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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히로부미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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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伊藤博文公墓所
  • Ito Hirobumi Cemetery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아시아 일본 일본 6 Chome-10 Nishiōi, Shinagawa-ku, Tōkyō-to 140-0015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157.9km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いとう ひろぶみ,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초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도시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나 ‘소로카쿠슌준’(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 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6월 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1]에게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사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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