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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 전투지 - 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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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호남의병 전투지 - 어등산
  • Eodeungsan Mountain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광주 광산구 서봉동 서봉동 산113 일대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67.5km
호남의병 전투지 - 어등산(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호남 의병들의 본거지)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끌어 내리고, 순종을 황제에 앉혔다. 곧이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측의 전권대신인 이완용이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의 차관정치가 시작되어 우리민족의 반일감정은 더욱 높아졌다. 곧이어 전격적으로 단행된 군대해산조치에 반발한 시위대와 진위대의 무장봉기가 이어졌다. 해산을 거부한 군인들이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전국의 산과 들에는 의병의 함성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눈앞에 둔 일제는 의병항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다양한 방법으로 진압에 나섰다. 그들이 1907년 후반을 기점으로 엄청난 분량의 진압 기록을 남긴 점만 보더라도 그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3년 동안 일제에 맞서 1,313회나 되는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호남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의병을 소탕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는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것이 1909년 9월 1일부터 1909년 10월 25일까지 전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인해 호남의병은 5백여 명이 처참하게 전사하고, 체포되거나 자수한 숫자는 3천명이나 달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고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어등산 전투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있어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의병들이 은신하던 바위굴은 방치된 지 오래되어 거의 묻혔고, 토굴 역시 상당 부분 무너졌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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