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목단강지역 독립운동유지 보존회 | 노경래 회장
1909년 이상설 선생과 이승희 선생이 한흥동 한인기지촌을 건설한 이래, 중국 미산(밀산)시에는 한인들이 몰려들었다.
맹고군 저 미산시 부시장 등이 공동으로 저술한 <밀산조선족백년사>는 이에 대해 "1909년 한흥동이 건립된 이후로 한흥동에는 빈곤한 조선인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었다"고 기술한다.이렇게 유입된 한인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1936년에 밀산의 거주민은 2만5,088호이고 인구는 15만483명이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2,650호이고 인구는 1만1,730이다"(밀산조선족백년사)
새로이 유입된 한인들은 곳곳에 정착해 한인촌을 형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논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생활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밀산조선족백년사에는 "거개가 자체로 토지를 개간할 능력이 없고 해마다 재해로 생활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다"고 기술돼 있다.
이상설, 이승희 선생의 한흥동 기지촌 건설 이후 이곳 미산시는 독립운동의 거점기지로 변한다. 1910년 안창호 선생 등이 활동한 신민회가 이곳에 '십리와' 한인 기지촌을 건설한다. 1910년 홍범도 장군도 합류해 한인 학교를 세우고 무관한교까지 세웠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농민들과 함께 논을 일구고 교육을 통해 독립 운동의 기초를 다진다. 이곳에 정착한 한인들은 다른 민족과 달랐다. 옥수수와 밀 등을 주식으로 하는 여타 민족과 달리 한인들은 이곳에서도 유독 벼농사를 고집했다.
이상설 선생과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선택한 미산은 150년 전만 해도 인가가 없었다. 맹고군 전 미산시 부시장은 "미산은 1889년까지 청나라 황실의 사냥터였다. 그래서 이곳엔 아무나 못 들어왔다. 1989년 산동반도에서 한족이 이주를 와 농사를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현재의 미산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상설 선생은 왜 미산시를 선택했을까? 맹 전 부시장은 "미산은 봉밀산과 항카이호(흥개호)가 있다. 항카이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담수호수다. 봉밀산의 봉은 꿀벌을 가리키는 한자다. 가을이면 저 산에 벌이 많아 꿀이 흘러내렸다고 해서 봉밀산이라고 부른다. 땅이 비옥하고 항카이호가 있어 물이 많아 벼 농사 짓기에 딱 좋은 곳이다. 거기에다 조선 국경과 거리가 있어 일본군의 기습을 피할 수 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사시 러시아로 피할 수 있어 무장투쟁기지로 적합한 곳"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