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롄주산역
-
-
서일총재항일투쟁 기념비
K
-
~26.3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지시시
-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서일徐一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함경도의 유학자 김노규金魯奎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 함일학교咸一學校 사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탄 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왕칭현汪靑縣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羅喆로부터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포교에 나서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서일은 1911년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7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 대부분은 대종교인들로서 백순白純·현천묵玄天黙·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 등 중광단의 지도층이 대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일은 중광단을 개편하여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한 서일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대종교2세 교주 김교헌이 그에게 종사직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위해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1919년 7월 계화·김붕金鵬·김일봉金一鋒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마친 서일이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여겨진다. 서일은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
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했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칭현 시다포西大坡 스리핑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에 임명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다. 이범석과 김규식등이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교성대가 조직됐다. 이때 3백여 명으로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서일이 이끄는 대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미산密山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회大韓
國民會 등 9여 개 독립군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서일은 총재로 추대됐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미산으로 돌아왔다. 서일은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미산 인근의 당비진當壁鎭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을 계획했다. 당비진은 주변이 광활한 토지와 하천으로 된 지역이기에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또한 일제의 감시와 침입의 위협이 적고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국경이 가까이 있기에 러시아로 피신할 수 있어 독립군을 양성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서일은 북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곳에 둔병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8월 26일, 당비진으로 마적이 습격하여 독립군과 한인들이 사망하는 ‘당벽진참안當壁鎭慘案’이 발생했다. 이를 겪은 서일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책임과 함께 자신을 따르던 동지들의 죽음에 비통해 했다. 결국 8월 27일 아침, 당비진 뒷산에 올라 자진自盡순국했다.
-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항일독립전쟁의 살아있는 전설
H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38.9km
-
-
뉴스
2018.02.18
-
홍범도 묘역,홍범도 거주지,홍범도 거리,봉오동 승첩지,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밀산 당벽진 무관학교 터,신계사,전로한족회대표자회의 개최지 및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평양시청(인민위원회),청산리대첩 기념비,고려인문화센터,권업회ㆍ권업신문사,대종교총본사,자유시참변 급수탑,하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L
-
~38.9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미산시
-
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지인 십리와에 세운 항일기념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미산현密山縣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거세지자 국외독립운동기지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후보지로 주목을 받은 곳이었다.
이에 1909년 이승희李承熙와 이상설李相卨은 싱카이호興凯湖 주변의 펑미산蜂密山 지역에 황무지 45방方 구입하고 백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로 중국 정부의 영향력과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였으며,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는 것도 가능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 교재를 만들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해 신민회 이강李剛과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등도 펑미산 일대를 답사하고 펑미산 북쪽 십리와十里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고 정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개척자금이 부족하여 독립운동기지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이곳은 독립군들의 집결지가 됐다. 1920년 12월경 서일徐一(북로군정서), 홍범도洪範圖(대한독립군), 안무安武(대한국민회군)가 이끄는 독립군을 포함하여 9개 단체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이 미산密山 평양진에 집결했다.
서일은 이들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했다.
이들은 미산에서 향후 독립군의 투쟁노선을 논의하면서 우선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독립군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1921년 1월 초 대한독립군단은 미산 당비진當壁鎭을 지나 후린현虎林縣 후터우虎頭에서 우수리Ussuri, 烏蘇里강을 넘어 러시아 이만伊曼, Iman(현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1908년 이강, 1909년 김성무가 사전답사하고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미루 태동실업주식 회사의 주금이 투자되어 미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실제 1911년 미주에서 5만 달러가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해 5백여 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민족학교인 동명학교東明學校가
설립됐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가 세워졌다.
미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하여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하고 모금한 돈으로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기초부분은 산둥성山東省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기념비는 스촨성四川省에서 가져온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비문 내용은 중국시 당국의 공식사업임을 감안하여 신민회 지도자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산 십리와 항일독립운동근거지 건설작업을 시작, 미주 태동실업주식회사에서 5만불을 모금, 이강· 김성무·정재관 등을 원동위원으로 파견, 토지를 매입하고 500여 가구 건립 등의 사실을 분명히 하되 용어 등은 현지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항일독립전쟁의 살아있는 전설
H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38.9km
-
-
뉴스
2018.02.18
-
홍범도 묘역,홍범도 거주지,홍범도 거리,봉오동 승첩지,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밀산 당벽진 무관학교 터,신계사,전로한족회대표자회의 개최지 및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평양시청(인민위원회),청산리대첩 기념비,고려인문화센터,권업회ㆍ권업신문사,대종교총본사,자유시참변 급수탑,하
-
서일총재항일투쟁 기념비
K
-
~26.3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지시시
-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서일徐一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함경도의 유학자 김노규金魯奎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 함일학교咸一學校 사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탄 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왕칭현汪靑縣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羅喆로부터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포교에 나서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서일은 1911년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7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 대부분은 대종교인들로서 백순白純·현천묵玄天黙·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 등 중광단의 지도층이 대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일은 중광단을 개편하여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한 서일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대종교2세 교주 김교헌이 그에게 종사직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위해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1919년 7월 계화·김붕金鵬·김일봉金一鋒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마친 서일이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여겨진다. 서일은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
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했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칭현 시다포西大坡 스리핑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에 임명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다. 이범석과 김규식등이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교성대가 조직됐다. 이때 3백여 명으로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서일이 이끄는 대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미산密山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회大韓
國民會 등 9여 개 독립군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서일은 총재로 추대됐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미산으로 돌아왔다. 서일은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미산 인근의 당비진當壁鎭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을 계획했다. 당비진은 주변이 광활한 토지와 하천으로 된 지역이기에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또한 일제의 감시와 침입의 위협이 적고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국경이 가까이 있기에 러시아로 피신할 수 있어 독립군을 양성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서일은 북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곳에 둔병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8월 26일, 당비진으로 마적이 습격하여 독립군과 한인들이 사망하는 ‘당벽진참안當壁鎭慘案’이 발생했다. 이를 겪은 서일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책임과 함께 자신을 따르던 동지들의 죽음에 비통해 했다. 결국 8월 27일 아침, 당비진 뒷산에 올라 자진自盡순국했다.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L
-
~38.9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미산시
-
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지인 십리와에 세운 항일기념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미산현密山縣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거세지자 국외독립운동기지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후보지로 주목을 받은 곳이었다.
이에 1909년 이승희李承熙와 이상설李相卨은 싱카이호興凯湖 주변의 펑미산蜂密山 지역에 황무지 45방方 구입하고 백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로 중국 정부의 영향력과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였으며,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는 것도 가능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 교재를 만들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해 신민회 이강李剛과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등도 펑미산 일대를 답사하고 펑미산 북쪽 십리와十里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고 정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개척자금이 부족하여 독립운동기지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이곳은 독립군들의 집결지가 됐다. 1920년 12월경 서일徐一(북로군정서), 홍범도洪範圖(대한독립군), 안무安武(대한국민회군)가 이끄는 독립군을 포함하여 9개 단체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이 미산密山 평양진에 집결했다.
서일은 이들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했다.
이들은 미산에서 향후 독립군의 투쟁노선을 논의하면서 우선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독립군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1921년 1월 초 대한독립군단은 미산 당비진當壁鎭을 지나 후린현虎林縣 후터우虎頭에서 우수리Ussuri, 烏蘇里강을 넘어 러시아 이만伊曼, Iman(현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1908년 이강, 1909년 김성무가 사전답사하고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미루 태동실업주식 회사의 주금이 투자되어 미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실제 1911년 미주에서 5만 달러가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해 5백여 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민족학교인 동명학교東明學校가
설립됐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가 세워졌다.
미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하여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하고 모금한 돈으로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기초부분은 산둥성山東省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기념비는 스촨성四川省에서 가져온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비문 내용은 중국시 당국의 공식사업임을 감안하여 신민회 지도자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산 십리와 항일독립운동근거지 건설작업을 시작, 미주 태동실업주식회사에서 5만불을 모금, 이강· 김성무·정재관 등을 원동위원으로 파견, 토지를 매입하고 500여 가구 건립 등의 사실을 분명히 하되 용어 등은 현지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
서일총재항일투쟁 기념비
I
-
~26.3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지시시
-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서일徐一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이다. 함경도의 유학자 김노규金魯奎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 함일학교咸一學校 사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탄 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왕칭현汪靑縣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羅喆로부터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포교에 나서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서일은 1911년 이후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7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 대부분은 대종교인들로서 백순白純·현천묵玄天黙·박찬익朴贊翊·계화桂和·김병덕金秉德 등 중광단의 지도층이 대종교의 중심 인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일은 중광단을 개편하여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한 서일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대종교2세 교주 김교헌이 그에게 종사직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위해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1919년 7월 계화·김붕金鵬·김일봉金一鋒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본격적인 항일투쟁 준비를 마친 서일이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여겨진다. 서일은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
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했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칭현 시다포西大坡 스리핑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에 임명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다. 이범석과 김규식등이 교관에 임명되어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교성대가 조직됐다. 이때 3백여 명으로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서일이 이끄는 대한군정서를 포함한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미산密山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회大韓
國民會 등 9여 개 독립군 단체는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서일은 총재로 추대됐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미산으로 돌아왔다. 서일은 무장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미산 인근의 당비진當壁鎭에 머물며 독립군 양성을 계획했다. 당비진은 주변이 광활한 토지와 하천으로 된 지역이기에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또한 일제의 감시와 침입의 위협이 적고 위급한 상황이 되더라도 국경이 가까이 있기에 러시아로 피신할 수 있어 독립군을 양성하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서일은 북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이곳에 둔병제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8월 26일, 당비진으로 마적이 습격하여 독립군과 한인들이 사망하는 ‘당벽진참안當壁鎭慘案’이 발생했다. 이를 겪은 서일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책임과 함께 자신을 따르던 동지들의 죽음에 비통해 했다. 결국 8월 27일 아침, 당비진 뒷산에 올라 자진自盡순국했다.
-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항일독립전쟁의 살아있는 전설
H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38.9km
-
-
뉴스
2018.02.18
-
홍범도 묘역,홍범도 거주지,홍범도 거리,봉오동 승첩지,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밀산 당벽진 무관학교 터,신계사,전로한족회대표자회의 개최지 및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평양시청(인민위원회),청산리대첩 기념비,고려인문화센터,권업회ㆍ권업신문사,대종교총본사,자유시참변 급수탑,하
-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L
-
~38.9km
-
-
씨티
헤이룽장 지시 미산시
-
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지인 십리와에 세운 항일기념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미산현密山縣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거세지자 국외독립운동기지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그 후보지로 주목을 받은 곳이었다.
이에 1909년 이승희李承熙와 이상설李相卨은 싱카이호興凯湖 주변의 펑미산蜂密山 지역에 황무지 45방方 구입하고 백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로 중국 정부의 영향력과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였으며,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들여오는 것도 가능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 교재를 만들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해 신민회 이강李剛과 김성무金聖武, 정재관鄭在寬 등도 펑미산 일대를 답사하고 펑미산 북쪽 십리와十里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고 정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개척자금이 부족하여 독립운동기지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이곳은 독립군들의 집결지가 됐다. 1920년 12월경 서일徐一(북로군정서), 홍범도洪範圖(대한독립군), 안무安武(대한국민회군)가 이끄는 독립군을 포함하여 9개 단체 3천 5백여 명의 독립군이 미산密山 평양진에 집결했다.
서일은 이들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서일을 총재로,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으로 선임했다.
이들은 미산에서 향후 독립군의 투쟁노선을 논의하면서 우선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독립군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1921년 1월 초 대한독립군단은 미산 당비진當壁鎭을 지나 후린현虎林縣 후터우虎頭에서 우수리Ussuri, 烏蘇里강을 넘어 러시아 이만伊曼, Iman(현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1908년 이강, 1909년 김성무가 사전답사하고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미루 태동실업주식 회사의 주금이 투자되어 미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실제 1911년 미주에서 5만 달러가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해 5백여 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민족학교인 동명학교東明學校가
설립됐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가 세워졌다.
미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하여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하고 모금한 돈으로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기초부분은 산둥성山東省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기념비는 스촨성四川省에서 가져온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비문 내용은 중국시 당국의 공식사업임을 감안하여 신민회 지도자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산 십리와 항일독립운동근거지 건설작업을 시작, 미주 태동실업주식회사에서 5만불을 모금, 이강· 김성무·정재관 등을 원동위원으로 파견, 토지를 매입하고 500여 가구 건립 등의 사실을 분명히 하되 용어 등은 현지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