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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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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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현지어
  • 屈子祠
  • Qū zi cí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후난 웨양 미뤄시 汨罗市城西北玉笥山顶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612.3km
굴자사는 한편 굴원묘라고도 한다. 애국시인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춘추전국시기 초나라 시인 굴원이 류방될때 루천강반의 옥사산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굴원은 나라를 구할 가망성이 없음을 느끼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에 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옥사산위에 사당을 지었다. 부지면적은 1354m²이고 건축은 벽돌과 나무구조로서 장엄하고 소박하며 숭엄하다. 지나는 길벽에는 많은 석비가 그려져 있고 후세인들 이 굴원의 시문을 적어 놓았다. 굴원상은 후전에 있다. 굴원사원은 이미 전성 청소년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고 있다.

굴원사는 악양시 남쪽에서 약 50km, 골라시 서북쪽에서 20km 떨어진 골라강 오른쪽 기슭 옥사산 위에 있다. 청나라 건륭 21년(기원 1756년)에 이곳에 옮겨다 지었다. 원래는 굴원이 돌을 몸에 품고 멱라강반 물에 몸을 던진 곳이다. 사원은 벽돌과 목조구조로 되였으며 전반 건축구조가 엄밀하고 꽃 조각이 섬세하다. 이것은 청나라 건축의 특색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 굴원사옆에는 굴원에 대한 력대인민들의 추모를 보여주기 위해 새로 굴원비림을 개척하였다.

굴원(屈原)

굴원(기원전 3407)은 이름은 평이고 별호는 령균(靈均)이다. 춘추전국시기 초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의 첫번째로 되는 위대한 애국시인이다. 그는 초나라 좌도라는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삼려대부로 있었기에 삼려대부라고도 부른다. 그가 생활하던 시기는 전국말엽, 진, 초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헌령기초의 중임을 맡았던 굴원이 정수따위들의 무함을 받아 초회왕에게 소원되였고 초경양광에 이르기까지 선후하여 두 차례나 추방되였다. 두번째 추방되였을 때 서울 령도가 진나라 백기 장군에게 공락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굴원은 멱라강(汨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그 날이 바로 5월 5일 단오날이였다. 악양루 안내원 아가씨는 사람들이 지금도 5월 5일 단오가 되면 위대한 애국시인 굴원을 기념하여 종자(대잎이나 갈잎에 찹살을 싸서 쪄 만든 음식)를 동정호에 던지고 있는데 그것은 물고기더러 강에 몸을 던진 불상한 굴원의 몸을 뜯어 먹지 말고 떡이나 먹으라는 뜻이라고 관광객들에게 해설해 준다. 력사적으로 굴원을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마천은 굴원을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뿌린다고 한 말은 지당하다"고 하였고 리백도 "초왕궁전 간데 없고 공산만 남았는데 굴원의 사부는 해와 달인양 떠있고야"라고 절찬하 였다. 1953년 굴원 서거 223주년에 즈음하여 전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계 4대문화명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기념하였다. 그의 시작품은 1852년 윈 황실과학원에 독일문으로 처음 번역출판한 이래 이미 프랑스어, 이딸리아어, 로씨야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출판하였다. 이 점은 세계문학사에서 굴원과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똑똑히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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