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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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목단강지역 독립운동유지 보존회 | 노경래 회장
“우리가 토론한 게 순직지 기념비와 항일투쟁 유적지비, 어느 것이 더 큰가? 순직지 기념비가 큰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 유적지비가 크다, 서일이 여기 지구에 와서 항일투쟁을 했다. 그 지구를 당벽진을 대표해서 여기다 세웠다.”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부시장을 지낸 맹고군 선생과 밀산시 국장을 지낸 채명군 선생은 6월 24일 밀산시내에서 흥개호로 가는 당벽진 대로변 우측에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비석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산동성에서 가져온 통돌로 만든 비석은 성인 키보다도 높고, 뒷면에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내용을 새기느라 가로 길이는 두 배로 늘었다.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맹고군 전 부시장은 “몇 십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아니 해놓으면 다 없어진다”며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진입로 닦고 주차장 만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11월에 먼저 오고, 이 분(김교헌)은 21년 연말에 오고...”밀산 당벽진은 대종교 총본사가 두 차례 자리한 곳으로, 청산리 대승 직후인 1920년 12월 피난하듯 이곳으로 들어와 1922년 4월 영안현 남관으로 옮길 때까지, 그리고 역시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거셀 때인 1928년 1월 16일부터 1935년 6월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갈 때까지가 그 기간이다.

“책 쓰느라 연구를 많이 했다. 2007년에 리창섭 영감이라고 하얼빈에서 직접 모셔왔다. 14살에 여기를 떠나 다 안다. 학교 마당에서 운동회도 했다하고 자연도랑이 있다고 했다.”

맹 전 부시장은 『밀산 조선족 인물』을 집필 중이며, 그 중 제 1부는 ‘한국독립운동시기 인물’로서일, 이상설, 안창호, 이승희, 윤세복, 홍범도, 권상익 7인을 다루고 있다.

“윤세복이 있을 때 여기서 밀산지구 조선족들 운동회를 했는데, 어떤 촌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쌀을 메고, 걸어서 여기 왔다. 태극기를 걸고 노래를 부르고, 신기했다는 거다. 흥개호 제일 동쪽에서 사람들이 조직해서 쌀을 메고 왔다.”

식량을 싸들고 사흘을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총본사 옛터는 지금 집단농장에 소속된 농토지만 재개발을 기다리는 탓인지 폐허지로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했다.

“우리가 토론한 게 순직지 기념비와 항일투쟁 유적지비, 어느 것이 더 큰가? 순직지 기념비가 큰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 유적지비가 크다, 서일이 여기 지구에 와서 항일투쟁을 했다. 그 지구를 당벽진을 대표해서 여기다 세웠다.”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부시장을 지낸 맹고군 선생과 밀산시 국장을 지낸 채명군 선생은 6월 24일 밀산시내에서 흥개호로 가는 당벽진 대로변 우측에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비석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산동성에서 가져온 통돌로 만든 비석은 성인 키보다도 높고, 뒷면에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내용을 새기느라 가로 길이는 두 배로 늘었다.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맹고군 전 부시장은 “몇 십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아니 해놓으면 다 없어진다”며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진입로 닦고 주차장 만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맹 전 부시장 등이 밀산시인민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건립한 백포 서일 기념비는 외지 동포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지난해 완공됐지만 아직 진입로나 주차장 등 주변 정비사업을 위한 추가 재정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맹 전 부시장 등 이 지역의 뜻있는 조선족들은 백포 서일의 기념비 뿐만 아니라 홍범도 부대가 3년간 머물렀던 십리와에 2009년 ‘십리와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건립했고, 1909년 최초로 조선인 항일기지를 꾸렸던 한흥동 마을에도 밀산시로부터 기념비 건립 승인을 받아둔 상태다. 역시 건립 기금 확보가 남은 숙제다.

이곳이 옛날에 당벽진 중촌 마을이 있던 곳이다. 중촌 마을로 강이 흘렀다. 총본사가 1920년 11월에 먼저 오고, 이 분(김교헌)은 21년 연말에 오고...”밀산 당벽진은 대종교 총본사가 두 차례 자리한 곳으로, 청산리 대승 직후인 1920년 12월 피난하듯 이곳으로 들어와 1922년 4월 영안현 남관으로 옮길 때까지, 그리고 역시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거셀 때인 1928년 1월 16일부터 1935년 6월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갈 때까지가 그 기간이다.

“책 쓰느라 연구를 많이 했다. 2007년에 리창섭 영감이라고 하얼빈에서 직접 모셔왔다. 14살에 여기를 떠나 다 안다. 학교 마당에서 운동회도 했다하고 자연도랑이 있다고 했다.”

맹 전 부시장은 『밀산 조선족 인물』을 집필 중이며, 그 중 제 1부는 ‘한국독립운동시기 인물’로 서일, 이상설, 안창호, 이승희, 윤세복, 홍범도, 권상익 7인을 다루고 있다.

“윤세복이 있을 때 여기서 밀산지구 조선족들 운동회를 했는데, 어떤 촌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쌀을 메고, 걸어서 여기 왔다. 태극기를 걸고 노래를 부르고, 신기했다는 거다. 흥개호 제일 동쪽에서 사람들이 조직해서 쌀을 메고 왔다.”

식량을 싸들고 사흘을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총본사 옛터는 지금 집단농장에 소속된 농토지만 재개발을 기다리는 탓인지 폐허지로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했다.

백포의 최후, “전신에 한 점의 창흔도 없다” “봄에 풀이 나기 전에 밭갈이를 해놓으면 흙색이 다르다. 군데 군데 집자리가 있던 곳은 다르다. 풀이 난 다음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1921년 당시 백포가 농사와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며 머물렀던 마을은 1940년대 일제의 집단부락 정책으로 모두 논으로 변해있고, 백포가 숨을 거뒀다는 마을과는 떨어져 있는 뒷동산만 무심히 푸르렀다. 지금은 거대한 민물호수인 흥개호 관광단지의 배후 풍경일 뿐이다.

맹 전 부시장은 “토비들이 습격하는 그때 서일 장군은 이 마을에 없고 이 주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포교사업을 하고 있었다”며 “지금은 인공수풀이지만 이 산 자연수풀 안에 들어가서 순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래 조선 사람은 묘지가 저 뒤 산에 었다. 거기에 안장했다”고 먼 곳을 가리켰다.

아울러 “여기서 멀지 않은 한흥동 조선족 촌이 유명하다. 3개 촌이 있고, 저 위에 올라가면 권씨네 자연마을이 있다. 이런 마을들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린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13개의 독립군 부대는 일제의 압도적 무력을 피해 러시아 국경지대이자 물산이 풍부한 밀산으로 모여들었고, 3,000여 병력은 한국독립군단으로 통합하고 백포 서일을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많은 독립군 부대원들이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고 좌절하게 되며, 일부 부대원들은 다시 밀산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러시아로 가지 않고 밀산 당벽진에 머물고 있던 백포는 뜻밖의 비극적 사건에 휘말렸다.

중국 조선족 리광인과 김송죽은 『백포 서일장군』(민족출판사, 2015.6.)에서 반일독립군이 밀산 대지주 송곰보를 약탈했고 앙심을 품은 송곰보가 청보산 토비를 끌어들여 1921년 8월 26일 밤중에 당벽진을 들이쳐 대살육전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자유시사변과 당벽진 토비 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은 백포는 1921년 8월 27일 오전 밀산현 당벽진 마을 뒷산의 산림 속에서 스승인 홍암 나철의 유서 한구절을 읆조리면서 조천했다는 것이다.

“귀신이 수파람(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한울.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뱀이 먹고 돼지가 뛰어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즐벅 하도다. 날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대종교 측은 “조천 익일의 강우(降雨)에도 착의에 젖은 흔적이 없었고 시와(屍臥) 6일간에 잡충(雜虫)의 범함도 없었으니 과연 종사는 천종(天縱)의 철인(哲人)으로 신우(神佑)의 대총(大寵)을 입어 반진(返眞) 조천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포의 시신은 며칠 후에야 뒷동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1921.12.6)은 “몸가진 개체 자아에서 겨레를 수호하는 호국영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삼일신고 최고의 수련법인 조식법으로 조천을 하신 것이다”라고 전했다. 홍암 나철과 같이 폐기 절식(閉氣 絶息)으로 순교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기록에는 “서일이 외출한 채 돌아오지 않은 결과 음력 9월 9일(외출한지 12일째)에 쾌상봉 벽리라는 산골에서 사체를 발견하였다. 사체를 검사해보니 전신에 한 점의 창흔도 없다”고 돼 있다. 물론 “미루어 보건대 음독자실을 시도한 것 같다”라든지“오히려 죽어 명예를 후세에 전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 자살한 것이라는 별보가 있다”는 부정적 의견도 덧붙였다.(「元大韓軍政署 總裁 徐一의 死亡에 관한 건 (1921. 11. 27)」)백포 서일의 죽음을 두고 아직도 토비 습격시 피살, 음독 자살, 스스로 숨을 멈춘 폐기 절식 등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없고 며칠 후에야 발견됐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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