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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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가을은 왠지 쓸쓸하다.

특히 서산에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 오는데 추수를 끝낸 논에서 볏짚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나면, 여행길의 나그네 심사는 왠지 더욱 심란해지곤 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저녁 6시 반에 구례 읍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시로 향했다. 차 안에서 잠시 졸고 나니 금방 순천이라고 한다.

순천은 한때 그곳에서 3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아래 시장 골목 터에서 2층 집 사글세를 얻었고, 집사람은 여수로 나는 광양으로 출퇴근한 인연이다. 순천 떠난 지 어언 25년이 지났건만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조용한 문화 도시로서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다. 아니다. 참 ‘세계 5대 습지’로 자리매김한 '순천만 습지'가 그 후 새로 개발되었고 전 국민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서 습지를 보러 이렇게 오게 된 것이다.
2017년 10월 31일, 아침 일찍 순천만 습지로 향했다. 짐은 여관에 잠시 맡겨 두었다.

순천만 습지로 향하는 시내 버스는 66번, 67번 두 대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순천만 습지로 향하는 관광객은 외국인을 포함해서 여럿 보였다. 과연 습지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

순천만 습지는 시내에서 약 20여 분, 순천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저 그런 평범한 바닷가에 갯벌을 활용하여 낙지, 짱뚱어, 각종 게를 잡아서 시장에 팔고 생활을 연명하는 그렇고 그런 작은 어촌의 하나였으나, 2003년 습지 보호 지역으로 선정되고, 2006년에는 람사르 협약 등록 지역으로, 2008년에는 결국 국가 재정 문화재 명승 제41호로 선정되면서 명실상부한 습지의 명소로 바뀌게 되었다.

순수한 의미의 지자체가 자기 고향의 특색에 맞는 아이템을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임에 틀림없다.
순천만 습지는 하염없이 걷기에 최적인 곳이다. 가족과 함께 우우 거리면서 이것저것을 기웃거려 가면서 애기를 안고 업고 가도 좋은 곳이며, 연인끼리 조용히 잡을 듯 말 듯한 손잡이로 은근히 갈대 길을 걸어도 운치가 있으며, 속없는 나그네 한 명이 불어오는 샛바람 맞으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보다가, 저 멀리 바닷가에서 ‘끼욱끼욱’ 울어 대는 갈매기 소리에 젖어 보거나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에 마음을 같이 놔 버려도 좋기만 한 산보 길이다.

산보는 바쁜 마음으로 걷게 되면 즐거움이 덜하다. 산보의 마음은 목표도 목적도 없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빈 마음에 본인의 취향에 걸맞은 묘한 즐거움이 새록새록 차게 되는 것이다. 순천만은 산보하기에 딱 맞는 곳이다.

순천만 습지를 산보하다 보면, 잃어버렸던 어릴 적 추억의 밭을 다시 갈 수가 있다. 온몸이 갯벌에 빠지면서 한 마리 뻘 게, 낙지, 다슬기, 망둥이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난다. 그리고 여름이면 항아리에 가득 담아서 간장과 함께 끼니를 때웠던 꽃게의 추억이, 순천만 습지에서는 갯벌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갯벌의 뽀글뽀글 피어나는 구멍을 통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망둥이와 게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이미 갯벌 속에서 헤매고 있다.

순천만 습지에는 겨울이면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 부리 저어 새, 큰 고니, 검은 머리 물 떼 새 등 국제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철새 희귀 종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순천만 습지에 찾아오는 철새의 종류는 무려 230여 종이라고 한다. 겨울 어느 날 습지에 오게 되면 온 천지의 철새들이 하늘을 메울 것이다.
10월 말의 순천만 습지는 갈대 숲의 향연이다.

진한 갈색으로 단장한 잎사귀와 온몸에 하얀 수염으로 단장하고, 불어오는 바다 바람에 춤을 추고 있는 갈대는 '갈대의 순정'이 맞다. 험악한 세상에서 유연하게 살아 보고자 하는 소시민의 융통성이다.

순천만 습지의 뒷동산 용산에 올라가면 순천만의 정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조류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썰물 밀물의 경치가 대비되고, 저 멀리 남도 외딴섬의 아련함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어디론가 조업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고깃배의 모습은 따뜻한 고향집의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모습이다.
순천만 습지에는 순천 문학관이 있다.

순천의 문학인, 정채봉 선생과 김승옥 작가의 기념관이다. 초가 지붕으로 아담하게 단장한 기념관의 내용은 동화 작가로서 동심과 같이 살다 세상을 떠난 정채봉 선생의 모습이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아직도 활동 중이신 중견 작가 김승옥 님에 대한 이런저런 모습과 대표작 '무진 기행'의 뒷얘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순천만 습지에는 갈대와 시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지역 출신 시인들의 '순천만 모습'에 대한 각종 그리움을 담은 시가 갈대 바람에 살갑게 외부인을 맞이하고 있다. 시 한 수 소개한다.

순천만 배 영숙 시인

비 내린 순천만은
여린 농부의 애간장으로 수런하다.

바다를 가지 못한 빗 줄기는
갈 꽃을 물리고 나서야

주름살처럼 깊게 팬
골을 따라 바다로 가고

철새들의 페로몬 냄새에
화냥년이 미친다는 갈대 숲은

칼날로 제 몸 찍어 내어
마알간 눈물 비 만들어 내도

강 소주로 시름 달랜 발길 끊이지 않아
순천만은 혼자서 혼자서 운다

순천만 습지의 산보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산보를 마치고 인근 음식점에서 짱둥어 탕 한 그릇, 돌게 무침, 청각, 미역 무침에 순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순천 대봉 홍시 한 개 입안에 한입 가득 물고 나면, 순천만 여행은 끝이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종점, 꿈에 그리던 홍도 흑산도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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