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et]"송조(宋朝)에서 군행(軍行)하면 반드시 절한 예(禮)에 따라 아조(我朝)의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도 전배하셨으니, 나 소자가 감히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79년 8월 3일. 동관왕묘를 찾은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백성과 군대를 살피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길을 나섰던 정조가 흥인문(흥인지문)을 지나 관왕묘(동관왕묘)에 이르러 한 이 말은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8권에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에서 관왕묘를 검색하면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에서 부터 고종(1852~1919, 재위 1863~1919)에 이르기 까지 총 448건(원문 219건, 국역 229건)의 기록이 검색 될 정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관왕묘에 대한 사안은 국가 중대사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국역기록 가운데 영조실록에 42건, 고종실록에 44건이 각각 검색되며 이 수치는 다른 임금에 비해 월등히 높다.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고종이 그 어느 임금보다 동관왕묘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한지 3년이 지난 1899년에집중적으로 동관묘를 찾는데 이 기록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던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300여 년 전, 일본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다고 믿었던 관우가 다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고종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