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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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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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안희제 생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37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64.2km
1945년 광복이 되고 백범 김구가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한 사람은 최준이었다. 안희제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사람이 바로 최준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던 안희제는 백산상회 등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지인 ‘경주 최부자’ 최준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은 최준이 경교장에 들어서자 김구는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윽고 김구는 안희제를 통해 보내준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꺼내 펼쳐보였다. 최준도 나름대로 자신이 안희제에게 주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금 명세서를 갖고 있었다. 최준은 무의식중에 김구가 보여준 장부와 자신의 자금명세서 수첩을 대조해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최준이 안희제를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안희제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금으로 수차례 가져간 돈이 그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최준은 안희제가 활동자금과 여비로 상당액수를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준 자금의 절반이라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구가 보여준 장부와 자기 수첩을 대조해 보니 자기가 안희제에게 준 자금의 한 푼의 차이도 없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된 사실을 알게 되자 감동의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준은 마침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경교장 2층 마루로 나가 남쪽으로 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남 의령의 안희제 묘소 쪽을 향해 목 놓아 울며 말했다.

“백산! 준을 용서해 주게! 내가 준 자금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절반이라도 전달되었으면 다행이라고 늘 생각한 준을 용서해 주게!”

안희제(安熙濟, 1885년∼1943년)는 경남 의령 출신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고, 이후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서상일·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국권이 피탈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안희제는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 모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를 설립한 뒤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장학회인 기미육영회를 설립했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하여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대종교 교인이었던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체포되었고, 고문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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