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룡 의병장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남단에 위치한 콴덴(寬甸)을 찾았다. 이번 대장정에 동행한 조선족 출신 향토사학자 전정혁 선생은 “이번 여정에서 반드시 가 봐야할 곳이 있다”며 취재진을 콴덴의 한 저수지 근처로 이끌었다. 그 저수지 주변에 이진룡 장군의 의열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 정부가 세운 양세봉 장군 흉상에 향토사학자 전정혁 선생이 참배를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100여년 전 콴덴 주민들이 세운 이진룡 장군 의열비(오른쪽)와 그의 부인 우씨의 열녀비.
그곳은 지난 2012년 이진룡 장군의 후손들이 중국 정부의 비준을 받아 기념원으로 조성했다. 기념원 입구엔 이진룡 장군의 행적과 사적지임을 알리는 거대 비석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 비석을 지나 오르막길에 오르자, 이진룡 장군을 기리는 의열비가 우뚝 서 있었다. 옆에는 이진룡 장군의 순국 소식을 듣고 자결한 그의 부인 우 씨를 기리는 일종의 열녀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대륙의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주변 풍경이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누군가 기념원 주변에 새하얀 종이꽃들로 아름답게 장식을 해놨던 것. 자못 장관이었다. 전정혁 선생은 “이 꽃들은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 장식한 것”이라며 “이외에도 인근 학교에선 격년마다 이진룡 장군을 기념하는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그만큼 이진룡 장군에 대한 이곳 콴덴 주민들의 존경심과 사랑은 대단하다”라고 치켜세웠다. 이진룡 장군의 열사비도 1918년 일제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이듬해 콴덴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세운 것이었다. 도대체 이곳 콴덴 주민들은 왜 이 조선인에게 100년이 다 되도록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는 것일까.
1879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진룡 장군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의병을 일으킨 곳은 자신의 고향 평산이지만, 후에는 그 활동 무대를 강원도 철원, 평강, 황해도 배천 등으로 넓힌다. 이 장군의 부대는 1910년 일제의 주요 전략물자 교두보였던 경의선 철로를 파괴하는 등 그 용맹을 전국에 떨쳤다. 이에 일제 역시 그를 잡고자 혈안이 됐다.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그는 결국 1911년 자신의 지휘권 전부를 동료에게 넘겨준 채,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 주요 근거지가 바로 이곳 콴덴이었다. 콴덴에서도 그는 애국청년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 포수단을 조직해 의병활동을 꾀했다. 무엇보다 곳곳에 분산돼 있었던 반제 무장 세력들을 규합해 국내 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의 용맹함은 이국땅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이진룡 장군의 힘과 체력은 그를 쫓던 일본군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이진룡 장군의 발바닥에 ‘짐승의 털’이 달려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험난한 길을 무수히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는 그의 근력과 강철 체력 때문이었다. 의병장 말년엔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 그는 신변을 숨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진룡 장군은 인적이 드문 산촌으로 몰래 들어가 오랜 기간 잠복해있었다.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잡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이진룡을 잡아보겠다는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임곡이라고 하는 조선인이었다. 임곡은 사람의 맥을 잘 짚었다. 마을 곳곳을 다니며 의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정보를 수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의술에 능통한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곡은 결국 작은 산촌에 신분을 숨긴 채 은거하던 이진룡 장군을 찾아내고야 만다. 일제의 주구 임곡의 밀고로 이 장군의 드라마틱한 삶도 막을 내린다. 임곡의 첩보를 접수한 일본군은 1917년 이진룡 장군을 체포한다. 이 체포 순간에도 이진룡 장군은 워낙 힘이 장사였던 탓에 일본군 10여 명이 달라붙어 겨우 포박했다고 한다. 이듬해 평양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그의 부인 우 씨는 남편을 따라 곧 자결했다.
그의 용맹함은 그가 죽고 나서도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전정혁 선생에 따르면 20년여 전, 이진룡 장군의 의열비 주변에 도로공사가 진행됐는데, 한 인부가 의열비에 손을 댔다가 공사장 폭발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인부가 억지로 의열비를 옮기려 했기에 노한 이진룡 장군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부터 어느 누구도 그 의열비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중국인에게 용맹한 명장을 넘어 영험한 존재로까지 추앙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