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0년 7월 ◆ 옥전(玉田)에서 송가장(宋家莊)을 지나고 어양(漁陽·지금의 계주(·#53626;州))을 거쳐 방균(邦均)을 지났으며 연교(燕郊)로부터 노하(潞河), 통주(通州)를 거쳐 북경까지 만 엿새 동안 122km를 달렸다. 여기 300리는 북경의 근교였다. 말하자면 황성으로 들어가는 말죽거리다. 그 번영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어양에 들자 벌써 거마 소리가 우레 같았고, 노하의 부둣가에는 만 척의 상선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통주로부터 북경까지 50리 길은 석판의 탄탄대로에 부딪는 쇠바퀴 소리가 귀를 찢었고, 영통교(永通橋)부터 조양문(朝陽門)에 이르는 그 직선의 운하로 작은 배들이 연락부절이라 했다. ◆ 연암의 눈이 마침내 휘둥그레졌다. 청나라 문명의 충격은 물론 처음이 아니다. 청국으로 들어오는 책문에서 그 번창하고 화려한 거리 풍경에 놀랐고, 성경에 산적한 상품과 오랜 역사의 골동에 감탄했으며, 다시 백기보로 이동할 때 수렁 길 200리에 먹줄을 친 듯 반듯하게 놓인 다리, 그리고 무령(撫寧) 거리에서 눈부신 금옥의 편액들을 보았을 때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명적인 것들이었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