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사구시를 갈구하는 연암은 제 살을 꼬집는 아픔도 서슴지 않았다. 7월18일자와 7월22일자 일기 대부분을 할애하는 장문에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 그날, 고교보에 들렀을 때 그곳 주민들은 뜻밖에도 조선 사람을 원수 보듯 냉랭했다. 뉘 집을 가도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곤 조선 사람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글쎄 조선 사람이라면 신물이 난다면서 밑도 끝도 없이 돈 천냥에 지방 관리는 물론 조선인이 숙참했던 점방집 주인을 포함 네댓 명이 심문을 당했고 그 길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공금 분실 사건에서 발단한 일이었다. 연암이 여길 들르기 4년 전인 병신년(1776), 조선 영조 부고 사절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여기서 공금 천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천냥이면 거금이었다. 별수없이 관가에 분실신고를 했다. 그 신고는 건륭 황제에게까지 전달됐다. 오랜만에 조청(朝淸) 관계가 호전된 때인지라 황제는 당장 지방 국고로 변상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을 즉결 처형했으니 당시 주민들이 조선 사람을 원수 보듯 한 까닭을 알 법했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