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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계곡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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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무릉계곡마천
  • Mureung Valley Ma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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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경남 함양군 마천면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49.0km
마천(馬川)으로 가면 아무리 무더운 여름에도 소름이 오싹할 정도의 시원한 청량감을 맛볼 수 있다.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마천은 행정구역상 함양군 마천면이다. 마천으로 갈수 있는 방법은 함양으로 들어와서 남원시 인월면을 거쳐 들어가거나 아니면 산청군 생초면에서 유림.휴천면을 거쳐 가는 두가지의 코스가 있다.

천왕봉을 위시한 고봉준령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여기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하나로 만들어 내는 곳이다. 특히 1백리 지리산 주릉의 북쪽 비탈면의 물줄기가 모여 아름답고 시원하기 그지없는 내(川)를 이루는 곳이고 보면 무더운 여름날 마천의 풍광은 가히 천국이 아니랄 수 없다.

매년 여름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드는 피서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즐비한 계곡류의 폭포수와 검푸른 소, 그리고 울창한 원시림이 토해내는 청량감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천의 으뜸 피서지는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과 한신계곡의 초입부인 백무동, 그리고 용유담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벽소령 아래의 삼정리 마을과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삼정리계곡과 함양군에서 조성한 지리산 자연휴양림, 추성동에서 하봉으로 가는 길목인 광점동, 얼음터, 국골 등 이루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추성동은 지리산 최대의 계곡인 칠선계곡과 국골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여름철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더욱이 추성동에는 계곡과 벽송사, 서암(살아서 볼수 있는 극락의 절경), 가락국 최후 임금의 피난처였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어서 더욱 의미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추성동이 등산객이나 피서객들의 편의도모를 위한 민박촌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예전엔 칠선동, 두지터, 광점동, 얼음터 등과 더불어 화전민들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유명한 마천곶감, 마천산나물, 마천한지(문종이)등의 집산지 역할을 다한 곳이다.

추성동 위쪽에 위치한 국골에는 연대를 알수 없는 석성이 있는데 바로 가락국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피난처 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지명이 국골이라고 붙여졌다 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왕봉 고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명 추성 또는 박회성이라 하며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마소가 갈 수 없는 곳이며 안에는 창고터가 있다. 세상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이는 국골의 산성터를 말하는 것으로 전설처럼 가락국 최후의 왕인 구형왕이 피난해 군마를 훈련시키던 곳인지의 여부는 쉽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일대에는 두지터(쌀을 담는 두지를 지칭)와 얼음터 (석빙고와 같은 기능을 한 것으로 전해짐)가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의 식량창고와 여름철 음식물 저장고 역할을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피서지로 각광받는 칠선계곡과 추성동을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되새겨 봄직하다.

마천면소재지에서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의탄교이다.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 의중동 등이 있는 의탄마을이 나온다.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일찍이 5백년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 곳을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이듬해인 음력 4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탐방에 오른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의탄마을에 당도해 그의 심경을 글로써 털어 놓았다. ...서너 곳의 모퉁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은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담쟁이 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는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東山: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성 싶다.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된 것 같다. 점필재 김종직을 유혹했던 곳이 바로 의탄마을이다. 점필재는 여기서 동행했던 유호인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에서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가 어우러져 으뜸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김종직 일행은 당시 의탄마을에 당도하기에 앞서 용유담을 지난다. 용이 노닌다는 용유담은 지리산 물을 받는 시내중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 명경지수같은 맑은 물이 용틀임 하듯 흘러내리는 용류담을 보고 그냥 지나칠 문인은 아무도 없다.

점필재 보다 17년 후에 두류산 탐방에 나섰던 김일손은 그의 "속두류록"에서 용유담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내(임천)의 북쪽, 아슬아슬한 언덕을 따라 내려가 용유담에 이르렀다. 못은 남에서 북으로 깊이 패어 아득하고 바윗돌이 기이하여 인간세상에서 멀리 천리나 떠나온 듯 했다. 못가의 돌들이 흡사 고기 비늘 무늬를 새긴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독처럼 움푹 파이고 솥모양을 닮아 보이기도 해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이 곳의 전설을 믿는 백성들은 이러한 돌이 용의 그릇으로 생각하지만 그 것은 계곡의 급한 물살이 오랜 세월동안 돌을 구르며 깎고 파이게해 마침내 여러 모양을 만들었음을 인식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어찌 사실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황당한 이야기에만 빠져드는고? 라고 했다. 김일손의 애민정신과 용유담의 아름다움에 심취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용유담에는 김일손이 우매한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겼던 전설이 숱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홉마리의 용이 이곳에 살면서 하루는 크게 싸워 커다란 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태초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는 지리산에서 모여드는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었다.

성난 물줄기는 바위와의 싸움을 시작해 지리산 골짝마다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노도와 같이 바위를 향했다. 바위는 깎이고 구멍이 뚫리고 엉망이었으나 그렇다고 태산의 의지를 굽히지는 않았다. 어느날 하늘이 울고 땅이 쪼개지듯한 큰 부딪힘이 있은뒤 바위와 물은 서로 대립만 해온 자세를 풀고 공생하는 길을 생각해냈다. 용유담은 이렇게해서 물과 바위가 합작한 명소가 됐다. 용유담을 아끼는 이 고장사람들은 산기슭에 구룡정이란 정자를 세워 이들 전설을 소중히 전해오고 있다. 마천의 명소는 이들 외에 많이 산재해 있으나 오늘날에는 한신계곡의 물줄기가 모이는 백무동이 으뜸이다.

풍부한 수량과 수림이 장관인데다 마천골 가운데 가장 먼저 교통편의 시설이 갖춰진 탓에 백무동은 끊임없는 인파가 연중 끊이질 않는다. 마천골에는 어느 곳에 가든 맑고 차가운 물줄기를 만날 수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용류담에서 유림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문정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앞의 다리와 주변 하천은 경관이 뛰어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며 그 아래 사라진 대찰 엄천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남호리가 나오고 비운의 왕자였던 한남군이 유배생활을 하였다는 새우섬이 나온다.

지금도 남호리 3개마을에는 엄천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조선시대의 학자 김일손은 이 곳을 유람하면서 "왕대 숲속에 고색창연한 엄천사라는 절이 있는데 땅이 넓고 편편해 가히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으나 지금은 절터의 부도 등 사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새우섬은 조선왕조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으로 왕족이면서도 찬탈과 단종복위 운동을 주장하다가 희생되었던 한남군(漢南君)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지금은 섬이 아닌 강언저리로 변하여 있으나 한남군이 유배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감한 뜻을 기려 새우섬이 있는 이 마을을 한남마을이라 한다

한남군은 세종11년(1419년) 세종대왕의 18왕자 가운데 12번째로 태어났다. 문종이 병약하여 일찍 붕어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좌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이에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나 세조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이 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마음의 병이 깊었는지 유배 4년만인 세조5년(1459년)에 몸이 쇠약해져 일생을 마쳤다

묘소는 함양읍 상림 뒤편의 산 언저리에 자리 잡았고 경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65호로 지정되어있다. 함양의 유림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1867년 이곳에 정자를 세우면서 한오대(漢鰲臺)라 편액하고 추모하여 왔으나 1936년 큰 물로 정자는 물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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