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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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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사나사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47.1km
사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행적구역으로는 옥천면 용천리 304번지이다.

용문산의 주봉인 백운봉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옥천리에서 용천리를 거쳐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 즉 용천(龍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함왕성지(咸王城址)가 있는 산간 평지가 나타난다. 속칭 절골이라는 해발 210m 안팎의 평지에 사나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나사는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29)이 923년(태조 6)에 그의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절은 창건 당시 노사나불상과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절이름을 사나사라고 한 점과 노사나불상을 모신 것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여주며 이로 미루어 볼 때 화엄종 계통의 도량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와 관련 있는 전설이 사나사에 전해지고 있으니, 김용기가 지은 「경기도 명승고적 연혁사」(1955년 간행)에 실려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옛날 삼국시대에 스스로 화주승(化主僧)이라 칭하는 한 범사(梵師)가 이 땅에 사찰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기 위하여 백일 간 기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공중에서 천장노사나불(天藏盧舍那佛)이 출현하였음으로 즉시 그 불상을 조성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즉위한 지 2년 되는 해인 919년에 수도 개경에 10대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가운데 사나사(舍那寺)란 이름도 있어 흥미롭다.

어쨌든 사나사는 고려시대 양평지방의 호족인 함규(咸規)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사세(寺勢)를 떨쳤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나나의 경내에는 지금도 함씨각(咸氏閣)이 있어 제향을 드리고 있으며, 사나사 주변에는 함왕성을 비롯하여 함왕혈 등 관련 유적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사나나에 관한 가장 맏을만한 자료는 고려말에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관련된 것으로 1367년(공민왕 16)에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다는 사실이다. 현재 이 절에는 태고 즉 원증국사(圓證國師)의 부도와 그 탑비가 모셔져 있다.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나사가 ‘불우(佛宇)’조에 실려 있느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법등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몇 차례의 화재로 말미암아 고쳐 지은 기록들을 1936년에 쓰인 「사나사중건상량문」이나 「봉은사본말사지」에서 볼 수 있다.

20세기 초 즉 정미년(1907)에 일어난 의병투쟁 때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불에 타 깨졌으며, 사찰의 모든 건물도 불타버렸다. 이후 법당과 조사전을 지으면서 사세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6ㆍ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사찰이 불타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대웅전, 산신각, 함씨각을 세웠다. 1993년에 주불전을 새로 크게 지으면서 편액도 사격(寺格)에 맞게 대적광전으로 바꾸었고, 종전의 대웅전은 동쪽으로 옮기면서 역시 미타전으로 바꾸었다.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며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가운데 두고 문수, 보현 보상좌상을 모셨고 그 뒤에는 후불탱을 장엄하였다. 또 좌우 벽에는 신중탱화와 지장탱화를 장엄하였다.

미타전은 원래 대웅전이던 건물을 옮겨서 새로 꾸민 목조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이고 안에는 아미타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셨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목조건물이며 맞배지붕인데, 안에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시고 있다. 함씨각은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며, 안에는 함씨 시조의 영정을 모셨다.

그밖에 대적광전 앞 마당에는 삼층석탑, 원증국사석종과 비가 있고, 대전광전의 오른쪽에는 석조미륵여래입상이 서 있다.

경내를 벗어나면 당상계불량비와 기념비가 서 있고, 그리고 절에 들어오는 길목에 수도산 봉은사의 일주문을 최근에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