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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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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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이상정 집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대구 중구 계산동2가 계산동2가 90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36.7km
부모님의 생각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여침(旅枕)을 적실 뿐이네
병든 몸이 이향(異鄕)에 십년 손 되니
아! 나의 속 타는 것 뉘라 알이거나



 

 위의 시는 이상정이 중국에 망명하여 쓴 것이다. 다른 가족들을 두고 홀연히 중국으로 떠나 활동하였던 이상정의 내면적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정을 언급할 경우에는 흔히 그의 형제들과 함께 논의된다. 장남인 이상정에 이어, 차남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이름 높은 저항시인이었고, 3남 이상백(李相佰, 1904~1966)은 역사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이며 체육인으로도 저명하였다. 4남 이상오(李相旿, 1905~1969)는 수렵가이면서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4형제가 각기 한국근현대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갖춘 전문가이며 문필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상정(1897~1947)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독립 운동가는 아니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중국군에 복무하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며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1926~1927년에는 펑위샹[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고, 장제스[蔣介石]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또 김구․김규식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충칭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8월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살치하자, 그는 신익희, 장건상, 이현수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충칭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