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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팔균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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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신팔균 고택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논실안길 58-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80.6km
신팔균(申八均, 1882. 5. 19 ~ 1924. 7. 2)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강계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였다.

그는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강당고개에 보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보명학교는 신팔균이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생각으로 친척들을 설득해 평산 신씨 종중재산으로 설립한 것이다. 신팔균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3년간 민족정신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때 보명학교로 사용한 건물은 공주판관을 역임한 신욱이 1897년에 설립한 학당을 확충한 것이다.

신팔균은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하자 보명학교를 동생인 신가균과 신필균에게 맡기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동지 38인과 함께「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22년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장쭤린〔張作霖〕군대의 습격을 받아 결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현,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이며, 그의 관원이력서에는 거주지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로 되어 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그의 고조부 홍주는 훈련대장을 지냈고, 증조부 의직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특히 그의 조부 신헌(1810~1884)은 무과에 급제한 후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 주요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전권대사로서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이다. 또 초기 개화파 인사로서 국방문제 등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무반이었으나 어느 문인 학자 못지않은 학문으로 유장(儒將)이라고 불렸다.

신헌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신팔균의 아버지인 신석희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신팔균은 동생으로 가균과 필균이 있었는데, 가균은 그와 함께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무인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가 무관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팔균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제 2기생으로 1903년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육군무관학교 입학자는 정부 유력자의 친족이나 양반 지배 계층의 자제들이었고, 경쟁률도 높아 1898년 8.5:1, 1906년에는 14:1을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3월 시위대 제 3대대 견습무관으로 시작하여, 1906년 7월 20일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1907년 3월 6품, 4월에는 보병 부위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대부분의 장교는 해임되고 장졸은 귀가조치 되었다. 황실 의장 및 근위를 담당하는 1개 대대만이 존치되었다. 신팔균은 이후 1909년까지 군대에 남아 정위까지 진급하지만 결국 퇴역하였다.

신팔균이 대한제국 군대에서 시위대 등 요직에 근무하고, 군대해산 이후에도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퇴역이후 교육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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