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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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관왕묘에 모셔진 촉한의 장수 관우의 모습. 고종은 1902년 관왕을 황제로 높이는 칭호 ‘현령소석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를 내린다.
[Korea.net]"송조(宋朝)에서 군행(軍行)하면 반드시 절한 예(禮)에 따라 아조(我朝)의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도 전배하셨으니, 나 소자가 감히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79년 8월 3일. 동관왕묘를 찾은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백성과 군대를 살피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길을 나섰던 정조가 흥인문(흥인지문)을 지나 관왕묘(동관왕묘)에 이르러 한 이 말은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8권에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에서 관왕묘를 검색하면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에서 부터 고종(1852~1919, 재위 1863~1919)에 이르기 까지 총 448건(원문 219건, 국역 229건)의 기록이 검색 될 정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관왕묘에 대한 사안은 국가 중대사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국역기록 가운데 영조실록에 42건, 고종실록에 44건이 각각 검색되며 이 수치는 다른 임금에 비해 월등히 높다.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고종이 그 어느 임금보다 동관왕묘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한지 3년이 지난 1899년에집중적으로 동관묘를 찾는데 이 기록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던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300여 년 전, 일본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다고 믿었던 관우가 다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고종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 1599년에 공사를 시작해 1601년 완공된 동관왕묘는 조선과 중국의 건축양식이 함께 적용됐다.
지하철 1호선 동묘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서울동묘공원 내에 위치한 동관왕묘는 선조 32년(1599년) 짓기 시작해 1601년 완공됐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대표하는 장수이자 후대에 ‘전쟁의 신’으로까지 추앙된 촉한의 장수 관우를 모시고 제를 올렸던 동관왕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친 이유가 관우 장군의 덕을 입었다고 생각한 명나라 왕이 편액을 보내와 세워지게 됐다.

앞면 5칸과 옆면 6칸 규모의 동관왕묘는 당시 일반적인 사당 혹은 궁궐과 다른 T자형의 구조로 건립됐다.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옆면과 뒷면에 벽돌을 쌓았다는 점인데 이는 건물의 성격상 중국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hanjeon@korea.kr
▲ 지하철1호선 동묘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만나게 되는 동묘 경내는 무료로 개방되지만 정전 내부는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다.
▲ 동관왕묘 정전 내부의 모습. 관우의 의붓아들이었던 관평과 함께 그를 따랐던 장수 왕보, 조루 등이 호위를 하고 있다.
▲ 19일 오전 동관왕묘 정전으로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다. 동관왕묘는 17세기 ‘한•중 합작 예술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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