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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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목단강지역 독립운동유지 보존회 | 노경래 회장
대표적인 애국운동가들인 김구와 안중근. 이들은 겨레와 나라를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마터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들이댈 뻔했다.

한국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두 인물이, 그것도 같은 황해도 해주 출신인 두 인물이 계층적 갈등 때문에 상대방의 가슴에 총을 겨눌 뻔했던 아슬아슬한 장면. 그 장면을 살펴보기 전에, 두 사람이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점부터 확인해보자.
▲김구(앞줄 중앙)와 안미생(뒷줄 중앙).
'판에 박힌 상놈'이었던 김구
김구(1876~1949)의 자서전인 <백범일지> 상권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황해도 해주에서 국유지를 경작하는 일종의 소작농이었다.

그는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평민)"이라고 했다. 물론 족보에는 12대 할아버지 때까지는 명문가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백범일지>에 따르면 사실상 11대 할아버지 이후로는 대대로 '상놈'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점을 보면, 김구가 서민 출신의 애국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양반은 아니었다.

혹시 이 대목에서, 김구가 17세 때 과거시험에 응시한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양반이 아니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반이란 것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관습적 개념이었기 때문에, 법제상으로는 양반이니 평민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이는 대한민국 법률에 '피지배층과 지배층'이니 '서민층과 특권층'이니 하는 개념을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그저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따른 직역별 혹은 직업별 차등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상놈'들 중에도 경제력과 학습능력과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학교 건립할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자란 안중근
안중근(1879~1910)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그는 현감 출신의 유명한 자선사업가인 안인수의 손자인 동시에 진사 출신의 지식인인 안태훈의 아들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이 가문은 1906년 3월 평안도 진남포(지금의 남포직할시)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양옥을 구입하고 삼흥학교·돈의학교를 건립할 정도로 매우 부유했다. 이 무렵 안중근은 평양에서 광산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기고 좀더 커서는 총을 좋아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류층 자제들과 달랐지만, 안중근은 경제력과 지위와 명예를 모두 갖춘 양반가문의 아들이었다. 이런 프로필을 보면, 그가 특권층 출신의 애국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평소에 황해도 해주 땅에서 김구와 안중근이 만났다면, 그 장면이 어땠을까? 김구가 세 살 많기는 하지만, 나이란 것은 본래 동일한 신분 안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황해도에서 손꼽히는 양반가문의 자제인 안중근 앞에서는 김구뿐만 아니라 김구의 할아버지라도 일단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조선왕조가 평화롭게 굴러갔다면, 김구와 안중근의 관계는 평생토록 그러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운명을 갖고 태어난 두 사람은 구한말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상호 적대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김구는 서민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인 동학농민전쟁(1894)에 참여했고,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는 민병대 활동에 참여했다. 김구와 안중근이 '친(親)서민 대 반(反)서민'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들은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적극적 주모자'로 활약했다. 19세의 김구는 동학교주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책임자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16세의 안중근은 민병대장인 아버지 밑에서 정찰특공대를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10대들이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10대 후반은 오늘날의 20대 후반에 맞먹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거기에다가 김구의 경우에는 리더십(조직력·언변·친화력)과 함께 열정이 출중했고, 안중근의 경우에도 리더십(양반신분·전투력 등)과 함께 열정이 탁월했다.

또 평시와 달리 격변기가 되면 나이·경제력·지위·학력 같은 요소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전쟁 당시에는 두 청년이 조직을 이끈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동학전쟁 중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던 김구와 안중근
흥미로운 것은, 서두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동학전쟁 중에 동일한 전투 현장에서 충돌할 뻔했다는 사실이다. 김구가 이끄는 동학군 부대가 해주 서쪽의 회학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청계동에서는 안태훈·안중근의 민병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김구와 안중근이 가까운 거리에서 상호 대치했던 것이다.

만약 양측이 그대로 충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시한 적은 상대도 하지 않고 굵직한 적장만 골라서 저격하는 안중근. 두 부대가 격돌했다면 안중근의 사격 솜씨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양측의 충돌은 뜻밖의 방법으로 '무산'되었다. 민병대장 안태훈이 밀사를 보내 비밀 협정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부대와 김구의 부대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백범일지> 상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안태훈)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相距)이니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안태훈은 김구 같은 유능한 청년을 죽이기 싫어서 비밀협정을 제안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김구 부대와의 충돌을 두려워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안태훈 부대는 70명 정도로 구성된 데 비해, <백범일지> 상권에 따르면 김구 부대는 포수만으로도 7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김구 입장에서는 가급적이면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안태훈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고려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구가 안태훈의 제의를 수용함에 따라, 김구와 안중근의 정면충돌은 다행히 '무산'되었다. 양측은 다른 전투현장에서는 열심히 싸우면서도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비밀협정을 준수했다. 김구와 안중근이 그대로 격돌했다면, 한국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동학군이 패배한 뒤에 김구는 안태훈의 도움을 받아 청계동에서 4~5개월 동안 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강제되면서 김구와 안중근 집안의 관계는 파탄나고 말았다. 단발령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김구의 제안을 안태훈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이 가망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깎는 게 나쁜 일도 아니니 지금은 천주교를 열심히 신봉하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의거를 일으키자는 게 안태훈의 답변이었다. 거절당한 김구의 마음속에서는 동학전쟁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비록 상호 충돌은 피했지만, 자신과 안중근 가문이 한때나마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김구의 기분이 <백범일지> 상권에 기록되어 있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단발령에 맞선 투쟁에는 몸을 사리는 안태훈의 태도를 보면서, 안중근 집안을 바라보는 김구의 시선은 확 달라졌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김구가 청계동을 떠났음은 물론이다. 동학전쟁 당시 비밀협정을 맺기 이전의 '상놈 대 양반'의 관계로 되돌아간 것이다.
2가지 계기에 힘입어 상호 우호적 관계로 바뀌다
이렇게 해서 자칫하면 평생 악감정만 남을 뻔했던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관계. 하지만 이 관계는 2가지 계기에 힘입어 상호 협력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하나는 김구 자신의 자각이었다. 안중근의 경우에는 죽기 직전에 집필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에서 동학군에 대한 변치 않는 증오심을 표출했지만, 김구의 경우에는 1896년에 일본인 살해혐의로 인천감옥에 투옥된 이후 <태서신사>나 <세계지지> 같은 중국 서적을 통해 서양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안중근 가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백범일지> 상권에 따르면, 그는 지난날 자신이 안태훈과 절교한 것이 잘못이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주권 상실이었다. 한때는 상호 적대적이었던 김구와 안중근 집안은 외세에 주권을 빼앗기면서부터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끈끈한 유대를 과시했다.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김구가 참여한 임시정부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했고, 김구는 중일전쟁(1937~1945) 당시 일본군이 중국 동남부를 점령하자 그곳에 있는 안중근의 미망인을 구출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안중근의 조카딸인 안미생은 김구의 비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구의 아들인 김인과 결혼까지 했다. 줄리엣과 로미오가 될 수도 있었을 안미생과 김인의 결합은 두 집안의 공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 적대적이었던 김구와 안중근 집안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해피엔딩을 이루었다.

사회통합능력을 상실한 조선 사회는 동학전쟁을 계기로 '친서민 대 반서민'의 내분으로 치달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탓에 결국에는 외세에 주권을 내주고 말았다. 이 와중에 김구와 안중근 집안은 동학군과 진압군으로 나뉘어 충돌할 뻔도 했고 하마터면 평생 원수지간이 될 뻔도 했다.

하지만, 외세에 주권을 빼앗기면서부터 이들은 계층도 학벌도 지역도 사상도 외세 앞에서는 다 무의미하다는 자각을 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의 장(場)에서 공고한 연대와 우정을 과시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계층·학벌·지역·사상보다 더 진하고 진한 '동포'의 감정을 바탕으로 '더 큰 나'를 형성해 나갔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감정은 고향 사람들을 상대로만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단군을 건국시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계층·학벌·지역·사상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우리가 남이가?'라는 동포감정을 품고 더 나아가 한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김구와 안중근 집안은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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