[김발]이 필요합니더. 와꾸에 김발을 얹고, 김을 한 바가지 부으면 발짱에 김이 붙고 그것을 다음날 말립니더, 햇빛 좋은 곳에……. 학교 끝나면 김을 거둡니더.”

이렇게 해서 가공된 마른 김은 당시 수산조합[지금의 수산업협동조합]에서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이러한 재래식에 의한 자연산 김 생산은 부류식[망홍식]으로 전환되었다. 망홍식 김 양식은 비수기[5〜6월]를 제외하면, 자재 보수기[7〜8월]→ 채묘기[9월 초순〜10월 중순]→ 분망기[10월 중순〜11월 초순]→ 성장기·채취기[11월 초순〜익년 3월 하순]→ 종료기[4월]의 과정을 거친다.

명지 김의 포자[종묘] 채묘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양수산에서 일본산 종묘를 구입해서 채묘합니더. 삼양수산에서 김 포자를 키우는 방식은 평면식이 아니고 수하식입니더. 진해시 웅천동에서 채묘장에 비닐을 치고 굴 껍데기에 구멍을 내어 김발[채묘 망]을 끼웁니더. 이걸 수직으로 나열해서 배양 영양제를 주입하고, 물레방아로 그물을 돌리면 씨앗이 나와서 김발에 부착이 되지예. 우리는 이걸 사서 바다에 깔아 키우지예.”

이것이 물레방아 형식의 채묘 망을 돌려 김 포자를 망[김발]에 부착시키는 육상 채묘이다. 이렇게 포자를 채묘하는 회사에서 그것을 구입하여 분망[김발을 바다에 설치한 어망에 붙이기]하게 된다. 한길영의 말이다. “분망은 시설된 곳[배당받은 김 양식장]에 가서 가운데 줄을 쳐서, 그물로 양쪽을 묶어서 한 줄씩 펴 주면 김이 자라지예. 사각형에 망을 깔고, 그 안에 줄을 쳐서 김이 자라게 합니더. 사각형으로 된 양식장에 김발을 깔고, 스티로폼으로 된 부표를 사각형 모서리에 두면 그것에 의해 가라앉지 않습니더. 말하자면 사각형에 망을 깔고 앵커[닻]로 박아 고정시키고 스치로폴로 달아 주면 망이 뜨는 것이지예.”

이것이 곧 부동식 김발을 설치하고 닻으로 해저에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명지 김은 유일하게 이모작(二毛作)을 한다는 점이다. 즉 설을 전후하여 일모작을 끝내고, 포자를 받아 보관해 둔 냉동 망[냉장 망이라고도 함]을 다시 바다에 설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김의 생명인 신선도를 유지하여 좋은 김을 생산할 수 있다.

좋은 김을 채취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소독이다. 계속해서 한길영의 말이다. “유기산 세 말을 바닷물에 타서 시설한 곳[양식장]에 가서 배가 그 밑으로 사이로 들어가면서 밟아 줍니더.” 김을 생산하는 데 소독선[일명 약선]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길영에 의하면 소독으로 사용되는 산은 유기산이고, 무기산[염산]은 효과는 좋지만 생태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불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김 양식장에 염산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서 집중 단속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분망이 끝난 이후 김이 어느 정도 자라면 채취하게 되는데, 김 채취는 11월 초순에서 다음 해 4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진행된다. 신전어촌계 김신곤의 말이다. “김은 10일마다 한 번 채취하지만, 1인당 5세트를 배당받으니까 하루에 1세트씩 채취한다고 보면, 실제는 5일 쉬고 5일 채취하는 것이 되지예. 저 같은 경우는 4일에 한 번씩 채취하고 있습니더.” 다음은 한길영의 말이다. “김 엽체가 15㎝ 정도 자라서 가지색을 띄게 되면 김을 채취하고 또 반복해서 채취합니더. 초사리 치고[최초의 회수] 2불, 3불, 보통 한 8불을 칩니더. 관리 잘하고 장소 좋으면 열 번도 가능하지만, 평균이 한 여덟 번일 겁니더.”

김을 관리하고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매일 출항한다고 한다. 김을 채취하기 위해 6개월 그것도 매일 저 매서운 바람과 동사(凍死)할 정도로 차가운 바닷물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나긴 여정, 인고(忍苦)의 기간이다. 하루의 일과도 여느 집보다 빨리 시작된다. 김을 채취하기 위해 집에서 새벽 4~5시에 출항한다. 시속 10노트로 20~30분 거리에 있는 양식장에 가서 김을 채취하고 게다가 경매가 시작되는 12시 반 전, 대략 11시까지는 경매장[공판장]에 도착해야 한다. 늦으면 물김에 물이 많아져서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채취한 물김의 수량은 70㎏을 담을 수 있는 광주리 대략 80~100개이다[5,000~6,000㎏]. 이를 운반하는 데 수송선이 서너 번 왕복해야 끝이 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명지동 어촌계에 소속된 조합원 61명이 채취하는 낙동 김의 연간 생산량은 약 5,000톤 정도가 된다. 새벽의 찬바람과 시린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물김을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여간 녹록치 않다.

2. 영강 포구의 12시 반

“명지 김이 위탁 판매가 된 지는 대략 20년 될 낍니더.” 부산시 수산업협동조합 소속의 전문 경매사가 서기를 대동하고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나고, 중매인 6명 정도가 광주리 주위를 에워싼다. 경매사가 출하된 김 수량과 품질을 일러 주면, 중매인이 딱지[후다]에 경매 금액을 펼치고, 경매인이 이를 보고는 가격이 낙찰된다. 금액은 한 광주리당 평균 5만 원 내외에 판매된다. 판매된 대금은 다음날 부산시 수산업협동조합에서 ‘어대금’이란 명칭으로 개인 통장으로 입금되는데, 위탁 판매라서 총 금액의 4%가 떼인다. 1년간 김 양식으로 올리는 총 수익은 1인당 평균 2억~3억이지만[전체는 150억 정도], 여기에 자재 보수비, 인건비, 유류비 등을 제외하면 순이익은 2,000만~3,000만 원 정도이다. 이러다 보니 김 양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부분 빚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명지 김은 실체가 없다’- 명지 김 양식 산업의 문제점과 전망
1. 김 생산자 직접 운영 가공장의 부재

현재의 명지 김을 한마디로 ‘실체가 없다’로 정리하면 제격이지 싶다. 이 말은 명지 김의 문제점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명지 김의 재배 면적은 전국의 0.7%에 불과하지만[사단법인 한국김산업연합회 통계에 의하면 부산의 김 생산 면적은 전국의 2.4%], 생산 금액은 5%를 차지할 정도로 품질 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한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런 명지 김[물김]이 고스란히 외부로 빠져나가고 있는 점이다. 명지 김의 판로는 전라도가 대부분이고, 일부는 이웃 지방의 신호나 용원[진해]으로도 반출되고 있다.

명지 김이 전라도로 많이 나가는 이유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라도는 김 가공 기술이 발달되어 있습니더. 전라도에는 공장도 많고 기계도 현대화되었지예.” 그러나 명지 김이 전라도로 반출이 되고 있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계속해서 한길영의 말이다. “마른김생산자연협회 회장이 ‘명지 김은 전국 최고이다. 구입하고 물탱크에 며칠 보관해도 상하지 않고, 가공해서 박스에 넣어도 변색이 안 된다. 다른 지방 김은 탱크 안에서 하루나 이틀만 지나도 변색된다. 가공하면 당장은 색이 좋으나 하루 지나면 변색된다. 전라도 김은 명지 김이 없으면 안 된다. 명지 김은 전라도 김의 엑기스 역할을 한다’고 합디더. 전라도 김은 명지 김을 혼합해야 좋은 제품이 되는 것이지예.”

요컨대 명지 김은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김의 엑기스, 즉 영양제[원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영강 포구 앞 경매장에 전라도에서 온 차량[트럭]이 줄지어 물김을 싣고 있는 광경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라도 등에서 가공되어 출하되는 김은 그 원료가 되는 질 좋은 명지 김[물김]을 혼합하여 생산해야 제값을 받지만, 그들 고유의 브랜드를 붙이기 때문에 명지 김은 실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고유의 브랜드가 없으면 피해는 고스란히 어민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민이 채취하는 물김의 판매 금액은 한 광주리[70㎏]당 5만 원 내외이다. 그런데 한 광주리당 가공되는 완제품을 대략 25속[1속은 100장] 정도, 김 1속의 판매가를 평균 4,000~5,000원으로 잡으면 한 광주리당 수익은 12만 원 내외가 된다. 이는 결국 가공주가 막대한 이윤을 취득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처럼 명지 김이 대부분 국내 시판되는 마른 김의 원료가 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변변한 고유의 브랜드 하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김 생산자가 직접 운영하는 가공장이 없기 때문이다. 공장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규모도 거의 가내 공업 수준이며, 시설도 매우 열악한 편이다.

문제점을 발견하면 해결하는 것이 순리이고, 따라서 생산자가 협심해서 가공장을 세우면 된다. 한길영을 포함한 일부 조합원은 녹산 등 인근 지역에 김 가공장의 건립을 물색하고 있지만, 이도 공단 조성이라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지방 자치 단체인 강서구청과 부산시 수산업협동조합에도 요청해 보기도 하고, 지인을 찾아서 사정도 하는 등 모든 대책을 강구하고 연일 회의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면허지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김산업연합회 통계에 의하면 2011년도 대비 2012년도 부산의 김 재배 면적은 -13.6%로 전국의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참고로 전라남도 3.3%, 전라북도 -4.4%, 충청남도 -2.9%, 경기 0.0%]. 신전어촌계 김신곤의 말이다. “요즘 면허지가 자꾸 축소되니 걱정입니더. 신공항 건설로 폐쇄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잠도 잘 오지 않습니더. 제가 특별한 기술도 없고, 죽으나 사나 할 수 있는 게 이 일뿐인데 말입니더.” 김신곤은 말을 하면서 시름에 잠기고 한숨과 함께 담배를 꺼내 든다.

2. 경매 시간과 중매인의 횡포

명지 김을 생산하는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가공장이 없는 것은 경매 시간과 가공주, 중매인의 횡포로 이어진다. 가공주는 품질이 좋은 명지 김을 싸게 구입하기 위하여 소수의 중매인과 담합하여 가격을 조정한다. 가격 조정 방법으로는 지역마다 경매 시간을 달리하고, 특히 명지 김을 제일 나중에 책정하고 있다. 즉 전라도에서는 경매 시간을 11시, 용원에서는 12시에 잡고, 제일 좋은 명지 김을 12시 반으로 잡아서 어민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입하는 수량도 제한해서 어민의 애간장을 태우기 일쑤다. 요컨대 말이 경매지 실제로 어민은 중매인과 가공주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메커니즘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은 당연히 가공주이지만, 여기에는 중매인도 한몫을 챙기고 있다. 중매인은 전라도와 용원에 있는 각 가공주로부터 개인적으로 청탁을 받아서 김을 구입하여 되팔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고 한다. 수협에서 관리하는 경매인도 마찬가지다. 경매인은 공탁금을 걸고 경매일을 보지만, 중개 시 0.4%의 수수료를 챙기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어민이 부당한 방법이나 처우에 항의를 하면 항의자에게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준다[예를 들어 한길영의 경우 몇 번 항의를 하였다는 이유로 한 광주리당 평균 5만 원인 금액을 4만 원으로 책정하여 길들이기를 한다고 함].

3. 홍보 부족과 전망

명지 김이 제품의 질이나 맛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함에도 이렇게 냉대를 받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홍보 부족이다. 한길영에 의하면 용원에 있는 김 가공장 ‘성덕수산’이라는 회사는 자회사 브랜드로 1속당 8,000~1만 원의 가격으로 일본에 수출한다고 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 특산품 판매 코너이다. 부산광역시 지정 부산 명품 수산물을 보면 김을 판매하는 회사로서 세화와 아산문화사업이 있다. 이 가운데 세화에서는 ‘국내 유일하게 낙동 김을 만든 맛김’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아산문화사업에서는 ‘선창 마을 낙동 김’으로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더러 명지동에 있는 사람은 그런 회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최근에는 명지 지구 산업 단지의 조성으로 일반인에게 명지 김의 생산지인 남해 앞바다는 수질 오염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고, 실제는 일반인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청정 지역이라고 한다. 이 또한 홍보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강풍으로 피해가 발생해도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협회라고는 사단법인 한국김산업연합회와 부산시물김생산자협의회가 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

명지 김이 그 품질에 걸맞은 평가와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생산자가 직접 물김의 채취에서 마른 김의 생산·판매까지를 책임지는 시스템의 구축이 절실하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고품질이라는 홍보를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면 자연히 고유의 브랜드가 형성될 것이고, 그에 따라 가격도 현재보다 높게 책정될 것이며, 가공주와 경매인 및 중매인의 횡포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명지 김, 그 울림처럼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은 전체 인구 중 토착민이 85%이며, 이들은 명지초등학교·경일중학교의 선·후배 관계로 맺어져 있어 지역 연대 의식이 강하다. 명지동의 신전, 동리, 중리, 진목, 대저의 총 5개 어촌계 가운데 동리, 중리, 진목, 대저는 모두 마을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조합원이 28명인 신전어촌계의 신전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기 이전 명지면 신전리에서 따온 명칭으로서 당해 리에는 상신·중신·하신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신전어촌계 소속 조합원의 대부분은 하신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강서구청에 홈페이지에 있는 ‘명지동 자연 마을’을 보면, “하신 마을은[20통] 옛날 ‘띠밭등’이라 불렀고 홍처사 염전, 박진사 염전이라 부르는 염전의 터가 있었는데, 명지 제염소가 되었다고 하며 신호 마을로 건너는 나루가 있었다. 김해군 시절에는 모범 마을로 선정되기도 한 마을로 ‘장자도 김’이 특산 김으로 인정받아 일본 등지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명지 소각장과 명지 배수 펌프장, 부산해양경찰서 하신선박출입항신고소가 있다[세대 수 189, 인구 수 444].”로 소개되어 있다. 하신 마을은 명지동의 남서쪽 최남단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하신 포구 남쪽으로 바닷가에 아파트가 들어섰고 신호 대교 너머 신호에는 녹산 국가 산업 단지가 있고 르노삼성자동차 공장의 건물들이 있다.

김 양식업에 종사하는 어촌계 조합원은 대부분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명지에 정착하여 김 양식에 종사하게 된 사연에 대하여 한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청주 한씨인데, 청상인 할머니가 대구에서 명지로 이주하여 하신에 살았다 아입니꺼. 하신이 바다 가까이 있다 보이 저절로 어부가 되었지예. 아버지가 김 일을 하셨고, 우리 형제[4남 2녀]도 둘째 형 빼고 죄다 이 일을 하고 있습니더.”

신전어촌계의 김태곤[46세]도 가업을 계승하기는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김 양식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결혼은 윗대와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결혼에 대하여 동리어촌계 김준철[42세]의 말이다. “우리 윗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결혼은 주로 현지인[명지 출신] 여자와 하였지만도 우리는 외지 사람이 더 많습니더. 저도 25세에 친구 소개로 경북 영해 사람인 집사람과 결혼하였심니더.” 김신곤도 부산 출신 여성과 연애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인부로 왔던 여성[부산 송정 출신]과 혼인한 사람도 7~8 가구 있다.

명지에 거주하면서 김 양식을 천직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음주 가무를 즐겨 한다. 한길영의 말이다. “겨울에 김을 채취하러 새벽에 나가면 어떨 때는 파도가 엄청 센기라예. 그러면 배가 뒤집힐라고 할 때도 있습니더. 이걸 이기고 돌아오면 소주 한 병은 그냥 들이키지예. 이런 생활이 거의 매일 되풀이됩니더. 그러면 자연히 술을 즐겨 마시게 되고, 친구끼리 노래 부르러 간다 아입니꺼.”

비수기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취미로 포커 놀이도 한다. 딱히 특별한 놀이가 없는 생활 환경 탓도 있지만, 명지에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나쁜 인습에 이들도 자연히 젖었다. 최근에는 등산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한다. 매서운 바다 바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망가진 심신을 추스르고자 한 달에 두 번 산행을 한다고 한다. 또한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으로 자녀와 어울릴 시간이 부족한 탓에 휴일이면 더러 교외로 드라이브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가도 잠시일 뿐,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다음날 출항 준비는 빠뜨리지 않는다. 한길영의 말이다. “12시 반에 경매가 끝나면 위판장에서 아미[광주리에 씌우는 그물]를 오뭅니더[덮어씌운다]. 그러면 용역팀이 이것을 차에 탑재하지예. 나는 수협에 가서 출항증을 재발급받기도 하고, 기름을 구입한 뒤에 광주리를 가져가서 그물을 씌우고 배에 탑재하고, 기름을 주입해서 내일 출항에 지장이 없도록 한 다음에 귀가합니더. 지금은 용역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지만, 만약 용역이 없으면 별 보고 나가고 별 보고 들어옵니더.”

이뿐만이 아니다. 어민들은 새벽일에 지칠 만도 하건만 다시 다대포 앞바다로 나간다. 김신곤의 말이다. “오리 때문에 다시 바다로 나갑니더.” 명지 사람들은 몰려드는 오리들 때문에 한낮에도 양식장을 비울 수가 없다. 김신곤의 말이다. “[오리가] 엄청 먹습니더. 어장이 시꺼먼 게 하나도 안 보입니더. [오리가] 달려들면요.” 명지 김의 달고 깊은 맛을 저 미물인 오리도 아는가 보다. 때문에 어촌계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 끼니를 때우고 밤을 맞이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모양이다.

아낙네들은 어떤가? 새벽에 출항해서 김을 채취하는 것은 남정네 몫이지만, 김을 판매하는 데 아낙들 손엔 물 마를 날이 없다. 최순천[38세]의 말이다. “새벽에 2시 반, 3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밥해 주고 나오고, 그리고 집에 가서 일꾼들 점심 줘야지, 저녁 줘야지, 새벽밥 주지, 여기 나와서 일하지. 그러니까 여자들 할 일이 장난 아니에요. 처음엔 모르고 여기 와서 하려니까 눈물밖에 안 나왔어요.” 낙동강 가에 집을 두고 낙동강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일터를 둔 이들에게 낙동강은 생업의 터전이고 사회생활의 바탕이다. 그 한가운데 명지 김이 있다. 이들에게 김은 생명이다.

우리나라 김 양식의 원조는 부산 강서구 명지동 앞바다 명지 김이다. 이런 명지 김이 저 매서운 찬바람과 차가운 바닷물로 동사(凍死) 직전에 있다. 명지 어촌계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4월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고 향토애 고취 및 어업인의 화합을 위해 풍어제 행사를 하고 있다. 삶에 지쳐 있는 곳, 메마른 내 이웃 사람들, 3대째 가업이 4대, 5대 아니 영원히 계속되기를, 명지라는 지명처럼 만 대의 울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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