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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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보고(신라인)유적 답사기 | 장보고글로벌재단 사무총장 황상석
중국 장보고(신라인)유적답사단(단장 김성훈 장보고글로벌재단 이사장)의 20명이 8월 14일 오전 7시 45분에 인천공항에서 연태국제공항으로 출발하는 중국동방항공에 탑승했다. 답사단이 장도에 오르기까지 4년의 세월이 걸릴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슨 답사일정을 짜는데, 4년씩이나 걸렸다고 한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막상 답사를 떠나니까 그렇게 쉽고 간단한 스케줄이었는데, 처음 기획할 때는 하나에서부터 열 가지 등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중국 장보고(신라인)유적답사를 추진하게 된 배경은 이명박 정부 때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한국해양재단에 흡수 통합되면서 장보고 연구 및 선양사업의 구심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평생 장보고 선양 및 연구에 열정을 쏟아왔던 김성훈 이사장과 김문경 숭실대 명예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민간중심의 장보고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조직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봤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2013년 4월에 사단법인 장보고기념사업회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를 기념으로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 곳곳에 세웠던 장보고(신라인)유적 기념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생애 마지막으로 현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답사 루트를 짜기 위해 우선 엔닌(圓仁) 스님의『입당구법순례행기』를 읽었지만 너무 방대한 분량인 탓에 재당신라인사회가 형성됐던 지역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두 번째로 찾았던 방법은 김문경․김성훈․김정호 등이 편찬한 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도서출판 이진, 1993년)에서 중국을 세 차례 답사했던 기록을 참고했다. 다만 한중수교 이전에 세웠던 기념비의 소재지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 이밖에 답사비용을 조달하는 방안이 막막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차일피일 시간만 보냈다.

세월이 3년 정도 흘렀다. 기존에 운영되던 장보고CEO포럼과 장보고기념사업회의 회원 통합으로 설립을 추진했던 사단법인 장보고글로벌재단이 2016년 5월 16일 해양수산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답사 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답사를 안내할 여행사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동안 내가 장보고 연구 논문 및 문헌 등을 뒤져서 당나라 때 신라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지역명과 장보고유적지 등을 조사한 자료를 센타투어에 보냈다. 더불어 중국 장보고(신라인) 유적답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다만 재단의 핵심사업인 장보고한상 어워드 공모를 위해 홈페이지 개설과 후원부처 승낙, 언론보도, 선정위원회 위촉 및 심사 와 학술회의 겸 어워드 시상식(9월 30일) 등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한동안 답사추진계획을 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초쯤 센타투어에서 중국 오지(奧地)를 전문적으로 안내하는 청도대정여행사(사장 김성일)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선 선발대를 꾸려 답사 지역을 한번 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선발대원을 모집했다. 필자를 포함, 양광용․윤영곤 재단 이사와 박주성 박사, 정명성 재경향우회 사무차장 등 5명이 동행했다. 선발대는 2016년 11월 25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답사를 떠났다. 선발대의 답사 루트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연태~적산법화원~청도(1박)와 대주산 포구, 숙성촌을 걸쳐 회안(1박), 양주(1박), 영파~주산(1박), 상해(1박) 등이었다. 선발대의 일정은 답사 지역만을 찾아낸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바쁠 정도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다만 올해 답사지역은 태주 천태산 국청사의 코스 등이 추가되면서 7박8일 일정으로 기획했다.

장보고유적답사는 2017년 장보고한상 어워드 공모와 함께 재단의 주요사업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서둘러 추진했다. 당초 4월 18일부터 7박8일 일정으로 답사와 함께 절강해양대학교에서 한중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답사일이 가까워질 때 중국이 고고도미사일(사드) 한반도 배치와 관련, 전방위 압박을 가하면서 중국인들의 재중한인 등에 대한 린치 등 과격시위가 벌어졌기 때문에 답사단의 신변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됐다. 결국 답사일정을 8월 14일로 연기했다. 또한 절강해양대학교와 세미나 개최는 보류했으며 이번에는 답사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번 동행했던 답사단원은 김성훈 이사장과 박인아 사모, 김길조 재단 감사와 김청자 사모, 고충석 제주국제대 총장(전 제주대총장)과 최근식 재단 이사, 김덕수 절강해양대학교 교수, 강봉룡 목포대 교수, 김상배 전 완도해양경찰서장, 임흥빈 전남도의원, 김영술 전남대 연구교수, 황철희 DK 대표, 강병철 제주신문 논설위원, 이재언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김풍호 완도문화원 부원장과 이서 완도문화원 사무국장 등 17명의 회원들이 참여했다. 또 정명성 완도군 문화체육과장과 김광호 문화체육과 문화재담당팀장, 유영인 완도군청 주문관 등이 동참하면서 답사인원은 모두 20명이었다.
세찬 비바람에 등주 유적지 대충 구경해 섭섭
연태국제공항에 도착, 입국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센타투어에서 한국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을 여행하기 때문에 혹시 현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할 것을 예상, 밑반찬을 구해서 줬는데, 참치 및 고기 등의 캔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 예전같으면 그냥 통과시켜줄 것 같았는데, 사드 때문인지 통관절차를 깐깐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답사단이 관광버스에 탑승할 때까지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1시간 정도 이동하여 등주고성(登州故城)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빗줄기가 굵어졌다. 전날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강타, 가뭄해갈에 도움을 줬던 폭우가 밤새 황해를 끼고 이곳 연태까지 이동해 세차게 뿌렸던 것이다.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표소 입구에는 우산과 비옷을 챙겨 입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막바지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성수기에 비해 대폭 줄었다는 관람객들은 발을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붐볐다. 매표소 입구에서는 외국인 또는 내국인들을 가리지 않고 나이 70세 이상임을 입증하는 여권 등을 내밀면 무료로 입장시켜주었다. 사회주의체제인 중국에서 공자의 경로효친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친근감이 들었다.

등주(登州)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그 이유는 산동에서 닭 우는 소리가 인천까지 들렸다고 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산동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데다 발해 및 황해를 접해 있는 연태(烟台)시는 옛 명칭이 등주(登州)였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수군을 동원, 출발했던 곳이 등주였다. 발해의 무왕이 732년에 장문휴를 보내어 기습적으로 등주를 공격, 등주자사를 죽였던 사건이 발생했던 적도 있었다. 등주에는 ‘봉래각’ 관광구와 삼선산(三仙山)․팔선과해(八仙過海) 풍경구 등이 있다. 봉래각풍경구는 해발 115m의 단애산(丹崖山)을 배경으로 조성됐으며 용왕궁(龍王宮)과 자손전(子孫殿), 천후궁(天后宮), 여조전(呂祖殿), 삼청전(三淸殿), 미타사(彌陀寺) 등의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상에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아름다운 해변과 어울려져 4대 명루(名樓)인 봉래각이 있는데, 자주 해무(海霧)가 발생한 탓에 귀가하는 어선의 불빛과 어울리면서 속세와는 동떨어진 선경(仙境)을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행들은 비바람을 뚫고 봉래각에 도착, 황해바다를 바라봤으나 비바람과 안개 탓에 가시거리가 짧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봉래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여덟 선인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팔선과해(八仙過海) 관광지가 있었다. 이곳은 중국 고대의 신화에 나오는 8명의 신선들이 각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바다를 건넜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관광지를 조성한 것이다. 김성훈 단장은 여덟 선인들이 건너갔던 곳은 이상향인 한반도였다고 해석했다. 봉래각에서 내려와 출구를 찾았는데, 주차장으로 빠지지 않고 관광 상품을 파는 상가와 식당 등이 빼곡히 들어선 거리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중국 정부는 관광단지를 조성할 때부터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골적으로 노리는 전략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건립된 고선(古船)박물관은 산속에 동굴처럼 파내어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고선박물관은 봉래시 고대 항구 유적인 봉래수성(蓬萊水城)에서 1984년 3월 23일부터 6월 18일까지 준설하는 과정에서 고려 선박 2척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이 박물관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3개가 있다. 하나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석상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포은은 1384년(우왕 10) 발해만을 통과하는 서해북부 연안항로를 선택하여 개경을 출발하여 등주를 거쳐 육로로 남경까지 사행단을 이끌고 다녀왔던 적이 있다. 중국 당국은 포은의 석상을 전시할 때 CCTV 등 언론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이 공자의 유학사상을 국가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로 부각시키려는 저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둘째, 발굴된 고려선박의 형체를 전시해놓고 있다. 고려선의 잔존길이는 28.6m이며 선체는 1.1~5.6m, 잔존높이는 1.2m로 나타났다. 이들 고려선 2척이 14세기 중엽 무렵 고려에서 출발, 등주항으로 입항하려다가 침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셋째, 신라인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을 재현, 전시해놓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품들은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려는 중국당국의 속셈을 엿보이는 대목이다. 
산동성 교통사고 억제위해 첨단 교통관리시스템 구축
점심을 끝낸 일행들은 봉래에서 장보고대사가 창건한 적산법화원이 있는 영성시 석도진까지 오후 5시 이전에 도착해야만 관광지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곧바로 출발했다. 평소 같으면 시속 100km로 2시간 정도 주행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시속 80km이하로 주행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도착 시간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특히 4차선 국도에서도 시속 100km이상으로 운행할 경우, 관련 데이터가 산동성 교통국과 관광버스에 실시간 송신되고 있었기 때문에 준법운전이 필수였다. 만약 과속할 경우 해당 운전사에게 벌점과 벌금이 동시에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동성 지방정부는 교통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관광버스일 경우 심야 2시부터 새벽 5시까지 고속도로와 국도의 운행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오전 5시부터 6시까지는 시속 80km, 오전 6시 이후부터 100km를 주행할 수 있도록 차등 규정하고 있다. 더욱이 음주운전하다 걸릴 경우 평생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관리들도 음주운전 등 불법 및 탈법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근 중국 인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공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가, 불법 및 탈법 사례 등을 위쳇 등 SNS 등에 게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근례에 지방관리가 명품시계를 차고 현장을 나갔을 때 찍힌 현장 사진이 위쳇에 게시되는 바람에 혹독한 감사를 받고 낙마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석도진에 오후 5시쯤 넘어 도착한 탓에 AAAA급 적산풍경구 등을 관람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관람일정을 하루 늦춰 15일 오전으로 바꿨다. 대신 적산풍경구를 관리하고 있는 형리문(邢利文; 赤山旅遊房地産總公司 赤山風景區) 부총경리(상무)와 우화청(宇華靑; 石島赤山 國際市場部/省外市場部) 부장 등을 그들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들 적산그룹 계열의 관계자들은 과거 해양수산부 산하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왜냐하면 장보고전기관을 건립할 때 장보고기념사업회에서 유물과 유적 등 전시 모조품 150여 점을 기증 또는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다.

刑 부총경리는 일행에게 미소를 지으며 과거처럼 한중우애를 강조하는 취지의 환영사를 했다. 답사에 나선 김성훈 단장은 한중수교 이전에 일본 불교계에서 자금을 지원, 장보고 대사가 창건했던 적산법화원을 ‘엔닌의 절’로 둔갑시켜 복원하려던 계획을 저지시켰던 과정과 일본 불교계가 경내에 세웠던 십여 개의 기념비석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적산법화원기비’를 1990년에 건립했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기념비의 비문은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와 중앙대 중국연구소를 맡고 있던 김성훈 교수가 지었고 글씨는 장전 하남호 선생이, 소요 자금은 한국선주협회가 지원한 연구비의 일부로 충당했던 사실도 덧붙였다. 김 단장은 刑 부총경리에게 이 역사적인 기념비가 언제부터인가 법화원 경내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2005년까지 적산법화원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 담당자에게 자신이 세운 기념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물을 때마다 “창고에 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털어놓았다. 刑 부총경리는 예기치 않는 발언이 나오자 심각한 표정으로 김 이사장을 응시했다. 이때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사무실 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관리소 측은 갑자기 정전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 탓인지 준비해둔 랜턴 몇 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 단장은 준엄한 목소리로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비싼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도대체 어디에 뒀는지 알려 달라”고 刑 부총경리를 압박했다. 그는 심지어 ”비싼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비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면서 속히 기념비의 존재여부만이라도 알려달라고 거듭 요청하면서 만약 기념비를 찾아준다면 사례금까지 주겠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刑 부총경리는 사례금은 말도 안 되며 역사적인 기념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 어떻게든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적산풍경구의 관할권이 2002년 영성시에서 적산그룹으로 이관됐다는 점과 시설을 보강하여 2005년에 재개관했으며 장보고전기관은 2006년에 개관했기 때문에 기념비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대화가 마무리 될 때 쯤 전기가 들어왔다. 경색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선물교환의 시간을 가졌다. 풍경구 관리소 측은 2006년 장보고전기관을 개관할 때 마련했던 ‘장보고 동상’의 기념품을 김성훈 단장에게 줬다. 우리 측은 완도에서 구매한 김선물셋트를 전달했다.

일행은 적산그룹이 짓은 적산호텔에 투숙했다. 이 호텔의 외양은 붉은 석재로 꾸몄기 때문에 화려한데다 조경도 유럽식으로 멋지게 꾸며놓았다. 겉만 보면 선진국 수준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꾸며졌다. 그러나 호텔 내부는 엉망이었다. 특히 심야 2시부터 5시 50분까지 정전이 된 바람에 호텔의 와이파이는 불통됐고 샤워기에서 녹슨 물이 나와서 몸을 씻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외화내빈’의 모습은 오늘날 성장통을 앓고 있는 중국의 모습과 닮았다.

15일 아침 8시 5분에 적산법화원을 다시 찾았다. 1차 검문소에 근무하던 수위가 관광차량의 앞에 서서 진입을 막았다. 이는 외부 관광차량을 검문소 옆 주차장에 주차하게 한 뒤 관광객들이 별도의 돈을 내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관람차량으로 바꿔 타도록 강권하는 등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비단장사 왕 서방의 장사 수완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일행은 적산대명신과 장보고전기관, 적산법화원과 관음분수쇼, 엔닌관 등의 순서로 둘러보기로 했다. 적산풍경구에는 크게 10개의 존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시설물은 단연 적산대명신과 관음분수쇼이다. 엄밀히 따지면 적산풍경구의 핵심은 장보고전기관과 적산법화원이지만, 풍경구의 초입에 있는데다 규모가 왜소하고 진입로가 넓지 않는 탓에 관람객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적산법화원내 장보고전기관
특히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의 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경내 진입도 하지 않고 적산명신상 등 인기가 있는 곳으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적산법화원에서 왼쪽 야트막한 산꼭대기에 세워진 세계 최대 규모의 적산대명신의 뒷모습이 눈길을 끌기 때문에 관광객의 발걸음이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산그룹은 왜 신라명신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적산명신상을 만들었을까? 적산명신(赤山明神) 또는 신라명신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태산부군(泰山府君) 설이다. 高橋 徹, 「赤山法花院とは」, (
◇ 유산포신라인집거유지 기념비 앞에선 김성훈 단장
감격에 벅찬 답사단원들은 기념비를 중심으로 김성훈 이사장과 함께 개별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 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 대사의 은혜였다. 엔닌과 엔친 스님이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을 만나 침몰 위기에서 신라명신(장보고)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산포신라인집거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기적(奇蹟)’이었다. 유산포 도로 옆에 세웠던 기념비는 유산구진(乳山口鎭) 유가장촌(劉家莊村) 옛 유산빈관(乳山賓館) 옆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 호텔은 문을 닫은 지 꽤 오래된 탓에 황폐화됐다. 아마 호텔 사주가 도로변 기념비석을 자신의 호텔 정원으로 옮겨 놓았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밖으로 나왔다. 유산빈관 옆에 허름한 건물 경비원은 중국 11․12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호요방(胡耀邦)의 소유한 별장임을 흘리면서 답사단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을 권했다. 우리들은 그 별장 안을 살폈다. 겉과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인공호수와 누각, 건물 등이 잘 배치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답사단원은 오후 5시 20분에 청도 킹후드 호텔에 여장을 풀고 근처에 있던 청도 전남도민회관을 방문했다. 이덕호 회장과 정재웅 수석부회장 등 도민회 임원 8명이 우리들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작년 선발대로 왔을 때 처음 만났던 이덕호 회장은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쟁이 CEO였다. 이번에 전남도민회관을 방문하게 된 배경은 재중한인들이 거주하는 청도 등 주변 지역에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에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유하자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이덕호 회장은 “청도 전남도민회를 방문해준 답사단원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답사단원 전원에게 귀한 보이차 선물세트를 나눠줬다. 더욱이 완도 금일 출신 홍창용 사장이 운영하는 ‘홍가 명가 엄마 손맛’ 음식점에서 뽕나무 백숙으로 환영만찬을 베풀어 줬다. 이국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청도를 찾아온 답사단원들에게 따뜻한 남도의 정을 베풀어준 것이다.

16일 7시 55분에 호텔에서 나와 연운항시 연운구 숙성촌을 향했다. 김성훈 단장은 7살 때까지 중국 심양에서 자랐던 탓에 중국어 기본회화를 10분간 진행했다. 일행들은 초등학생시절로 돌아가 “니 하오 마”하는 김 이사장의 발음을 흉냈다. 김 이사장은 “저녁 밥 먹었니”의 문장을 “× 발 놈아”하고 발음하는 바람에 일행 모두는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김 단장은 연일 강행군하는 답사단원들에게 웃음을 주는 청량제의 역할까지 도맡았다. 특히 김 단장은 해방을 맞이했을 때 부모님이 중국 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했던 일과 유엔식량농업기구 농무관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을 다녔던 이야기를 실감나게 설명했다. 기억력이 뛰어난데다 말솜씨도 위트를 섞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한 탓에 시간이 어떻게 지났지 모를 정도로 빨리 흘러갔다. 일행은 청도 동쪽 도심에서 교주만 해역을 가로질러 홍도를 지나 서쪽 황도를 잇는 세계 최장의 다리인 교주만대교(36.48km)를 건넜다. 10시 30분쯤에 숙성촌 선산(船山)풍경구에 도달했다. 船山의 명칭은 산 정상의 형상이 배를 엎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탓에 붙여졌다. 숙성촌 고참(高 站) 주임이 관광 차량 2대와 안내원들을 대기시켜 놓았다. 이들은 2013년 4월 20일 연운항한국상회와 연운항시 연운구 인민정부와 연운항시외상투자기업협회 등이 공동기념식수했던 현장을 우리들에게 먼저 보여줬다. 31살의 젊은 나이에 숙성촌의 행정을 맡고 있는 고참(高 站)주임은 한국과 중국의 우정을 강조했다. 선산입구의 왼쪽은 인공호수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쪽은 선산가 맞닿은 곳에 10m 넓이의 수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 수로를 따라 중간에 이르면 선산의 4부 능선 바위에 ‘신라인 배를 묶어둔다’는 뜻의 신라인계주처(新羅人係舟處)의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바위를 보여줬다. 엔닌 스님의 일기에 등장했던 장면들이 마치 오늘의 일처럼 선명하게 부각됐다. 고참(高 站)주임은 기념식수와 바위에 새겨진 글자가 한중관계의 중요한 모티브임을 강조했다. 이처럼 숙성촌은 오랫동안 최적의 피난항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 숙성촌에 건립되고 있는 장보고기념관 건물
11시 40분 쯤 연운구가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야심차게 관광개발을 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지난해 11월에 왔을 때는 전형적인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이번 답사에 와서 보니 거주하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도로도 넓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듯이 주변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도심재생사업을 벌였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렸던 식당은 1962년에 지어졌던 공회당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식당 내부는 1966년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테리어를 꾸몄다. 3층 높이의 공회당을 개조한 탓에 식당의 천장은 훤히 뚫려 있고 벽면에는 모택동의 문혁 시절 온갖 정치적 구호와 선동 문구로 가득 차 있었다.

高 站 서기는 점심이 끝날 무렵 다시 답사단을 찾았다. 그는 식당에서 왼쪽 문을 열고 답사단원들에게 고급펜션시설을 보여줬다. 고급 펜션시설은 區에서 직접 관리 및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 답사단은 당왕호(唐王湖)와 인접한 곳에 세워진 ‘숙성신라인주거유지 기념비’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 단장은 이 기념비를 세울 자리가 마땅히 없어서 쩔쩔맸는데, 이곳에 살던 농민이 자신의 마당에 세우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었던 사실을 회고했다. 특히 농민이 김 단장에게 전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당신들만 신라인의 후예가 아니라 나도 신라인의 후예다”며 “천년 동안 헤어졌다가 오늘에야 만났으니까 우리들은 형제다”라는 말을 전했을 때 주위에 있던 일행들은 한동안 숙연해졌다. 김 단장은 그 농민이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다는 뜻을 高 站 주임에게 말했다. 그는 행정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결과, 그 농민은 현재 요양원에 거주하고 있으며 보행이 어려워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줬다. 이처럼 강소성 연운항시 연운구 숙성(宿城)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이곳은 성(城)이 아니었는데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연운항 지역에서 전투를 하던 중 숙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던 탓에 ‘숙성’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왕호 밑에 있는 보가산(保駕山)의 명칭은 당태종이 연개소문과 싸움을 벌였으나 패했을 때 설인귀가 왕을 보호했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가 운대산지(云臺山誌)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연개소문의 군사가 주둔했던 소문정(蘇文頂)도 있다. 이는 숙성촌에 고구려 유민들의 후예들이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구전으로 전했던 설화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들었다.

일행은 세외도원(世外桃源)인 당왕호 주변에 조성중인 장보고기념관 및 한중문화교류원 등을 둘러봤다. 이곳이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장보고기념관은 ㄷ 자 모향의 건물이 완공됐으나 전시품 등 인테리어가 진행되지 않은 탓에 썰렁했다. 이어 답사단은 버스 2대에 분승하여 해상운대산(海上云台山)의 정상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해발 605.4m의 운대산은 사계절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봄에는 꽃과 여름에는 바다를,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졌다.

5시쯤 高 站 주임의 안내로 연운구 청사를 방문했다. 연운구와 완도군은 오래전에 우호협력도시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답사단을 초청한 것이다. 연운구를 대표하여 이군생(李君生) 주석과 혜철(嵇軼) 부구청장과 정학도(程學桃) 문화체육여유국장, 高 站 주임과 답사단이 마주 앉았다. 李 주석은 연운구 부구청장을 역임하고 주석으로 영전했는데, 54세에 불과했다. 또한 혜철 부구청장도 50대 초반일 정도로 젊은 것이 특징이었다. 참석자 소개에 이어 李 주석 환영사와 김성훈 단장의 답사, 그리고 연운구 동영상 시청, 건의 등 기타 안건으로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연운구청이 청사 내 마련한 만찬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의 의전은 자리배석에도 전략적 마인드를 갖고 배치했다. 예를 들면 원형테이블에 주최측의 책임자와 부책임자가 서로 마주 앉고 李 주석 옆에는 김 이사장과 고충석 총장 등 원로를 좌 우 양쪽에 앉게 했다. 또 정학도 국장과 완도 정명성 문화체육과장이 옆에 앉도록 배려했다. 연운구 측에서는 특산주를 권하면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중국 측은 한국에서 연운항시 연운구 숙성촌 등의 관광을 많이 올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4일째를 맞는 답사단원은 재당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연수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곳도 정확한 지점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지점을 연수대교(漣水大橋)로 잡았다. 그러나 가이드에 따르면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연수대교’를 검색하면 연수현에 건설된 교량들의 리스트가 전부 뜬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곳은 과거에 漣水大橋였지만, 근례에 확장되면서 남문대교(南門大橋)로 명칭이 바꿨다. 김성훈 단장은 남문대교의 ‘교량공시패(橋梁公示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눈은 쌍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한 주위를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당나라 때 이곳의 명칭은 연수향(漣水鄕)이었다. 장보고와 같이 당나라에 건너갔던 정년(鄭年)이 군 제대 후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신라소가 설치될 정도로 재당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다. 연수현에서 1시간 떨어진 회안시(옛 지명 楚州)도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다. 초주는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쳤던 한나라의 충신 한신과 서유기를 쓴 소설가 오승은․주은래의 고향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대운하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486년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인공하도 한구(邗구)를 건설했으며 고회하(故淮河)와 경항대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에 초주가 위치해 있다. 특히 회하(淮河)와 사수(四水)로 진입하는 고말구(古末口) 주변에 신라인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 역대 왕조는 초주에 운하를 관리하는 ‘조운총독부’를 뒀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 봤던 회안의 운하(運河)는 오간데 없고 복개(覆蓋)되어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특히 고말구 주변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층아파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신라방유지’가 새겨진 기념석은 고말구역 주변 소공원으로 옮겨져 있었다.

2시 쯤 양주(揚州)시 수서호(瘦西湖) 북문 입구의 최치원기념관을 방문했다. 양주시는 2007년 중국 외교부의 비준을 받아 당성(唐城)유적지 안에 최치원기념관(崔致遠紀念館)을 건립했다. 최치원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은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약 5년간 근무했던 인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에는 장보고기념관과 최치원기념관, 안중근기념관 등 한국인물의 기념관이 있다. 답사단의 일정과는 별도로 필자와 김성훈 단장, 김덕수 교수는 당성 유적지 주차장에서 4시 35분에 주강(朱江) 전 양주대학교 교수의 수제자인 양명원(梁明元) 양주시(揚州市) 강도구(江都區) 문화관광국장을 만났다. 양 국장은 한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딸과 함께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필자는 작년에 선발대로 왔을 때 김덕수 절강해양대학교 교수가 양주까지 찾아와 양명원 국장의 안내로 朱江 전 교수의 자택을 방문했었다. 허름한 아파트의 5층에 살고 있는 朱 교수와 김 이사장은 25년 만에 해후(邂逅)한 탓인 지 악수한 손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이처럼 생면부지였던 이들이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장보고 대사였다. 김 단장이 1992년 11월 완도군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朱 교수를 섭외했기 때문이다. 朱 교수는 양주박물관에 보관한 청자는 고려청자가 아닌 강진에서 만들어진 신라청자라고 주장했다. 이는 고려시대 때 한국의 청자가 발생했다는 기존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번 만남에도 김 단장은 한국에서 고려청자의 발생 시기를 놓고 학자들끼리 논란이 일고 있다고 지적하자, 朱 교수는 또렷하게 통일신라시대라고 못을 박았다. 아흔 살의 朱 교수는 다리가 아픈 탓에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집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컴퓨터로 논문 및 관심분야의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하는 등 외부와의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다. 방문하던 날도 朱 교수는 컴퓨터 화면에 1992년 완도에서 열렸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모습과 명승 제3호 구계등(九階燈)에서 김 단장과 찍은 사진을 찾아서 띄어 놓았다. 또한 주 교수는 최근에 발간한 ‘주강망문집(朱江網文集)’과 ‘해내외음식회상록(海內外飮食回想錄)’ 등 2권씩을 우리 일행들에게 줬다. 미식가(美食家)로 알려진 朱 교수는 세계음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회상록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미국과 일본, 중동 등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다루고 있다. 이 책 121페이지에는 ‘한국식록상(韓國食錄上)’이란 장(章)에서 완도국제학술회의를 끝내고 1992년 11월 21일에 서울 김성훈 중앙대 교수의 집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이 때 김 교수의 부인 박인아 사모가 차려준 19가지 음식 종류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다음은 朱 교수가 쓴 내용을 번역한 글이다.

“ 주인과 손님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완도회의 때의 긴장감과 피로감을 전부 잊게 했다. 다들 탁자에 들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김 교수님의 부인과 따님은 우리를 위해 특별한 정성을 다해 정갈한 요리를 준비했다. 김 교수의 부인은 성이 朴씨인데 만들어주신 가연의 독특함에 김 교수로부터 <박부인식> 요리로 불렀다. 이들 부부의 정이 얼마나 깊은 지 엿볼 수 있었다. 식단에 차려진 음식은 다음과 같다. 한국녹차와 인삼무침 오이조각무침, 죽순에 소고기와 왕새우를 넣은 요리, 고기볶음, 새우튀김, 소갈비구이 등.“ 이번 답사단의 가이드를 맡았던 김성일 청도대정여행사 사장이 번역을 해줬다.


우리 일행은 기자 이상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朱 교수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주강 교수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강도구에 있는 경강대반점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여장을 푼 뒤 호텔 내 식당에서 梁 국장이 베푼 만찬에 참여했다. 梁 국장은 풍요로운 도시 양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날도 양주 특산품으로 만든 음식을 권했다. 특히 13억 중국 인민이 좋아하는 양주 볶음밥을 먹어보도록 권했다. 양주 볶음밥의 역사는 수양제가 양주를 순찰할 때 “밥을 볶을 때 기름과 달걀노른자가 어울려 금가루처럼 보이는 "쇄금반(碎金飯)"을 좋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행했다는 설이다.

답사 다섯째에 접어들면서 태주 천태산 국청사를 향해 출발했다. 양주에서 태주까지 하루 종일 관광버스로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중간에 소주(蘇州) 한산사(寒山寺)를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김 단장이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 한 구절 씩 읊으면 답사단원 모두는 큰소리로 따라했다. 김 단장이 한 구절의 한자를 먼저 낭독한 뒤 한 문장씩 뜻을 해석하면서 詩를 음미했다. 특히 79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김 이사장의 기억력은 탁월한데다 언변도 뛰어난 탓에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안겨줬다.

풍교야박(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단풍 사이로 고깃배의 불빛이 시름겨운 잠을 비치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저 멀리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

장계의 풍교야박에 심취한 탓에 어느새 한산사에 다다랐다. 한산사의 입구는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도로가 좁은데다 밀려드는 관광차량 때문에 뒤엉켜 좀처럼 차들이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산사는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때문에 유명해졌다. 장계는 세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뒤 이곳에 머물며 썼던 시가 바로 풍교야박이라는 것이다. 장계가 살던 시기는 안사의 난 때문에 나라가 혼란한데다 절망에 빠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쓸쓸한 심경을 담았던 탓에 후세들이 즐겨 읊는다고 한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불종(佛鐘)이 한번 울리면 수명이 10년 연장된다는 전설 때문에 한산사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우리는 한십유종(寒拾遺踪)의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길 오른쪽 건물 벽면에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詩)들을 적어 놓았고 왼쪽에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장계의 시구에 나오는 풍교(楓橋)는 상당하(上塘河)와 고운하(古運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아치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량의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었다. 이곳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한산-습득의 전설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한산과 습득의 전설 때문에 한산사는 ‘화합문화의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그렇다면 한산과 습득의 전설은 어떤 내용일까?.

습득과 한산은 당(唐) 태종의 정관(貞觀, 627~649)연간에 국청사에 살았던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풍간(豊干)이라는 도인이 이곳에 살았다. 이들 세 성자(聖者)를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불렀다. ’국청삼은‘의 像을 모신 곳이 삼현전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따르면 풍간선사는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기록한데서 세 성자(聖者)로 부각됐다. 한산과 습득은 늘 어울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며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고 미친 짓을 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불법(佛法)에 어긋남이 없이 오묘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습득은 주지스님이 “너는 주어다 기른 아이인데 너는 본래 어디서 왔으며 너의 본래 성(姓)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두 손을 맞잡고 꼿꼿하게 서서 아무 말 안하는 모습(차수이립: 叉手而立)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선문(禪門)에서는 아직도 차수이립을 화두(話頭)로 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한산과 습득은 화합이선(和合二仙)이며 중국 민간에 전해져오는 ‘혼인과 화합을 이루어주는 신’으로 알려졌다.

답사단은 3시 40분 쯤 태주 천태산 국청사풍경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천태산에는 폭포수 위 허공에 거대한 자연석 대들보가 걸려 있는 석량(石梁) 풍경구 외에 적성산․화정․동백궁․양태선곡․용아협․한산호․천호 등 8개 풍경구가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국청사는 중국 천태종의 본산이며 4대 사찰에 포함될 정도로 유명세를 갖고 있다. 다만 중국 사찰은 오후 4시면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의 문이 닫히기 때문에 늦게 도착하면 참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주차장에서 셔틀버스가 있는 곳까지 뛰었으며 국청사의 정문이 닫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경내로 진입했다. 국청사는 지자(智者)대사가 직접 설계하고 그의 제자인 장안대사가 창건했다. 대부분의 중국 사찰 정문이 남향과 서향인데 비해 국청사는 동향(東向)으로 나 있는 것이 특이했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유래됐던 우화전(雨花殿)을 관람하고 나서 대웅보전으로 이동하는 순간, 대웅전의 문이 닫혔다. 이어 곳곳에 스님들이 관람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국청사를 보기 위해 버스로 6시간을 이동해서 왔는데,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한 곳이라도 더 보기 위해 대웅전 오른쪽을 둘러봤다. 1400년간 한 자리에서 국청사를 지켜온 수매(隨梅)를 볼 수 있었다. 국청사가 창건될 때 심었던 이 매화나무는 중국불교가 위기를 겪을 때는 꽃이 피지 않고, 흥할 때는 흐드러지게 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隨梅를 등 뒤로 계단을 따라 관음전까지 올랐으나 관리하는 스님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제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국청사의 면적은 7만㎡에 많은 전각들이 들어선 탓에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청사에서 주차장까지 걸어내려 오다가 수나라 때 지은 보탑(寶塔)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일명 ‘수탑(隨塔)’으로 불리 우는 이 탑의 높이는 59.3m에 6각 9층이고, 벽돌로 된 담에는 불상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돼 있었다.

답사 여섯째 날 답사단의 일부가 국청사를 자세하게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새벽 5시 20분에 모여서 다시 가기로 했다. 답사단이 투숙했던 천태빈관에서 국청사까지는 택시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어제 건성으로 봤던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를 했다. 새벽에 隨梅를 다시 봤을 때 오랜 세월을 버텨 온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청사 경내의 제일 윗자리에는 관음전과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이 있다. 한․중 천태종의 합작품인 조사당은 중앙에 천태종 개조 지자대사, 오른쪽에는 한국 천태종 개조 의천대각국사, 왼쪽에는 이를 중창한 상월원각대조사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른 아침인 탓에 조사당의 문은 굳게 닫혔다. 기념당 아래 계단으로 내려와 삼현전, 묘법당, 나한당, 삼경전, 가람전 등을 둘러봤다. 국청사 방문을 끝낸 일행은 주산시를 향해 출발했다. 영파를 지나 세계에서 두 번째 긴 다리인 항주만대교를 지나 주산시로 접어들었다. 토요일인 탓에 주산시 보타도를 가기 위한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예정 시간보다 40분 늦게 주산시(舟山市) 정해구(定海區) 해원로(海院路)에 있는 절강해양대학교에 도착했다. 섬을 매립해 최근에 대학캠퍼스를 조성한 탓에 질서정연하고 깨끗했다. 이곳은 김덕수 교수가 군산대학교에서 정년한 뒤 절강해양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구면(舊面)인 왕잉(王潁) 교수는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중국의 대외경제 그랜드 플랜이자 국제무역질서 재편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이 고대의 해양실크로드와 연계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그는 한중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과거 주산과 장보고, 고려 등과의 교류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30년 전에 손보기․김문경 교수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 손보기 교수가 보타도의 유물을 보고 백제시대와 닮았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이에 왕잉 교수도 한국인과 자신은 형제와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학교 식당으로 안내해 풍성한 오찬을 베풀었다. 정이 많고 활력이 넘치는 왕 교수는 늦은 점심을 먹는 일행에게 술과 음식을 자주 권했다.

점심을 끝낸 우리들은 주산에서 배를 타고 보타도로 가야하는 일정 때문에 서둘렀다. 가이드에 따르면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가 전단강에 있으며 주산도에는 심(沈)씨들의 집성촌 심가문진(沈家門鎭)과 심가촌(심가촌), 심원(沈園) 등이 산재해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연유로 곡성군과 주산시 보타구는 오래전부터 자매결연(姉妹結緣)을 맺었다고 알려줬다. 그동안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당수는 막연히 장산곶과 백령도 중간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혼란이 생겼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진나라 때 백제에서 보타(普陀)로 시집 온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무역을 하던 거상 심국공(沈國公)이 앞을 못 본 부친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홍법사에 인신 시주(人身 施主)한 처녀를 데려와 부인을 삼았다고 한다. 이 처녀는 전남 곡성에 사는 봉사 원홍장(元洪莊)의 딸 원량(元良)이 결혼한 뒤 심청(沈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없어 심청 관련 유적은 보지 못했다.
장보고가 개척한 동중국사단항로 감회 새로워
답사단은 심가문 부두에서 보타도로 가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20분 정도 항해하면 보타도에 도착했다. 보타도는 주산도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주의 관문이자 동남해운의 요충지이었다. 특히 장보고 대사가 영파에서 출발하여 보타도를 경유, 제주도 방향으로 항해하다가 흑산도로 이어지는 동중국사단항로를 발견함으로써 다른 항로보다 항해시간을 2~3일 앞당길 수 있었다. 이런 덕택으로 장보고상단이 한․중․일 해상항로는 물론 동서교역을 잇는 해상실크로드를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비록 이번 답사에서 보타도에서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이었지만 동중국사단항로의 출발지를 밟았다는 자체가 이루 형연 할 수 없는 기쁨을 줬다. 다만 주말이면 관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도의 불긍거관음원 등을 방문, 기도하는 중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을 둘러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작년 선발대로 왔을 때는 주산시 불교문화원 왕연승(王漣胜) 부원장의 안내로 불교인재를 양성하는 불학원과 불교박물관, 보제사, 고려부두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부두에서 기념비까지 대략 20분 정도 걸었지만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일행들은 벌써 지쳤다. 신라초(新羅礁)는 보타산 남쪽 연화양(蓮花洋)의 자그마한 암초를 가리킨다. 옛날부터 많은 선박들이 이 암초 때문에 좌초 또는 침몰됐는데, 현지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신라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주산시와 보타도 사이의 신라초 모습
2003년에 한국해양재단(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 후신)과 보타산관리국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고증을 걸쳐 ‘신라초기념비’를 세웠다. 일행은 4시 40분 선박을 타고 주산시로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영파시에 왔을 때는 오후 7시가 훨씬 넘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대장금에서 모처럼 한식을 먹으며 포식했다.

답사 일곱째 날 아침에 답사 코스를 놓고 의견이 충돌했다. 김 이사장은 아육왕사(阿育王寺)를, 강봉룡 교수는 고려관사지를 각각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필자는 답사단원의 일부가 6일 동안 버스만 타고 유적답사를 했기 때문에 오늘은 상해로 가서 모처럼 도시의 바람을 쐬자는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육왕사와 고려관사지 중 하나만 선택하면 어떻겠느냐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의 목적이 장보고(신라인)유적을 둘러보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관사지와 아육왕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고려관사지는 월호공원에 있었다. 고려왕조와 북송시기에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어 고려 사신들이 빈번하게 파견됐을 뿐만 아니라 민간의 무역거래도 활발했다. 특히 1117년에 영파에 고려사를 설립, 고려 관련 사무를 맡게 했으며 ‘고려사관’을 건설하여 사절들이 방문할 때 편의를 제공했다. 최근에 고려사관을 발굴, 복원했으나, 전시물이 빈약해 특별히 볼게 없다는 것이 먼저 관람했던 분들의 평가였다. 이에 따라 도로변 근처에 설치된 고려사관 기념비석을 중심으로 답사단원들이 증명사진을 찍고 곧바로 차에 올랐다. 이곳에서 50분 소요되는 아육왕사를 향했다. 중국 선종 5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파의 아육왕사는 서기 405년 동진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두개골 뼈)를 봉안한 보탑(寶塔)이 유명하다. 아육왕사라는 명칭은 양(梁) 무제(武帝)가 전륜성왕의 모델로 삼았던 인도의 아소카왕(阿育王)의 이름을 따서 바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단장은 이곳 아육왕사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했던 기지였음을 강조했다. 다만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은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하는 남녀 걸인들이 많았다.

답사 7일째에는 예정에 없던 스케줄이 2개를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이 협조를 잘 해준 탓에 상해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청사는 물론 예원옛거리, 신천지, 황포강 야경 등 계획된 일정을 순조롭게 소화했다. 프랑스 조계지였던 마당루(馬當路)에 위치한 임시정부청사는 상해 전통 주거양식으로 지어졌다. 1926년 상해로 이전했던 임시청사는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렸던 일본군의 전승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졌던 사건이 발생했던 1932년 4월 29일까지 독립활동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임시정부 청사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집기물과 가구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선열들의 독립운동 현장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이어 상해임시청사에서 가까운 신천지는 가장 감각적인 쇼핑장소로 꼽히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나무골격 구조에 벽돌을 가미한 스크먼(石庫門)양식의 공동주택지인 이곳을 상해의 황금시절을 재현하고 거리의 활성화를 위해 2000년에 복원했다. 그곳에는 상해 공산당선언을 했던 건물도 복원됐다. 특히 서양식 레스토랑과 바, 노천카페 등이 자리를 잡고 있어 흡사 유럽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들 정도였다. 또한 예원옛거리는 2만㎡의 면적에 중국을 대표하는 정원 예원(豫圓)과 성황묘, 문묘를 중심으로 명․청대 건물양식의 대규모 쇼핑타운 예원상청은 상하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마지막 투어프로그램은 청말기 외국인들이 거주했던 외탄(外灘)에서 상해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동방명주탑 등 현대식 초고층빌딩에서 연출하는 야경을 바라보는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현란한 상해의 야경은 피로에 지친 우리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줬다.
소중한 역사자원 개발 미명하에 송두리째 파괴
이번 답사일정은 7박8일로 다소 긴 일정인데다 30여 년 전에 김성훈 이사장 등이 방문했던 코스를 복기(復棋)한 탓에 버스로 1400km를 이동했기 때문에 다소 답답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단원들은 30여 년 전에 형편없는 도로와 숙소, 음식 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사명감과 신념으로 장보고 및 신라인유적지의 흔적을 찾아서 기념비를 세웠던 김성훈 단장의 전무후무한 업적에 무임승차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의 목적이 30여 년 전에 찾아서 기념비를 세웠던 장보고(신라인)유적 현장을 젊은 장보고연구자들에게 보여주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만 중국이 개방개혁정책으로 경제기적을 이루어 G2에 진입했지만,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됐던 재당신라인 및 장보고 유적 또는 흔적들이 무참히 훼손되고 있었다. 즉, 소중한 역사 자원들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송두리째 파괴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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