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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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0일, 남도 여행에 나섰다.

화려했던 10월이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저물어 가고 있다. 가을은 만추로 깊숙이 들어가는 셈이다. 이런 계절에 어디로 떠나 볼 것인가? 중국의 지도를 펴고 이곳 저곳을 눈요기했지만, 막상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내 고향 근처는 어떤가? 불현듯 홍도, 흑산도가 섬광처럼 머리 속을 스친다.

그렇다... 그곳으로 떠나 보자. 가는 김에 지리산 피아골 단풍도 오지게 들여다 보고, 순천 습지라는 곳에 가서 갈대의 순정도 마음으로 느껴 보고, 유달산에서 목포의 눈물도 흥얼거려 보고, 그리고 배를 타고 홍도, 흑산도를 다녀 오면, 결코 손해 보지 않을 만큼의 여행이지 않겠는가?

10월 29일, 베이징을 출발하여 김포에 도착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익산으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라 KTX 좌석 사정이 여의치 않아, 먼저 익산까지, 그리고 익산에서 구례 구로 가는 여정이다. 오랜만에 아들과 기차를 타고 차창에 스치는 가을 풍경을 즐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꽤 괜찮은 여행의 조각이다.

둘째 놈은 대화하기에 꽤 괜찮은 놈이다. 그 놈이 학창 시절, " 너도 장학금 받으면 좋지 않니?" 라고 말했더니 그 놈 왈, "왜, 난들 장학금을 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안되니까, 그러는 거죠. 그런데 아버지도 학창 시절에 받지 못했다면서요? "라고 반발하면서 "나도 아버지처럼 아르바이트 해서 용돈 벌께요."라고 너스레를 떨던 놈이다.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 인생의 이런저런 뒷얘기를 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익산까지만 동행이다.

익산에서 구례 구 행 기차를 바꿔 타고 본격적인 혼자 여행을 떠났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가장 자연스러운 여행의 과정이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여행을 떠나고, 혼자 즐긴다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쏠쏠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그럼 가족은? 집 사람은? 다 각자 즐기는 방법이 있다. 집사람은 일년에 한 두 번씩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고상한 여행을 희망하고, 훌륭하게 동행 해 주면 최고다. 자식들이야 각자 좋을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구례 구 역전은 구례군이 아니다. 그냥 구례군의 입구라는 뜻의 이름이다.

행정구역상 순천시 끝 단 이라고 한다. 구례 구에서 택시를 타고 약 10분, 6킬로를 가다 보면 구례군 읍소재지가 나온다. 정다운 도시 구례군...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서 학창 시절, 광양에서 직장 시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걸쳐 얼마나 자주 출몰하였던가? 그런데 중국으로 떠난 지 23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방문한 셈이다. 반갑고도 반갑다. 10월 마지막 밤 하늘엔 하얀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빛나고, 살가운 가을 기운은 나그네의 심사를 숙연하게 하고 있다.
10월 30일 아침, 피아골을 향해 군내 버스를 탔다.

구례 읍에서 피아골행 버스는 약 1시간 단위로 있다. 월요일인지라 손님은 뜸했다. 손님 숫자 10명 남짓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피아골을 향해 떠나는 객이다. 버스 마지막은 직전 리가 종점이다. 그냥 내려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피아골의 모습은 올 가을의 종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온 천지가 붉게 타 오르고 있다.

피아골은 왜 피아골인가? 왠지 마음이 아려 오지 오지 않는가?

피아골이란 피 밭(직전)이 많아서 '피 밭 골'이란 이름이 생겼고, 이것이 변해서 '피아 골' 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한말 격동기. 여순 반란 사건, 6.25전쟁 등 나라의 큰 전쟁을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격전으로 백성의 핏물이 냇가에 흥건했다고 하니, 아! 슬프고도 슬픈, 이름하여 피아 골이다.

피아골의 가을은 화려하다. 특히 10월말, 11월초의 피아골 단풍은 온통 벌겋다. 단풍이 이렇게 붉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피아 골 단풍에 답이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벌겋다. 빨간 색깔의 진수를 자연의 스펙트럼으로 확실하게 느껴 볼 수 있다.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 바라다 본 단풍의 색깔이 과연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담을 수 있을 지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단풍은 아름답다.

아! 이제 피아 골의 단풍은 절정이다. 온 천지가 붉기만 하다. 단풍 색깔이 이렇게 붉을 수 있는 것일까?

피아골 계곡 길 시냇가를 따라 걷는 단풍 길은 가히 천외 천(天外 天)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푸르기만 하고, 가끔씩 불어 오는 가을 바람은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파란 하늘 밑에 피아 골 냇가를 따라 얼기설기 피어나는 붉고 노랗게 피어나는 단풍의 모습은 천상천하(天上 天下)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자연미의 표시다.

피아골의 여정은 직전 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 약 5.5킬로미터, 그리고 약 2킬로미터를 더 가게 되면 지리산 능선을 따라 흐르는 반야봉과 노고단으로 헤어지는 임걸령 3거리 고지에 다다르게 된다. 2킬로미터 정도야 금방 가고 나서 점심을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아! 그런데 그 2킬로미터는 그냥 2킬로미터가 아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 한참을 가고 나서 남은 길은 길은 1.5킬로미터, 그리고 한참을 가고 나도 남은 길은 1킬로미터... 아! 인생길이 이렇게 길고 고달프단 말인가? 그리고 마음을 여유롭게 다 잡고 주변의 경치에 마음을 즐기면서 올라 가기를 한참 동안, 그런데 아직도 이정표는 500미터가 남았다. 이정표가 맞기나 하는 건가? 길기도 하여라. 500미터...

약 2시간이 지나서 임걸령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지리산 주 봉의 능선에 올라선 셈이다. 피아골 계곡을 걸어오면서 단풍의 모습을 변해가고 있다. 6부 능선까지는 단풍이 붉다 못해서 벌겋기만 하였고, 7부 능선 이상에서는30%이상이 단풍이 졌으며, 8~9부 능선 이상에서는 거의 모든 단풍이 떨어지고 퇴색되어 낙엽의 잔재만 앙상하였다.

임걸령에 도착하여서 배낭 속에 준비된 소주 한잔, 과자 몇 개로 허기를 달랬다.

지리산 주 능선 길은 이제 단풍은 사라졌다. 단풍 대신 피어나는 억새풀과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쏴한 분위기가 산 능선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노고 단까지는 2.8킬로미터, 거리는 길어 보이지만 평지로서 불과 40분이면 당도한다. 피아 골 그 곳에 비하면 그냥 날고 싶은 곳이다. 세상에 나쁜 것 만은 없는 것이다. 그 고생 끝에 올라 왔기 때문에 남은 여정은 가마를 타지 않았지만, 그냥 훌훌 날을 것 같다.
노고 단, 몇 년 만이던가?

둘째 놈 얻고서, 이름을 구하고자 노고 단 줄기를 헤 멨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노고 단은 해발 1507미터로서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국모 신으로 모시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노고 단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노고는 순 우리말로 '할미' 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고 단을 유람하고 약 3킬로 정도 걸어서 성삼 재 휴게소로 하산했다. 구례 읍까지 가는 버스는 이곳에 가야만 탈수 있다. 휴게 소에 도착하여 라면에 3년 묵은 배추 김치와 소주 한잔으로 허기를 때운다. 아! 여행은 고생과 불편함이 따라야 한다. 뭔가 부족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필수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된다면 여행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오후 6시에 구례 읍에 도착했다. 이제 나그네는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야 한다. 다음은 순천 습지다.

내일 날씨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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