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종교
안창 마을은 통일교 성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에서 산 쪽으로 한참 올라가다 보면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1951년 탈북 피난민으로 부산에 내려 온 문선명(文鮮明)이 수정산 아래 공동묘지 근처에서 토담집을 짓고 생활하며 경전을 집필했다고 한다. 경전 탈고 후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안창 마을이었다. 지금은 문선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생활했던 자리를 통일교 측에서 매입하여 기념관을 세워두었다. 통일교 신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성지로 기념하고 있다.
예전에는 통일교 신도들이 성지를 보러 오기도 많이 했다. 외국 사람들이 가득 마을로 올라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국인을 잘 못 보던 시절이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차가 마을까지 올라오지 않던 시절 아침부터 길이 미어지도록 올라오는 사람들 모습에 함께 따라가서 구경을 했다. 그때는 아직 통일교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군데군데 앉아가지고 세 나라 말로... 한국말, 영어, 일어로 연설을 하더라고. 막 울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 구경을 했어.”
길이 닦인 다음부터는 관광버스를 타고 성지 순례를 하러 왔다. 외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일절 그런 일이 없다. 몇 해 전부터 관광버스가 오는 경우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지가 있는 것 치고는 주민 중에 신도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워낙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마을 입구에 있는 통일 회관이 아니면 통일교에 대해선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입구부터 작은 절이 많이 있다. 보각사, 선해사, 광명사, 법천사, 천수암, 백련사, 관음사 등 작은 마을에 꽤 많은 절이 있지만 오히려 주민들은 멀리 있는 절에 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좋은 절을 찾아 양산이며 언양까지 차를 타고 나가는 열성 신자도 꽤 있다.
마을 사람이 개척한 교회도 있다.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는 전도를 하느라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1970~1980년대 삼화고무 등 대부분의 공장이 첫째, 셋째 주 일요일만 휴무였다. 모두 맞벌이를 하는 와중에 한 달에 딱 2번 있는 휴일에는 다들 지쳐 쓰러져 쉬기 바빴다. 거기에다 첫째, 셋째 일요일이면 쉬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 보림 극장에서 쇼를 했다. ‘남진쇼’·‘나훈아쇼’ 등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락이 많아 시내로 구경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다보니 금쪽같은 휴일을 교회에서 보내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교인이 없으니 교회는 매번 자금이 없어 어려웠고, 젊은 신학대학생 목사가 주말에만 와서 설교를 하다 보니 교인들과 유대감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교회를 꾸려 나갔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교회 개척자의 아들이 장로로 활동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선교지에서 살해된 김선일의 부모님도 원래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아들의 사고 이후 마을의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