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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전곶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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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2286-5204
1234
    현지어
  • 살곶이다리(전곶교)
  • salgojidari(jeongojgyo)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성동구 행당동 58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6.6km
알고 보면 사연 많은 다리 중랑천에는 튼튼한 돌다리 하나가 하천을 가로질러놓여 있다. 산책이나 운동 나온 사람들도 지나고자전거를 탄 이들도 지난다. 제법 튼튼한 것이 지난세월의 흔적도 곳곳에 묻어난다. 시민들은 그저 조금오래된 친숙한 돌다리려니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조선 시대 만들어진 다리 가운데 가장 긴 역사 깊은다리다. 살곶이다리는 보통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하고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부른다. 먼저 살곶이는 ‘화살이꽂힌 땅’이라는 뜻이고 전곶 또한 화살 ‘전(箭)’과땅 이름 곶(串)을 뜻한다. 그러고 보면 두 이름 모두화살에서 유래했다. 살곶이는 조선 태조가 매 사냥을나가 활을 쏘면 매가 떨어지는 곳이라 해 붙은이름이라고도 하고, 이복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태종이방원을 향해 활을 쏘아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풀과 버들이 많아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과군대의 열무장(閱武場) 즉 사열장으로도 쓰이던자리다. 특히 제반교(濟盤橋)라는 이름은 다리가평지처럼 평평하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그 우수성을짐작할 수 있다. 과학이 스민 돌기둥 살곶이다리는 세종 2년(1420)에 건설을 시작했다. 원래강폭이 넓은데다 홍수까지 일어나 잠정 중단됐던 것을성종이 다시 재개해 1483년에 완공했다. 그 긴 세월이말해주듯 폭 6m에 총길이만도 76m에 이르렀으며 64개의돌기둥으로 만들었다. 물이 줄어들면 기둥 돌 아래포석 면이 드러나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 한다.특히 돌기둥은 마름모형으로 만들어 물의 저항을줄였고, 표면에는 정으로 흠집을 내 물살의 흐름을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등 상당히 과학적인 건축 기법을적용했다. 하지만 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위해 다리의 석재를 가져다 쓰면서 훼손돼 1913년콘크리트로 일부 보수했으나, 그 후 다시 홍수가 나손실된 상태로 방치해왔다. 살곶이다리가 다시 복원된 것은 1972년에이르러서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예전에 비해 강폭이넓어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27m의 콘크리트 교량을잇대어 보수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지방에서 한양의동대문이나 광희문으로 들어서는 관문 구실을 했으나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 * 중랑천에 운동하러 나온 시민들에게도 좋은 볼거리이자 의미 깊은 역사 유적이다.* 하천의 폭이 넓어져 복원한 다리는 본래보다 길어졌다.* 중랑천 제방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살곶이다리* 화살이 꽂혔던 자리라는 뜻의 살곶이다리* 세종 2년(1420)에 공사를 시작해 성종 14년(1483)에 완공한 살곶이다리* 시간이 지났어도 사람이 건너는 다리 본래의 기능은 변함이 없다.* 물이 줄어들면 기둥돌 아래 포석 면이 드러나 ‘이층다리’라고도 불렸다.* 노란 붓꽃과 살곶이다리가 잘 어우러진다.* 평지처럼 평평하게 놓였다 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유적지 | 문화재 | 제반교 | 화살 | 돌기둥 | 성동철교 |전곶교 | 살곶이다리 | 중랑천 | 세종 | ode8&sClssCode226공간개요 조선조 세종 2년(1420)에 공사를 시작해 성종 14년(1483)에 완공한 교각이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다리의 돌들을 경복궁 중건에 가져다 쓰며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1967년 사적 제160호로 지정했으며 1972년에 복원했다.한국어 안내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및 설명이 적힌 안내판유적지 지정 사적 제160호지정 내역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했다. 한천(漢川 : 현재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한강을 약 2m 앞둔 곳에 놓았으며, 지금의 서울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있다. 조선 시대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고 일명 살곶이다리라고 한다. 1420년(세종 3) 세종의 명령으로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감독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나 강의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교기(橋基)만 세우고 중지했다가 63년 후인 1483년(성종 14)에 완성했다. 길이 78m(258척), 너비 6m(20척)였다. 높이 1.2m인 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돌 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경상도 봉화(奉化)에 이르는 간선로(幹線路) 위에 놓여 있었다. 즉 동대문이나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 후 만나는 큰다리로서 그 후 송파진(松坡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충주 방면으로 연결되었다. 국왕이 군사훈련 참관 등을 위해 뚝섬[纛島]으로 행차할 때도 이용하였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다리 절반의 석재를 가져다 쓴 후 버려져 있었는데 1972년 서울시에서 복원하였으나 원형 그대로 복구되지는 못하였다.소요시간40관리기관 성동구청관광팁 살곶이다리 돌기둥의 건축 미학 살곶이다리 옆으로는 갈대밭과 하천변에 닿을 수 있는 샛길이 있다. 그 길을 이용하면 살곶이다리의 아랫부분으로도 이어지는데, 포석과 마름모형 구조, 정 자국 등 돌기둥에 나타난 옛 건축 공법을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없음 성동철교의 노을 살곶이다리 가까이에는 성동철교가 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지나다보면 한양대역에 이르기 전 차창 밖으로 살곶이다리를 볼 수 있다. 반대로 해질녘, 살곶이다리에서 성동철교를 바라보면 붉은 노을 사이로 철교와 지하철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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