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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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et] 먹물을 머금은 붓끝으로 한지 위에 획을 그을 때는 그 어떤 미묘한 소리도 나지 않는다.

늘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모습이 일상인 한국에서 붓글씨는 마치 고요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와도 같다. 이 목소리는 현대와 과거의 세계를 곧바로 연결해준다.

한국과 가까운 중국에서 서예의 역사는 기원전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예는 한국에 서기 200년 후반에 전해졌다. 역사학자들은 서예가 한국에서 불교의 전파를 위해 사용됐다고 말한다. 서기 600년경부터 한국에서는 시인, 승려, 학자들이 서예를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은 부산에 있는 한 바위에 서예 실력이 잘 드러난 인상적인 글귀를 새겼다. 오늘날 이곳(해운대)은 여름 휴가를 즐기러 부산을 찾는 피서객들의 명소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부산에 최치원의 걸작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 서예의 전성기는 1300년대 후반 성리학이 국가의 기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부터 시작됐다. 당시 선비들은 조선 사회의 정점 그 자체로 위상이 높아졌다. 선비들은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열렬한 서예 전도사였을 것이다. 이들은 서법을 그 어떤 기술보다 높이 평가하고 서예도구 없이는 그 어떤 곳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1700년대에 활동한 화가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은 한지 위에 글을 적는 여러 명의 선비를 그린 초상화를 그려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돋웠다. 오늘날 현대 한국인들의 시각에도 강희언의 작품은 조선시대 시대정신이 전해진다. 그의 그림에는 서예를 향한 선비의 열망이 다른 어떤 예술작품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나있다.

강희언이 살던 시대에는 그림 옆에 짧은 시나 문구 등 화려한 필체의 주석을 같이 적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뛰어난 화가들 가운데에는 훌륭한 서예가로 인정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1900년대에는 서예 분야에서 새로운 필체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 필체는 바로 간자나 번자체 한자 대신에 한글을 쓰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1900년대 초 한글 서예는 조선의 애국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한글은 특이한 문제를 가져왔다. 전형적인 중국 한자는 획으로 쓰여지지만 한글에는 원 모양이 매우 많이 있다. 이로 인해 1900년대 서예가들은 한글의 글자형태에 맞춘 특별한 붓글씨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선비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됐다. 한국의 애국주의도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서서히 조용해졌다. 혹자는 서예는 한국에서 한 물 갔을 것(obsolete)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한국은 특히 전 세계 어느 선진국보다 넓고 깊게 디지털화(化)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국의 서예는 살아있고 건재하다.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은퇴하면 정원일 같은 활동을 하며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지면 한국에서는 서예가 노인들의 소일거리로 인기 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는 정부 지원을 받는 서예강좌가 열리며 노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맑은 날 정원 나무 그늘 아래에서 붓글씨를 연습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서예의 전 과정을 명상의 한 형태로 여긴다. 서예는 서둘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먼저, 벼루 위에 물을 넣고 먹을 잘 섞고 갈아서 알맞은 비율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동물의 털로 만든 붓에 먹물을 묻히는 것인데 글을 쓰려면 이때 주의해서 적당량만 묻혀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붓글씨를 시작할 수 있다. 서예를 다 마친 뒤 일일이 정리하는 과정도 수고스러운 일이다.

인기 있는 TV드라마들도 서예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불러일으키고 있다. 몇 달 전 방영된 KBS의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도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런 작품은 특히 의상이나 소품을 역사에 충실하게 고증하려고 한다. 이 같은 작품의 주인공은 선비인 경우가 많고 서예를 연마하거나 붓글씨로 쓰인 문서를 다루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TV가 현대 생활의 활력소가 될진 모르지만, 서예에는 전통 보존과 과거 세대의 열망을 오늘날에도 계승하려는 바람이 담겨 있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서예는 한국 현대 문화의 가장 중심부에서 누구나 원하는 영예를 계속 누릴 것 같다.
영국 출신 팀 알퍼씨는 한국에 살며 작가 겸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 윤소정 코리아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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