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전쟁 중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던 김구와 안중근
흥미로운 것은, 서두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동학전쟁 중에 동일한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다는 사실이다. 김구가 이끄는 동학군 부대가 해주 서쪽의 회학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청계동에서는 안태훈·안중근의 민병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김구와 안중근이 가까운 거리에서 상호 대치했던 것이다.
만약 양측이 그대로 충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시한 적은 상대도 하지 않고 굵직한 적장만 골라서 저격하는 안중근. 두 부대가 격돌했다면 안중근의 사격 솜씨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양측의 충돌은 뜻밖의 방법으로 '무산'되었다. 민병대장 안태훈이 밀사를 보내 비밀 협정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부대와 김구의 부대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백범일지> 상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안태훈)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相距)이니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안태훈은 김구 같은 유능한 청년을 죽이기 싫어서 비밀협정을 제안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김구 부대와의 충돌을 두려워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안태훈 부대는 70명 정도로 구성된 데 비해, <백범일지> 상권에 따르면 김구 부대는 포수만으로도 7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김구 입장에서는 가급적이면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안태훈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고려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구가 안태훈의 제의를 수용함에 따라, 김구와 안중근의 정면충돌은 다행히 '무산'되었다. 양측은 다른 전투현장에서는 열심히 싸우면서도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비밀협정을 준수했다. 김구와 안중근이 그대로 격돌했다면, 한국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동학군이 패배한 뒤에 김구는 안태훈의 도움을 받아 청계동에서 4~5개월 동안 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강제되면서 김구와 안중근 집안의 관계는 파탄나고 말았다. 단발령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김구의 제안을 안태훈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이 가망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깎는 게 나쁜 일도 아니니 지금은 천주교를 열심히 신봉하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의거를 일으키자는 게 안태훈의 답변이었다. 거절당한 김구의 마음속에서는 동학전쟁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비록 상호 충돌은 피했지만, 자신과 안중근 가문이 한때나마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김구의 기분이 <백범일지> 상권에 기록되어 있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단발령에 맞선 투쟁에는 몸을 사리는 안태훈의 태도를 보면서, 안중근 집안을 바라보는 김구의 시선은 확 달라졌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김구가 청계동을 떠났음은 물론이다. 동학전쟁 당시 비밀협정을 맺기 이전의 '상놈 대 양반'의 관계로 되돌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