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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도심속 푸른 달동네, 안창 마을
안동네 이야기
부산 동구 범일 4동과 부산진구 범천 2동에 걸쳐 있는 마을. 골짜기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안창 마을’이라 부른다. 지금도 마을을 따라 흐르고 있는 내를 ‘범내’라고 부르는데, 옛날 이 냇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내를 범내 혹은 호천, 호계천이라고 부르며 아직도 호랑이 이야기를 한다.

6·25 전쟁 당시 살 곳을 찾아 피난을 온 사람들이 산으로 한 집, 두 집 모여들며 인적 드문 이곳에 사람들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몇 채 없는 집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 위쪽에 무덤이 참 많아서 공동묘지라고 할 만큼이었다. 그래서 초상이 나면 상여를 매고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술 취한 아버지의 매를 피해 도망을 나온 아이들은 무덤 옆에서 자기도 했다. 이상하게 무덤 옆은 밤에도 춥지 않았다고 한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70~80년대에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난 골목, 낡은 외벽에 타이어를 올려놓은 단층 슬레이트집. 사라져 가고 있는 이런 풍경들은 이제 안창 마을처럼 고지대에 위치한 몇 몇 지역에서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 한 착각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한번쯤 유년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한 유년 시절
1968년, 이씨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안창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때만 해도 그저 ‘안골’·‘안동네’라 불렀는데, 범일 4동에서 범일 6동으로 분동이 되면서 어느 순간 안창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겨우 15가구였던 마을은 그가 중학교 가던 무렵 40가구로 늘어났다. 이즈음 이씨의 아버지는 안창 마을에도 자전거나 리어카가 다니는 도로가 하나 있어야 한다고 직접 구청에 가서 건의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물론 없는 사람이지만...도로는 좀 반듯한 도로가 있어야 안되겠나. 그래 건의를 하셔가지고 새마을 사업 일환으로 뭐...6년간 단계적으로 하여튼 이 도로 사업을 했습니다. 이 기초가 우리 40가구 되는 이 마을 사는 어른들이 일주일에 밀가루 옛날에 20키로짜리 큰 거 포대 안 있습니까? 종이 포장으로 된 거를 일주일에 한 개쓱 타가 먹으면서 도로를...”

마을 입구에서는 돌이 너무 커서 석수장이가 손으로 모두 깨어서 길을 넓혀갔다. 그래봤자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폭이었지만 그 길을 ‘대로’라고 여기며 좋아했다. 그는 한창 포장 작업을 하던 시기에 시멘트를 씌우기 전 돌을 깔아둔 도로를 뛰어 내려가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며 무릎에 남아있는 흉터를 보여준다. 6월 14일로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 하노라며 이웃집 아저씨들이 자신을 업고 교통부 아래 조그만 병원으로 데려다 준 당시를 회상한다. 스스로를 안창 마을에 도로가 깔리던 현장을 고스란히 몸으로 기억하는 산 증인이라 말하며.

“중학교 3학년 땐가 전기가 들어왔어요. 전기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생활 실정이었냐 하면...배에서 켜는 그 호롱불 있지요 석유 여어 가지고 큰 대롱으로 여어 가지고 심지에 불 불이 가지고...그거를 인자 내가 이 도로가 조금 나면서 자전거를 타고 남포동 자갈치 시장에 그 짚단에 호롱불 30개썩 너어가 팝니다. 그래 인자 우리가 호롱불을 케고 그래 하고...”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아랫마을까지 내려가 배터리를 2개씩 충전시켜 와야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 하나를 두고 10원씩 시청료를 내며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된 드라마 「여로」를 보던 일도 이제는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이씨는 시골 마을에 가도 요즘은 그렇게 모두 모여 웃고 떠들며 텔레비전을 보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 시절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낭만이 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마을 꼭대기까지 모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80년대가 되어서나 가능했다.

이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마을의 도로 사업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기가 들어오는 데에도 주체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새마을 훈장 근면장 5호를 받은 이씨의 아버지는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도 훈장과 함께 받은 대통령 하사금을 범일 4동에 기부하였다. 그는 지금도 남아있는 밤 깎는 공장을 짓는데 아버지의 기부금이 사용되었다며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대외 활동을 주로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가정생활은 철저히 그의 어머니 몫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도로가 없던 시절부터 조방 앞 중앙 시장과 자유 시장에서 물건을 떼어 와 대야를 이고 장사를 하셨다. 자신의 어머니를 ‘억척’이라 회상하면서도 그는 다섯 형제를 모두 뒷바라지 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이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 사용하는 연탄을 지게에 지고 나르며 어머니를 도왔다.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보며 함께 그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그는 지금껏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약주를 즐기시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함께 자식만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이 한 몫 하였을 것이다.
학창 시절의 추억
이씨는 다섯 형제가 모두 안창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너무 어릴 적부터 먹고 살기가 바빠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이 때문에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하지만 다섯 형제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동생도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눈치다. 악착같이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의지 덕분이었다며 그는 다시 한 번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린다.

안창 마을은 하나의 마을에 진구와 동구로 행정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예전부터 이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는 더욱 쉽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학군은 같아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는 거의 대부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안창 마을의 학생들은 모두 범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학교는 변함이 없어 자신의 자녀들도 모두 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기회를 유지할 만큼 돈독한 사이가 가능한 것도 어찌 보면 안창 마을 출신은 모두 선·후배로 이어져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미군들이 주는 우유 급식이 가장 즐거운 추억이라고 회상한다. 그는 다섯 되짜리 주전자에 우유를 받아와서 난롯불에 얹어 놓고 점심시간이면 그 우유와 함께 받은 빵을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지 빙긋 웃는다.

“옛날에 여 연못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는데...봄 되면 깨구리 소리 듣고... 태영택시 뒤에는 옛날에 전부다 논이었습니다. 밭이고...그래가 인자 벼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고, 우리 집 뒤에는 돼지들도 키았어요. 그래가 시장에서 짬통 그걸 가져와가 믹이고...”

예전에는 절이 많았다. 여기저기 굿도 많이 했다.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리고 굿을 하는 것 같으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곳에는 돈이며 먹을 것이 가득했다. 잘 먹어보지 못하는 고기가 항상 있었다. 동생들을 데리고 가서 음식들을 먹였다.

산에 있는 대나무를 꺾어다 장에 팔기도 했다. 대나무를 가지고 구포에 가면 하나에 500원을 받았다. 추운 겨울에 500원을 벌기 위해 구포까지 대나무를 가지고 걸어갔다. 가끔은 연탄을 절까지 날라주고 돈을 받았다. 자그마한 어린 몸으로 연탄 지게를 메고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유년 시절을 회상하던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유년 시절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먹을 것은 많지 않았고, 어린 나이지만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던 시절. 그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논에서 뛰어 놀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간 추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씨의 집은 가게를 하면서 땅도 조금 가지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여유가 있는 편이었는데도 유년 시절은 항상 배가 고픈 기억뿐이다.

철이 들어갈수록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이씨는 당시 약대가 ‘비율이 세고 공부도 잘하고 알아줬다’는 이유로 중학교까지 장래 희망이 약사였다고 한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던 현실은 이씨가 전혀 다른 길을 가도록 만들었다.
억척스러운 안창 여자들
마을로 내려오는 물이 맑기도 맑아 빨래를 할 때면 어머니들은 개울가에 모였다. 일요일이면 아랫마을에서도 ‘다라이’에 빨랫감을 담아 올라왔다. 찌든 빨래를 빨겠다며 ‘다라이’에 장작 몇 가지를 얹어 빨래를 빨고 그 자리에서 삶기도 했다.

교통부 옆 지금의 경남 아파트 자리에 삼화고무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동양고무, 태화고무 등 고무 공장이 많았다. 진양에서 청소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안창 마을 사람들의 반수 이상이 이들 회사에 다녔었다. 가정집에서 조금씩 신발을 만드는 가정 공업 신발 공장이 많이 있을 때는 일자리가 많아 생활도 나아졌다. 신발 공장이나 고무 공장은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이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항상 사고 걱정을 한다. 산 아래 마을이라 숲이 우거진 곳도 많고 좁은 골목이 많아 여자 혼자 걷기 무서울 때도 있다. 한창 삼화고무나 국제상사에서 일하는 젊은 처녀, 총각이 많을 때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마을 청년회가 방범 활동을 하며 치안을 살폈다.

새벽 5시, 6시가 되면 일하러 가는 사람들로 길이 비좁을 정도였다. 내려가며 서로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도시락을 싸서 조방 앞 방직 공장에도 많이들 나갔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집에 세를 들어 살며 그렇게 모두 부지런히 움직였다. 안창 마을 여자들의 생활력은 유난하다. 맞벌이를 하기는 하지만, 남자들 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러 다니는 이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없어지게 되자 일거리가 없어진 사람들의 생활고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건설 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이 동네에 들어와서 돈을 벌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더 망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 한 푼이라도 벌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름이면 아랫마을보다 3도는 더 시원하다. 더워서 숨을 내쉬다가도 집에 돌아와 앉으면 그나마 살만해진다. 문제는 겨울이다. 여름이 시원한 만큼 겨울은 더 춥다. 그나마 부산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가끔 오는 눈에 고생도 참 많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비탈길에 오르내리기가 힘든데 눈이 오거나 비가 와서 얼어붙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저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햇살에 얼음이 녹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아가씨들은 미끄러지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하니 어떻게 해서든 내려간다.

연탄을 많이 떼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연탄재를 뿌려대느라 바빴다. 집 앞에 여자들이 연탄집게로 연탄을 부수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했다. 연탄재가 있는 곳만 골라 밟아가며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그나마 요즘은 예전만큼 연탄을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 모습 보기도 쉽지는 않다.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여자들의 고된 일이었다. 요즘은 그나마 버스가 다녀서 자갈치며 부전 시장이며 내려가기가 훨씬 쉬워졌지만 예전에는 모두 걸어 다녔다. 이씨의 어머니도 매번 걸어서 시장까지 가셨다. ‘다라이’를 하나 머리에 이고 구름다리를 넘어 조방 앞까지 갔다. 지금은 진시장이 더 발달해 있지만 그전에만 해도 자유 시장을 주로 다녔다. 한 번 내려가면 ‘다라이’ 한 가득 먹을 것들을 샀다. 채소, 과일, 생선이 주로 사오는 것들이었고 가끔씩 애들이 입을 옷가지도 사오셨다.
다시 안창 마을로 오기까지
군 제대를 하고 그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어려운 형편에 장남이라도 빨리 자리 잡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성화로 결혼도 일찍 했다. 결혼 후 안창 마을을 떠나 생활을 하였지만 여전히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연로하신 어머니까지 부양하게 되자 결국 안창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이 안창 마을 안 올라 올라 했어요. 내가 너무 고생도 많이 하고...자전거 끌고 짬밥 갖다 나르고, 연탄 지게 넉 장 지고 다니고...이런 내 고통, 회한이 많기 때문에 안창 마을이라 하면 회의를 느꼈는데...”

그의 말에서 안창 마을이라는 곳에 대한 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을 시작한 곳이지만 아픔 또한 너무 많아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곳. 그 곳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복잡한 사연이 그의 목소리에서 모두 묻어난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큰 연못 앞 고인돌 위에 좌판을 벌여 동네 주민을 상대했던 어머니를 이어 받아 지금 이씨는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싶어 현금 지급기와 복권 기계까지 구비해 놓기도 했지만 상주인구가 적은데다 유동 인구도 없어 이제는 대부분 정리했다. 요즘은 버스를 조금만 타고 나가도 대형 마트들이 워낙 많아 운영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뭐 구멍가게도 아이지. 우리 집이니까 뭐 닫을 수가 없고 우리 동네에 마 그래도 담배나 팔고 뭐 간단하게 술이나 인자 할라고 안즉까지 이렇게 있습니다.”

이씨가 말은 편안하게 하지만 속이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예전에 규모가 꽤 컸을 때 건물들 하며 확장해 나간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무허가 건물이나마 세를 늘려가며 하나 둘 장만해 가던 재미가 컸던지 이쪽저쪽 가리키는 그의 손짓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의 아들과 딸도 아버지가 공부를 했던 범일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씨는 자신의 어릴 적 삶이 한스러워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자식들에게는 피아노와 컴퓨터 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나마 방과 후 교육 등이 있어 예전에 비해 다양한 교육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의 부모님이 자신에게 바랐듯이 이씨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버지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길 기대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부끄러워 친구들 데려오는 것도 잘 하지 못했었다. 아이들에게만은 할 수 있는 만큼은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 많이 애를 쓴다. 자연히 그의 관심은 의무 교육, 무상 급식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은 자식 앞에서 똑같은 마음을 가지는 법이다.

“우리 안창 마을에는 문을 안 잠급니다. 뭐 가갈기 있어야 문을 잠구제.”

대부분 오래 알아온 주민들이 함께 하며 이웃집의 사소한 일까지 알아가는 정이 남은 마을. 자식들이 이사를 가자고 해도 계속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 어머니들이 많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만큼 정이 가는 터전이 흔치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 뛰어놀며 자유롭게 커가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소외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그의 말 속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무허가 판자촌의 설움
그가 지내고 있는 땅은 도시개발공사의 부지이다. 안창 마을은 도시개발공사, 산림청 등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대부분이다. 불하를 받고 싶어도 당장 목돈이 없는 주민들에겐 하늘의 별따기이다. 1970년대 초에는 집값이 3만 원이나 3만 5,000원 정도였다고 들었다. 그러다 돈을 좀 모르면 17만 원짜리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랫마을에 비하면 싼값이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한창 인구 유입이 많을 때는 하룻밤 사이 집이 한 채 들어서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살기 싫다며 눈물을 찍어대는 집사람을 반은 설득하고 반은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와서는 남자들이 집을 짓는 모습이 매일 매일 이어졌다. 슬레이트 지붕에 흙으로 만든 블록이면 그나마 좋은 축에 속했다.

주민들끼리 무허가 건물을 서로 고발하는 일도 많았다. 이씨는 누가 더 좋은 집을 짓거나 하는 것을 보기 싫은 없는 사람들의 고발정신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안창 마을의 토박이 집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집에 지금도 이씨의 동생이 살고 있다. 이씨의 기억으로 그 집은 자신이 군대를 제대한 이후 7번 고발을 당해 7번을 뜯겨나갔다가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운이 나쁜 집은 9번까지도 뜯겨져 나갔다고 한다.

“귀퉁이에 땅 하나 쪼매 할애 해가지고 부로꾸 지가지고 스레트 자기 돈으로 사가지고 그냥 하나 지아가 방 하나 부엌 하나 이래가 들어갔습니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내는 집이다 보니 제대로 단열이 될 리가 없었다. 나무를 해다 때면서 난방을 하는 집에 겨울이면 웃풍 때문에 방 안에 있어도 코가 시렸다. 겨울을 지내고 나면 벽지가 성한 집이 없었다.

지금도 주민의 대부분이 사용세를 내며 생활하고 있는 이곳에서 매매라고 하면 권리금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하도 되지 않은 땅에 권리금이 많다 적다하는 실랑이가 많아 요즘은 매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전히 무허가 건축물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처럼 감시가 심하지는 않아 슬쩍 집을 확장하는 일도 많아졌다.

고지대에 개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살아가면서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그나마 수정산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이 참 좋았다. 맑고 양도 많아 물 걱정은 없었다. 여자들은 개울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좋아라 했다. 양동이에 지게질까지 해가며 물을 길어 오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일상이 되어 지내다 보니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다. 여차 하면 장정 둘이 이틀만 파면 지하수가 펑펑 나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많던 물들이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범내는 겨우 개천 수준이 되었고 지하수도 거의 말라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수정산을 가로지르며 생긴 터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흐르는 맥을 끊어 놓았기 때문에 얕은 우물물은 모두 말라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1990년대에 들어 상수도가 들어왔다. 무허가지라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다보니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지금도 당시 지역구 국회 의원을 보면 반갑다. 높은 사람들이 힘을 써줬기 때문에 이런 곳도 그나마 살기 좋아졌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수도가 들어와도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워낙 고지대여서 마을까지 물을 끌어오다 보면 수압이 낮아져서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랫집에서 물을 다 빼서 쓰면 윗집은 물을 못 쓰기 일쑤였다. 밑에서 물을 어느 정도 쓰고 잠궈 주면 그나마 물이 나왔지만 시간이 되면 꺼져버렸다. 24시간 급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 이후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받은 혜택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도로 이야기를 꺼낸다. 3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주도하여 포장한 도로를 확장해 나간 것이 가장 큰 혜택이라며. 도로 확장도 그냥 받은 것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선일(金鮮一) 사건의 주인공인 김선일이 바로 안창 마을 출신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지역인 이 마을에 세계 각국의 카메라가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집이라 오리고기집에 가서 어느 집이 김선일 집이냐 묻기도 했었다. 당시 국무총리가 안창 마을까지 방문을 했는데 낙후된 마을의 실태를 보고 마을 개선 사업비가 내려왔다고 한다. 덕분에 도로 정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재개발 이야기
1988년부터 90년대 초까지 전기며 수도가 모두 설치되면서 마을이 더 커졌다. 구청에서 나와서 아무리 막아 봐도 올라오는 사람들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구청에서 찾은 방법은 펜스를 치는 것이었다. 마을 주변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끝을 철망으로 막아 사람들이 더 이상 산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했다. 차마 철망을 자르며 올라가 살 엄두는 나지 않아 그 이상으로는 동네가 커지지 않았다.

재개발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는 투쟁도 많이 했다.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해 줄 것인가 마냥 궁금했다. 제대로 된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으련만 공청회라고 마련한 자리에 가보면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할래? 말래?”식으로 가부만 결정하라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업자들은 수지가 맞아야 한다고 난리인데 주민들은 그나마 가진 터전마저 빼앗기는 건 아닌가 불안해서 분쟁도 많았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만 주민들 사이에 퍼져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쫓겨난다더라는 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만 늘어갔다. 이래저래 경찰서를 드나든 사람들도 꽤나 될 것이다.

주민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자세가 먼저였다면 그렇게 마음 상할 일은 생기지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형식적인 공청회로 알 수 없는 소문들이 퍼져가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좀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면 속이 상하기도 한다.

개발이라는 말은 십 수 년 전부터 나오던 말이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마다 마을로 올라와 자기가 책임지고 동네 개발을 해 주겠다 호언장담을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하나도 없다. 이제는 사람들도 뻔히 알아서 정치인 누구라도 올라와 악수 한번씩 하며 발전시키겠다 말하면 바로 면전에다 욕을 하기도 한다.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말들을 참 쉬지 않고 해댄다 싶어 욕하는 사람을 말리지도 않는다.

골목마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화재라도 발생하면 큰일이다. 마을 아래쪽은 그나마 다행인데 산 밑, 마을 꼭대기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도로가 넓지 않아 소방차가 끝까지 들어올 수도 없고, 소방 호스가 마을 꼭대기까지 닿지도 않는다. 그래서 꼭대기 부분에 불이 났다고 하면 그저 다 타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쉬운 집들이다. 개발이라도 되면 그나마 살만하게 될까 싶었지만 그것도 이제 해제되었다고 하니 아쉽다.
마을의 종교
안창 마을은 통일교 성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에서 산 쪽으로 한참 올라가다 보면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1951년 탈북 피난민으로 부산에 내려 온 문선명(文鮮明)이 수정산 아래 공동묘지 근처에서 토담집을 짓고 생활하며 경전을 집필했다고 한다. 경전 탈고 후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안창 마을이었다. 지금은 문선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생활했던 자리를 통일교 측에서 매입하여 기념관을 세워두었다. 통일교 신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성지로 기념하고 있다.

예전에는 통일교 신도들이 성지를 보러 오기도 많이 했다. 외국 사람들이 가득 마을로 올라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국인을 잘 못 보던 시절이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차가 마을까지 올라오지 않던 시절 아침부터 길이 미어지도록 올라오는 사람들 모습에 함께 따라가서 구경을 했다. 그때는 아직 통일교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군데군데 앉아가지고 세 나라 말로... 한국말, 영어, 일어로 연설을 하더라고. 막 울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 구경을 했어.”

길이 닦인 다음부터는 관광버스를 타고 성지 순례를 하러 왔다. 외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일절 그런 일이 없다. 몇 해 전부터 관광버스가 오는 경우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지가 있는 것 치고는 주민 중에 신도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워낙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마을 입구에 있는 통일 회관이 아니면 통일교에 대해선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입구부터 작은 절이 많이 있다. 보각사, 선해사, 광명사, 법천사, 천수암, 백련사, 관음사 등 작은 마을에 꽤 많은 절이 있지만 오히려 주민들은 멀리 있는 절에 다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좋은 절을 찾아 양산이며 언양까지 차를 타고 나가는 열성 신자도 꽤 있다.

마을 사람이 개척한 교회도 있다.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는 전도를 하느라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1970~1980년대 삼화고무 등 대부분의 공장이 첫째, 셋째 주 일요일만 휴무였다. 모두 맞벌이를 하는 와중에 한 달에 딱 2번 있는 휴일에는 다들 지쳐 쓰러져 쉬기 바빴다. 거기에다 첫째, 셋째 일요일이면 쉬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 보림 극장에서 쇼를 했다. ‘남진쇼’·‘나훈아쇼’ 등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락이 많아 시내로 구경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다보니 금쪽같은 휴일을 교회에서 보내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교인이 없으니 교회는 매번 자금이 없어 어려웠고, 젊은 신학대학생 목사가 주말에만 와서 설교를 하다 보니 교인들과 유대감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교회를 꾸려 나갔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교회 개척자의 아들이 장로로 활동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선교지에서 살해된 김선일의 부모님도 원래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아들의 사고 이후 마을의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부는 새로운 바람
2008년 8월 안창 마을은 재개발 정비 지역으로 고시 되었다. 재개발로 무슨 변화가 일어날까 기대하는 사람들만큼, 당장 자신들의 생활 터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도시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된 후 해마다 이곳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늘어 이제는 800여 가구만 남았다. 빈집은 늘어갔지만 사업성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재개발 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몇 년이 흘렀다. 결국 부산시는 안창 마을의 재개발 정비 구역 지정을 해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형적인 도시 슬럼화 지역으로 변해가는 안창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미술 작가들과 지역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지자체에서 공공 미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벽화를 그려주거나 조형물을 세워주기도 했다. 마을의 담장과 벽 등 외관이 바뀌자 찾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안창 마을하면 오리고기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촬영 명소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물론 주민들 입장에선 외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안창 마을에 대한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일이라 반기고 있다. 하지만 벽화를 그리고 시간이 흐르니 그린 일부가 떨어져 나가 집 외관이 오히려 더 흉물스럽게 변하는 것도 같아 걱정이다.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항상 페인트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난감하다.

최근에는 ‘산복 도로 르네상스’사업의 시작으로 동구 지역을 비롯한 이곳 안창 마을도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다. 이즈음 지역을 변화시키려는 자발적인 모임이 생겨나면서 지역 현안 문제를 주민 스스로가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행복 마을 사업으로 ‘오색빛깔 염색공방’이 들어서서 염색 수업을 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오색 빛깔 잔치 마당이 열려 주민들과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이 신나게 놀기도 했다. 지자체의 관심도 늘어가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은 마을에 직접 찾아와 의료 지원을 해주면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자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이 뜨겁다. 구청에서 나와서 자기 소유 주택뿐만 아니라 무허가 주택까지 집수리를 해주는 덕분에 환경도 한결 좋아졌다.

눈으로 보이는 사업들이 많아지면서 외지 사람들은 안창 마을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때가 많다. 재개발 사업에 힘을 많이 빼면서 불신감도 많이 생겼다. 근본적인 삶의 양식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문화며 관광이 자신들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나온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가 가지고 오는 문제들도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가 되었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이씨는 예전보다 더 바빠졌다. 안창 마을 주민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2013년 말에는 드디어 안창 마을에 마을 회관이 들어서게 된다고 한다. 이제 남은 길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작은 변화부터 함께 만들어 가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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