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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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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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주소
  • 서울 종로구 옥인동 송석원길 32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3.1km
** 길이름 유래 : 조선 광해군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 옥인동 일대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설이 제기되자 광해군이 이 왕기를 누르기 위해 궁을 짓고 그 이름을 자수궁(慈壽宮)이라 하였다.

** 스토리 : 자수궁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여! 내 말 좀 들어보소. 가는 길에 인왕산 치마바위 한 번 쳐다보며 내 넋을 기린다면 천추의 한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소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왕기가 서렸다는 이 터전에 광해군이 왕기를 누르기 위해 지었다는 자수궁(慈壽宮) 사라진지 오래니 그 터에 서서 한 많은 왕후의 신세한탄을 들으심도 가히 나쁘지 않을 것이오.

나는 왕비로 책봉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어 평생을 죄인의 딸로 살다 간 비운의 여인 단경왕후요. 왕후이기 전에 한 여자인 내 일생이 기구하고도 기구하여 이 길에 넋으로 남았다오. 잘 보시오. 자수궁 길에서 인왕산 정상을 쳐다보면 또 하나의 돌산처럼 둥글넓적한 큰 바위가 보이지요? 그것이 내가 50년 동안 붉은 치마를 내다널었던 치마바위라오. 오로지 내 남편인 중종께서 보시기를 바라면서 말이오.

내가 왜 그리 되었는지 들어 주시오.

이야기는 우리 대군저하의 처 고모부이신 연산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좀 복잡한 것 같지만 실은 간단합니다. 존칭은 잠시 생략하렵니다. 저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며 연산군의 비가 아버지의 누이인 것입니다. 나는 연산군 아내의 친조카이며 연산군은 내게 고모부가 됩니다. 아버지는 연산군의 측근으로 영의정까지 올라가 세도를 부렸지요. 언젠가 다른 세상이 온다는 것을 몰랐을 아버지가 아니었건만 너무 갑작스럽게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우의정 강구손이 좌의정인 아버지 신수근에게 물었지요.

"좌상대감,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시오?"

그의 의중을 모를 리 없는 아버지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처럼 내뱉었답니다.

"주상이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이오."

아버지는 더 참을 수 없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그렇게 대답했다는군요. 비통한 심정인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겠지요. 사실 아버지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딱한 처지였으니까요.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옹립하려는 모의를 하고 있던 훈구파의 박원종이 강구손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떠본 것입니다. 아버지의 누이는 연산군의 비 신씨이고, 딸은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 바로 나인 거죠. 고민 끝에 아버지는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는 결심을 굳혔는데 그것은 반정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정 세력과는 원수가 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아버지는 성희안, 박원종 등 반정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연산군은 폐위 되었습니다.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연산군을 제거하려는 세력의 정점에는 내 남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있었습니다. 반정세력에게는 명분과 정통성을 주장하기에 안성맞춤인 대상이 바로 성종(成宗)과 세 번째 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사이에서 태어난 진성대군이었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를 죽게 한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다 사사할 당시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있었던 진성대군이었지요. 대군의 부인인 내가 연산군의 아내 신씨의 조카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진성대군도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처럼 진성대군의 목숨을 지켜준 일등공신인 내가 남편 진성대군이 중종(中宗)으로 즉위하면서 불행에 빠진 것입니다. 반정 세력을 반대하다 죽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나이 12살에 1살 어린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린 나는 ‘대군저하’라고 부르며 살다가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자동적으로 왕비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는 ;전하‘라고 불렀으니 단 한 번도 ’서방님‘이라 불러보지 못한 것이 제일 원통합니다. ’전하‘라는 호칭도 겨우 7일 동안뿐이었지만. 반정 공신의 압력에 못 이겨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되어 사가로 내쫓겼으니까요. 고모와 나는 일주일 간격으로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겁니다. 내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가봐 그들은 두려웠던 겁니다.

남편인 중종은 나의 폐출을 막기 위해 반정공신들에게 아첨 아닌 아첨을 하며 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연산군 측근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반정공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흥청 기녀들 300여명을 그들의 노비로 보내주었지만 내 폐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왕위를 물리면 물렸지 중전을 폐위 시킬 수는 없소.”

중종과 반정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전하, 전하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종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역적 신수근의 딸 신씨의 폐위를 윤허하여 주옵소서.”

잘 못하면 남편까지도 다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 해왔지요. 결국 내가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나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이 원하는 성군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실 수만 있다면 신첩이야 어디 간들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너무 심려 마시옵고 저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소서. 전하께서 자리가 굳건해지면 신첩을 다시 부르시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지금은 전하의 뜻을 꺾는 것이 현명할 때인 줄 사려 되옵니다.”

“어린 나이의 대군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당신을 저들은 어찌 내게서 떼어 놓으려 하는 것이오? 장인어른도 저 지경이 되셨는데 당신의 심정이 어떨지 나는 잘 알고 있소.”

고모부 폐위되고 고모는 폐비되어 궁 밖으로 폐출되었으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폐위되는 일까지 채 며칠도 걸리지 않고 순식간에 밀어닥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는 피비린 내나는 소용돌이였습니다. 나는 반정으로 남편과 친정 모두를 잃은 가장 큰 피해자이지요.

1506년 9월경 궁궐을 떠나서 몸종 하나만 달랑 데리고 매일 인왕산을 오르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나 단경왕후 신씨였습니다. 중종 반정공신들에 떠밀려 남편 중종을 두고 인왕산 아래 하성위 정현조 집으로 쫓겨 간 것입니다. 그곳에 머물게 된 나는 경복궁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산에 올랐습니다. 중종도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좋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경회루에서도 인왕산이 훤히 잘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리운 마음에 혹시 임이 보실까 하여 남편이 평소에 좋아하던 다홍치마를 인왕산 제일 높은 바위에 넓게 펼쳐 깔아놓는 일이었지요. 다홍치마를 널어놓고 경복궁만 바라보다가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아침 하녀를 시켜 다홍치마를 바위에 널고 저녁이면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습니다.

“인왕산 저 꼭대기 바위에 붉은 것이 무엇이더냐? 벌써 진달래가 피었을 리는 없을 테고.”

하루는 중종이 경회루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다가 신하에게 물었답니다. 신하는 이미 나의 다홍치마 사연을 들은지라 그 이야기를 전했겠지요.

“그렇구나. 저 붉은 색이 중전의 치마란 말이지. 중전도 짐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 못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중종은 마음 뿐 아무런 힘이 없었죠. 준비된 제왕도 아니었고요. 우리 사이에 후사가 있었으면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더니 어느 날부터 중종은 술과 궁녀에 싸여 세월을 보내다는 소문이 자자하더이다. 서서히 나를 잊어가는 느낌이 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였겠지요. 너무나도 남편이 보고 싶은 마음에 중종이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러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시녀와 나는 말죽을 쑤어 그곳으로 갔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님이 탄 말이 지나갈 때쯤 그 길에 말죽을 놓아 그 죽을 먹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중종이 그 연유를 몰라 물었다지요.

“이것이 무엇이더냐?”

“사가에 계시는 마마께서 이것이라도 말에게 대접하고 싶다 하시어......”

“그래?”

신하도 두 사람의 그리움을 잘 아는지라 말죽을 놓아주었는데 중종은 할 말을 그저 속으로 삭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더이다.

얼마 뒤 친정인 할아버지 신승선의 집으로 옮겼지만 인왕산 바위에 다홍치마 너는 일은 하녀를 시켜 하루도 거르지 말라 당부했습니다. 중종이 숨을 거두는 날까지 바위에 치마를 내다 널었습니다.

친정에는 내 고모인 연산군의 아내 신씨도 폐비 되어 돌아와 살고 있었지요. 왕비에서 폐위된 두 여인이 한 집에서 지내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연산군 부인인 고모는 남편의 지위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조카사위(중종)가 미웠겠지만 조카와 자기가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선지 많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 신승선은 성종 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인물입니다. 명문가 출신인 나는 왕비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7일간의 짧은 영화를 끝으로 50여 년간 그늘 속에서 춥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38년간 왕의 자리를 보존한 중종이 1544년 11월 14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남편이 궁중으로 나를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녀를 데리고 달려갔지만 문정왕후의 명에 의해 이미 창경궁 내의 내실로 옮겨진 중종은 그 누구도 전하 곁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점쟁이가 사람의 출입을 금하라 했다는 이유로 조정의 대신이나 병을 살펴야 할 의원들조차도 전하를 알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녀가 전하의 환우를 살피고 있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그립던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이라고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신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꼭 다시 부르겠다는 남편의 말만 믿고 그리움을 삭이며 한 많은 세상을 살아왔는데 결국 병을 얻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가는 중종이 극락왕생 하시기를 빌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궁궐에서 쫓겨난 지 50년이 지나 나이 70세가 훌쩍 넘어 나 역시 세상을 접으니 그 때가 1557년 12월의 일입니다. 그렇게 나는 갔습니다. 나는 사라진 역사 속으로 묻혔지만 백성들이 나를 기억하는 건 다홍치마를 내걸었던 인왕산 바위에 얽힌 전설뿐입니다. 이런 사연으로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억울하고 한 많은 치마바위의 전설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왕기가 서린 자수궁 길에 서서 내 넋은 이렇게 신세한탄을 하며 떠돌고 있습니다.

※ 자수궁길에는 자수궁이 있었다는 유래 외에 이야기 거리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인왕산 치마바위로 갈 수 있는 자수궁길은 가장 가까이에서 바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더 가까이 가면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고 더 멀리 가면 선명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치마바위에 얽힌 전설을 역사의 사실과 접합하여 이야기를 꾸몄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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