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人民日報'를 '런민일보'나 '런민르바오'로 적어 中 고유명사 표기
무정부 상태는 외래어 표기법 때문… 생소한 현지음보다 고유 한자음 살려야





이달 초 신문들은 대만에 살고 있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후손들이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선생을 모시는 제사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이런 식이었다.

'이날 첫 번째 잔은 공자의 79대 종손 쿵추이창(孔垂長·37)이 올릴 예정이었다.… 맹자의 종손 멍링지(孟令繼·34)는 "제사 절차가 대만과 달라 신기하다"고 말했다'.

공자와 맹자의 본명은 공구(孔丘), 맹가(孟軻)이다. 그들의 후손이라면 조상의 성(姓)과 같이 '공씨(孔氏)' '맹씨(孟氏)'로 불러야 옳다. 그런데 신문들은 '쿵씨' '멍씨'로 표기했다. 예(禮)를 중히 여기는 유가(儒家) 입장에서 보면 한집안의 조상과 자손을 이처럼 다른 성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만저만 실례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신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현행 '외래어표기법'의 중국 인명·지명 표기 규정은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경계로 이전 사람은 우리식 한자음으로, 그 이후 사람은 중국 현지 발음대로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규정에 충실히 따른다면 2500년 전에 살았던 공자와 맹자는 공씨·맹씨, 1970년대에 태어난 그들의 자손은 쿵씨· 멍씨가 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언론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를 '인민일보(人民日報)'라 불렀고, 그렇게 썼다. 그 자매지 이름은 '환구시보(環球時報)'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들을 '런민일보' '환추시보'라고 쓰는 곳이 부쩍 늘었다. 한발 더 나아가 '런민르바오' '환추스바오'라고 적는 경우도 많다. 이 역시 중국 고유명사는 현지음대로 적는다는 외래어표기법 때문이다. 최근 한 국내 저자가 쓴 중국에 관한 책은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와 '중국경영보(中國經營報)'를 '중궈칭녠바오' '중궈징잉바오'라고 표기했다.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의 '창홍타흑(唱紅打黑·사회주의 이념 찬양 노래 부르기와 조직범죄 척결)' 운동을 한자 없이 '창훙타헤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옆에 한자를 쓰지 않아도 '인민일보'라는 말만 보고 그게 신문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 '중국청년보' '중국경영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런민르바오' '중궈칭녠바오' '중궈징잉바오'라고 하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아는 한자음을 버리고 중국 현지 발음을 따라 표기한다는 것은 이런 손해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매체마다, 또는 한 매체 안에서조차 같은 고유명사를 '인민일보' '런민일보' '런민르바오' 식으로 제각각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고유명사 표기의 춘추전국 시대요 무정부 상태다.

규정에 따르면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불이익을 보게 된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그 규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 고유명사 표기 규정이 그런 꼴이다. 어문 당국이 책상머리에 앉아 이 규정을 만든 1986년은 한·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중국의 고유명사를 부를 일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나라 사이에 일주일에 비행기 700대가 뜨고 매일 1만6000명이 오가며, 중국 관련 굵직한 뉴스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수십만~수백만개에 달할 중국 고유명사를 사람마다, 매체마다 취향과 소신에 따라 저마다의 표기 방식을 고집해 쓴다면 그 혼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동안 잘 써온 한자음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생소한 중국 현지음을 쓰기로 하면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게 문제의 시작이다. 국립국어원은 이제라도 중국 고유명사 표기 규정의 정당성을 다시 따져보고, 전면 수정을 하든가 보완책을 내놓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기사제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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