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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굳세어라 국제 시장
철인에 도전하다
2013년 5월 23일 아침 6시. 수온이 상당히 낮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백사장 너머에서 한 남자가 바다 수영을 즐기고 있다. 동백섬 조선 비치 호텔 앞에서 미포까지 수 킬로미터를 왕복하고서도 그는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다. 수영을 마친 그는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신축 아파트 36층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70여 평에 이르는 집 안에 들어서니 마치 바다 위에 서 있는 듯 착각이 든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독일제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 그는 부산진구 전포동에 위치한 동우식품의 정훈[43] 사장이다. 얼마 전까지 골프와 수영을 즐기던 정훈씨는 요즘 철인 3종 경기에 푹 빠져 있다. 몇 달 뒤 열릴 대회에 직접 선수로 출전하기 위해 몸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퇴근 후에는 마라톤과 사이클 연습도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주말에는 운동을 잠시 접어두고 가족과 함께 교외로 캠핑을 떠난다. 날씨 등으로 캠핑을 못하게 되더라도 주말에는 무조건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렇게 중산층의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20여 년 전에는 이런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던 그였다. 정훈씨는 부산에서도 대표적인 빈민가인 서구 아미동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한 동네의 다른 아이들처럼 그의 부모도 먹고살기 바빠 자식들 공부에 그다지 신경을 쓸 형편이 못되었다. 그는 썩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집에 여유도 없는 터라 취업을 위해 공고에 진학을 했다.

3학년이 되자 친구들이 하나둘씩 공장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어쩐지 공장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아 보였다. 성격 좋고 항상 밝은 아이였던 그는 공장보다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이 더 적성에 맞아 보였다. 그러다 졸업을 했고, 이후로도 한동안은 진로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다. 방황 끝에 결국 군대를 갔다. 군에서 그는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재력가 노인을 만나다
1993년 군대에서 제대한 정훈씨는 곧장 일자리를 찾았다. 23살의 갓 군에서 제대한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정훈씨가 하는 주된 일은 노인의 운전기사가 되어 병원 치료를 보조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더러는 집안의 잡다한 일도 처리했다.

군에 가기 전부터 진로 문제를 고민해 오던 정훈씨는 진즉에 전문대라도 진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사람들 보기에 젊은 사람이 노인 돌보는 일을 한다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일 리 없을 터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일하는 시간이 탄력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돈도 벌면서 시간을 잘 활용해서 공부를 해볼 요량이었다. 정훈씨의 일터는 노인의 집인 용두산 맨션이었다. 자연스레 노인의 가족과도 가까워졌는데, 특히 그에게 월급을 주는 노인의 아들과 많이 가까워졌다. 노인의 아들은 젊은 사람이 아파트에 틀어박혀 노인과 시간을 보내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글서글한 정훈씨의 성격이 맘에 들었던지 자신의 사업장에 나와서 일을 해보라고 권유를 했다.

노인의 아들은 광복동에서 R셔츠라는 상당히 규모가 큰 맞춤 셔츠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광복동 거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맞춤 양복점의 천국이었다. 한참 때는 중앙동에서 광복동을 거쳐 국제 시장에 이르기까지 300여 곳의 맞춤 양복점이 성업했지만, 1990년대부터 기성복이 밀려오면서 현재는 10여 곳도 채 남지 않았다. 또한 광복동에는 로얄셔츠, 시대셔츠, 시민셔츠 등 수많은 맞춤 셔츠점이 맞춤 양복점과 보조를 맞추며 성업했다. 정훈씨는 노인의 아들, 이제는 사장님의 제안에 바로 오케이 하고는 하루아침에 노인의 운전기사에서 옷 가게 점원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정훈씨와 옷과의 인연이 20여 년을 이어간 것이다.
낙하산 인사
정훈씨는 처음에는 용두산 맨션과 R셔츠 매장을 오가며 일을 했다. 주로 셔츠 매장에서 일을 했지만 노인이 병원에 간다거나 특별한 일이 생기면 아파트에 가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직원들과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출퇴근이 자유롭고 업무 시간에도 함부로 외출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사장이 총애하다 보니 서로 간에 상당한 이질감이 있었다. 직원들은 그를 시기하고 경계했다.

셔츠 매장에서 일하는 것이 생각 외로 정훈씨의 적성에 잘 맞았다. 밝은 성격은 물론이고 체격 조건이 좋으며 귀엽고 잘생긴 외모 덕에 하나둘씩 단골손님도 생겼다. 단골손님 중에는 운동선수들이 많았다.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 김용희 감독과 염종석 선수, 강호동을 키워낸 일양약품 씨름단 김학용 감독 등이 그의 단골이었고, 자유건설 사장 같은 지역 유력 인사와 폭력 조직 칠성파 건달들도 자주 찾았다. 특히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은 최고 단골손님으로 매번 매장을 찾을 때마다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할 만큼 그를 좋아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점점 입담도 좋아졌고, 여기에 성실함을 무기로 해서 그는 서서히 고참 직원들을 제치고 매장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맞춤옷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특히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머 등을 앞세운 골프 웨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광복동에도 하나둘씩 골프 웨어 브랜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세를 읽은 사장은 1995년 R셔츠 매장 바로 옆 건물에 기성복 매장을 차리고 P브랜드를 런칭했다. 그러면서 파격적으로 정훈씨를 신설 매장의 점장 자리에 앉혔다. 그야말로 낙하산 인사였다. 일개 막내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 지 불과 3년이 채 되지 않은 25살의 정훈씨가 이제 10여 명의 부하 직원을 거느린 관리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달 후 그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명 디자이너, 자존심을 건들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차이나칼라 셔츠를 한 벌 맞추고 싶은데 자기 부인이 모 의상실에서 맞춘 것과 같은 디자인으로 제작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정훈씨는 새로 오픈한 기성복 매장의 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 부탁을 거절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으나 맞춤 셔츠 상점 점원 시절부터 오랜 단골손님의 부탁이라 두말없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단골손님의 부탁으로 찾아간 J의상실은 광복동 초입 서울은행 옆에 상당히 큰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기업 회장실 부럽지 않은 으리으리한 방에 들어서니 디자이너로 보이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정훈씨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는 찾아온 이유를 얘기했다.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상대로부터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어디서 이런 새끼가……. 감히 내 디자인을 어떻게 보고…….”

그녀는 직원에게 “이 자식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치며 그에게 쌍욕을 마구 퍼부었다. 정훈씨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끌려나오다시피 의상실을 빠져나왔다. 당시 광복동의 맟춤 양복점과 맞춤 셔츠 점에서는 일종의 도제식인 옛날 방식으로 일을 배웠는데, 정훈씨도 맞춤옷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는 같은 의류업에 종사하고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디자이너가 자신을 이해할 것이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서 의상실에 갔던 것인데 그것은 큰 오판이었다. 현재 대한패션디자인협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그 디자이너는 굉장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그녀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듯하다. 그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정훈씨는 이후 매일 술을 마시게 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오기가 생겨 자신도 옷으로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좋다. 저 여자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내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겠다.”

하지만 옷 가게 점원으로는 도저히 그만큼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하루 빨리 내 장사를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본격적으로 창업을 준비했다. 맞춤옷이나 기성복 브랜드 매장을 열기엔 자본이 부족했다. 3년 남짓 점원으로 번 돈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단 작은 옷 가게라도 차리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던 중 마침 국제 시장 구제 골목 쪽에 마땅한 점포가 하나 나서 계약을 하러 갔다. 온전한 점포 하나를 얻기엔 가진 돈이 부족해 점포의 일부를 쪼개서 사용하는 조건으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100만 원으로 일단 구두 계약을 하고 개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건물 일대가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지 건물 주인으로부터 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정훈씨는 잠시 실의에 빠졌지만 이내 다른 방도를 찾다가 국제 시장 노점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국제 시장에 노점상을 차리다
부산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인 국제 시장은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4가 83번지 일대 대지 약 8만 2,645㎡[2만 5,000평] 위에 세워진 1~7공구 약 11만 5,702㎡[3만 5,000평]의 상가 건물에 들어선 도·소매 시장이다. 시장이 있는 자리는 일찍이 일본인들이 살던 부산의 중심가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빠져나가면서 한꺼번에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 나와 공터에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쓸어 모아 물건을 사고판다고 해서 처음에는 돗대기 시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는 12개 동의 단층 목조 건물을 지어 자유 시장으로 정식 개설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군용 물자와 구호물자 등이 자유 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물품이 없다고 해서 국제 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크고 작은 화재들을 몇 차례 겪으면서 1967년에 지금의 2층 상가 건물을 짓고 사단법인 국제시장이 성립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 들어서 있는 시장만을 국제 시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산 사람들은 주변 신창동 일대의 상가들을 통틀어 국제 시장이라 부른다. 더러는 길 건너 깡통 시장과 부평 시장까지도 국제 시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국제 시장 일대의 신창[창선] 시장, 깡통 시장 일대의 부평 시장, 그리고 남포동 일대의 자갈치 시장은 각기 상권을 달리한다.

정훈씨는 유나 백화점 뒤편의 한 건물 담벼락에 노점상을 차렸다. 1995년 중순, 3년여의 옷 가게 점원 생활을 접고 비록 노점상이지만 자신의 가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주변에는 건물 담벼락 아래 전봇대를 사이에 두고 정훈씨 말고도 여러 노점상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했다. 비단 그 일대뿐 아니라 국제 시장 뒤편의 상가들 사이사이에는 노점상들이 다들 한자리씩을 잡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시작이 어찌된 것인지는 모르나 그 노점들에도 보통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권리금이라는 것이 걸려 있었다. 정훈씨 역시 권리금을 내고 노점상을 차렸지만, 평소 친하게 알고 지내던 형님이 장사하던 노점 옆에 자신의 노점을 차린 터라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으로 자신의 가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주로 팔았던 것은 구제 옷이었다. 종종 서울에 올라가 동대문 시장 등에서 물건을 들여오기도 했지만 주로 국제 시장 내에 있던 일명 케네디 시장에서 물건을 받아왔다. 6·25 전쟁 때부터 있었던 케네디 시장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대량으로 압축 포장해 들여온 구제 옷을 취급했다. 보통은 큰 궤짝 크기로 압축 포장된 것을 통째로 거래했기 때문에 일종의 복불복식 거래였다. 물론 대략적인 품목은 정해져 있었지만 안에 든 내용물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은 통째로 사서 압축 포장을 열어보면 그 속에는 좋은 옷과 나쁜 옷이 한데 섞여 있었다.

압축 포장된 구제 옷은 보통 한 짝에 1백만 원 이상에 거래됐다. 정훈씨 입장에서는 처음 하는 장사에 모험을 하기도 불안하고 소자본으로 하는 장사였기 때문에 압축 포장된 물건을 통째로 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통째로 물건을 떼어온 상인들과 흥정해서 그들로부터 다시 선별적으로 물건을 재구입해서 팔았는데, 하의는 리바OO 청바지, 상의는 체크무늬 남방과 니트를 집중적으로 취급했다.
잘나가는 노점상, 큰돈을 벌다
3년여 간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손님을 대하는 방법을 익혀서인지, 아니면 노점의 자리가 좋아서인지, 어쨌든 그의 가게는 시작부터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쇠퇴한 구도심 지역이지만 당시는 국제 시장 주변이 부산의 최고 중심 상권이었다. 국제 시장에서 신창동 일원으로 이어지는 지역뿐만 아니라 유나 백화점과 미화당 백화점 넘어 광복동 쪽이나, 묵자 골목과 족발 골목을 지나 남포동이나 부평동 방면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미어터졌다.

이 지역은 젊은이들이 멋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그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OECD 가입을 향해 달려가던 때로,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소비 풍조와 그에 따른 거품이 심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당연히 옷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는 사람들이 유행을 안 타는 단색의 무난한 옷을 주로 사 입지만, 좋은 시절에는 멋을 부리는 데 과감해지기 때문에 밝고 화려한 옷은 물론이고 개성이 강한 독특한 옷을 많이 찾았다.

당시는 또한 서태지로부터 시작된 대중 문화의 해금기로서, 청소년들 사이에서 힙합 문화가 급속하게 확대되던 시기였고, HOT, 젝스키스 등 소위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힙합 문화의 확산과 함께 청소년들은 다른 아이들과는 차별화된 개성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멋 내기를 원했다. 엄마가 사다 준, 혹은 엄마와 함께 고르는 옷이 아닌 스스로 옷을 사 입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아이돌 그룹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소위 ‘서태지 모자’, ‘HOT 장갑’, ‘젝스키스 배낭’ 등이 인기를 끌었다. 패션 감각이 있고 멋을 부리는 데 과감한 아이들이 학교나 동네에서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정훈씨는 노점이 자리를 잡아가자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을 주 고객층으로 정하고 그에 맞춘 영업 전략을 펼쳐나갔다. 그는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공을 들였다. 그가 맞춤옷 상점에서 처음 상대했던 손님들은 품격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서비스 마인드를 충분히 배웠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린 손님들에게 잘 대해주니 찾는 아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리더 격인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잘 대해주고 가깝게 지냈다. 그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 하나가 힙합 옷을 입고 구제 옷을 입으면 다른 아이들이 따라 입었다. 식사 때 그 아이들이 근처를 지나가면 불러서 노점 앞에 쭈그려 앉아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밤에 일 마치고 돌아갈 때면 곧장 아이들을 불러 맛난 음식을 사주곤 했다. 영업의 일환으로 일종의 투자를 한 셈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자신들을 이해하고 장단을 잘 맞춰주는 정훈씨의 가게에서 옷을 샀다.

아이들에게 정훈씨의 노점은 매력적이었다. 아이들이 선망하던 리바OO, 게O 등의 외국 브랜드의 정식 매장을 부산에서 찾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그리고 힙합의 본산지인 미국 사람들이 직접 입던 옷, 무엇보다 용돈의 범위 내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옷, 그게 바로 아이들이 찾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게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리바OO 501은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 만큼 잘나가는 핫아이템이었다. 심지어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딱딱하게 굳은 옷도 세탁 안한 채 그대로 팔려 나갔다. 일본 패션 스타일의 체크무늬 남방과 니트류 상의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장사하다가 옷이 동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장사하다 말고 케네디 시장에 뛰어가서 물건을 떼어오곤 했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매입가는 3,000원에서 1만 원까지 대중없었지만 보통 바지나 셔츠 한 벌에 2만 원씩 받고 팔았다. 노점이었지만 일종의 정가제였다. 그 때문에 아이들과 흥정할 일도, 마찰도 그다지 없었다. 겨우 4.95㎡짜리 노점에서 하루에 1백만 원어치씩 옷을 팔았다. 한달에 순이익만 1,500~2,000만 원을 올렸다.

정훈씨의 가게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아이들은 옷을 사지 않더라도 그냥 놀러 오기도 했다. 손님으로 만났지만 형제처럼 가까워진 아이들도 있었고, 이성으로 좋아해서 따라다닌 여자아이들도 많았다. 춤 잘 추고 성격 좋은 재진이와 재덕이는 유난히도 정훈씨를 잘 따랐다. 아이들은 정훈씨 가게에 놀러왔다가 종종 그 앞 노상에서 춤을 췄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길이 막혔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근처 점포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급기야는 당국에 민원을 넣어 단속반이 뜨기도 했다. 얼마 후 재진이와 재덕이는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의 멤버가 되어 톱스타가 되었다. 그들과는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 단속반
잘나가는 노점상 정훈씨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바로 구청 단속반이었다. 단속반은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소방 당국의 소방 점검, 관할 구청의 노점 단속, 세관과 검찰의 짝퉁 단속이 그것이다. 자기 점포를 가진 상인들에게는 소방 점검이 두렵지만 정훈씨에게는 구청의 노점상 단속반이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단속반원들은 거의 매일 찾아왔다. 그들은 뒷짐 지고 있는 대로 거드름을 피웠다. 정훈씨는 단속반을 볼 때마다 허리 굽혀 인사하며 커피도 사주고 옷도 하나씩 챙겨줬다. 나름 친분이 쌓였다고 생각했지만 두세 달에 한번 꼴로 “이거 치워! 저거 치워!” 하며 행패에 가까운 노점 단속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번만 봐주세요.” 하며 빌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일단 민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단속에 들어간다. 치우든지 부수든지 결과물이 있어야 했다. 민원 전 사진과 민원 후 단속한 사진을 찍어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 시장 상인들 중 노점 단속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점포를 가진 상인들도 대부분이 점포 앞 노상에 가판대를 놓고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속이 나와도 가판대를 잠시 점포 안으로 치워버리면 그만이지만, 노점상들은 단속이 나오면 별 수 없이 노점을 철거해야 했다. 무허가 가게를 차린 터라 노점상들은 언제나 약자였고, 행여나 점포 가진 상인들이 노점 단속 민원을 넣을까 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노점상은 단속반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노점 단속이 반복될 때마다 정훈씨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악랄하기로는 소방 단속이 으뜸이었다. 사실 재래시장 상가 건물이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소방법에 걸면 무조건 걸리게끔 되어 있다. 방염 벽지와 전기 설비는 단골 지적 항목이다. 소방 단속반은 노점 단속반보다 훨씬 거만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도 말을 높이는 법이 없다. 아무 상점에나 불쑥 들어가 점원에게 “어이, 느그 사장 어데 있노? 일로 나와 보라 캐라”라고 소리친다. 점원의 연락을 받은 사장은 진짜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그러고는 단속반을 공손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간 후 매장에 들어와 카운터에서 돈을 꺼내 봉투에 똘똘 말아 들고 나간다. 정훈씨가 맞춤옷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할 때, 보통 현금으로 1~2백만 원 단위로 해서 1년에 4번씩 분기별로 정기 상납을 했다. 물론 옛날이야기다. 요즘 세상에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짝퉁 단속은 불시에 이루어졌다. 정훈씨의 아내 김미선씨[37]는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국제 시장 가방 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대개는 잠바 입은 나이 많은 아저씨 두세 명이 가게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서면 “아! 단속이구나!” 하고 그녀는 눈치를 챘다.

단속반원들은 A4 용지 몇 장을 손에 들고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가게의 상품을 대조했다. 그들은 루이OO, 샤O 등의 명품 브랜드를 잘 몰랐다. 더욱이 진품과 짝퉁을 구별할 줄 몰랐다. 그저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같은지 다른지 대조를 할 뿐이었다. 여지없이 상인들은 단속반을 밖으로 데려 나가 돈을 찔러 넣어줬지만, 마대 자루를 가져와 벨트며 지갑이며 가방 등을 몽땅 쓸어 담아 가기 일쑤였다. 사실 대부분의 단속은 민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손님들이 환불이나 교환 등에 불만이 있는 경우 상인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당국에 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상 손님과 이웃 상인들
당시는 상인과 소비자 사이에 분쟁이 생기더라도 중재할 수 있는 마땅한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시장 상인들은 대체로 요즘 같은 서비스 마인드가 없었고 소비자의 권익 보호에 대한 의식 수준도 상당히 낮았다. 백화점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재래시장에서는 판매된 상품의 환불이나 교환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소비자가 물품의 교환·환불을 위해 점포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작정을 하고 온 것이기에 상당히 전투적 자세를 가지기 마련이고, 매일매일 시장 여기저기서 상인과 손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정훈씨가 맞춤 셔츠 상점에서 일할 때는 소위 진상 손님이 많았다. 맞춤옷의 특성상 손님들이 품격을 많이 따지고 요구 조건이 까다로워 상대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특히 동네 건달들은 맞춘 옷이나 점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앞에서 칼을 꺼내 옷을 찢기도 하고 점원의 멱살을 잡고 죽인다며 욕을 하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처음 일을 배운 정훈씨이다 보니 자신을 찾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잘 해주고 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 덕에 독립해서 장사를 하면서는 손님과의 사이에서 험한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 시장에는 상가 운영회가 있다. 업종별 조합도 있고, 같은 상가 동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인 단체 등은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 즉 점포를 가진 상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고 노점상들은 당연히 제외되었다. 노점상들은 주변에 있는 다른 노점상들과 대체로 친하게 지냈다. 정훈씨가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 큰 도움을 준 형님은 지금도 친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있다. 노점을 차릴 때 그에게 자신의 노점 한 편을 내어준 것이 그 형님이었고, 가게가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한 사람은 힙합 패션, 한 사람은 구제 옷을 주로 팔면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장사하는 것 말고도 총각이던 그에게 사생활 부분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동대문 시장에서 큰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국제 시장 상가에서 사기 상점을 하던 형님과도 각별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서 노점상 단속으로 정훈씨의 노점이 뜯기고 나면 소식을 듣고 언제나 먼저 달려와서 뚝딱뚝딱 부서진 노점을 다시 고쳐줬다. 식사는 이웃 노점상들과 어울려서 먹었다. 주로 신창 설렁탕 집을 이용했는데, 배달하는 아줌마는 거의 중국 기예단 수준으로 머리에 배달 음식들을 지고 다녔다. 냉난방 장치를 설치할 수 없는 노점이라 겨울에는 덜덜 떨며,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주변 일대에서 정훈씨는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제법 있었다. 그는 바로 앞 점포의 여자 직원과 잠깐 동안 사귄 적은 있지만 대체로 여자들과 깊은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역시 일종의 영업 전략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평생 같이 살 사람으로 가방 매장에서 일하던 미선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미선씨는 단아하면서도 생활력 있는 여자로 보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노점상이지만 출퇴근 시간은 일정했다. 보통 오전 9시에 가게를 열고 저녁 8시에 닫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천막 점포에 자물쇠를 채우고 갔는데, 좀도둑들이 밤에 천막을 찢고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정작 도둑맞은 옷들은 푼돈이고 천막을 새로 장만하는 데 큰돈이 들었다. 정훈씨는 도난이 잦아지자 큰맘 먹고 가게 옆 전봇대 앞에 철골 구조물을 세워 철제 셔터를 만들었는데, 불과 며칠 만에 단속에 걸려 강제 철거를 당할 때는 정말 속이 상했다. 엄동설한 한겨울에 손재주 좋은 사기 장수 형님과 함께 힘들게 손수 공사를 했는데 단속반이 와서 철거를 한 것이다. 아마도 근처에 점포를 가진 상인들이 당국에 신고를 한 듯했다.

장사는 연중무휴로 했지만 비 오는 날은 거의 공치는 날이었다. 천막 위에 고인 물을 쳐내는 속도보다 고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쳐낸 빗물이 떨어져 옷을 다 버리고, 옷을 사러 오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가게는 열었다. 혹시라도 찾을지 모를 손님에 대한 신용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명절 때도 장사를 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명절이 장사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도 태풍이 불 때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장사에 재미를 붙여가던 1996년 어느 날 국제 시장 상가 3동에서 시작된 불로 국제 시장 일대가 홀라당 타버린 일이 있었다. 대낮에 일어나 한밤중이 될 때까지도 꺼지지 않은 큰 불이었다. 수십 대의 소방차와 소방 헬기가 쉴 틈 없이 물을 뿌리고, 행여 자기 점포에 불길이 번질라 상인들은 물건을 점포 밖으로 마구 던지고 난리가 났었다. 그날의 불은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완전히 진압이 되었다. 이후 보상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건물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보상을 다 받았다. 하지만 점포를 세 내어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상인들 대개가 관행적으로 매출을 숨기거나 축소해서 신고해 왔기 때문에 실제로는 피해 규모가 컸음에도 신고 되지 않은 음성적인 부분은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노점상들은 단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정훈씨는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IMF 위기가 찾아오다
1995년 8월과 12월에 현대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이 차례로 부산에 문을 열었다. 대형 백화점 개점의 여파는 대단했다. 부산 지역의 상권 전체가 요동쳤다. 국제 시장 일대의 구도심 상권이 급속도로 서면 상권으로 넘어가면서 주도권을 완전히 뺏겼다. 결국에는 구도심 상권의 상징이던 유나 백화점과 미화당 백화점이 1997년 봄과 가을에 문을 닫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말에는 IMF 구제 금융 사태를 맞이하면서 한국 경제는 깊은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임창렬 부총리의 긴급 회견이 있기 얼마 전, 정훈씨는 겨울 시즌 장사를 대비하여 더블 코트가 잘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여유 있게 준비를 해뒀다. 그런데 그해 겨울은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아무도 그의 가게에 오지 않았다. 길거리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듬해 봄까지 국제 시장 주변에는 그야말로 적막이 흘렀다. 전에는 가게에 서서 거리를 보면 온통 새까맣게 사람들의 머리만 보였는데 이제는 사람 구경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국제 시장 넘어 깡통 시장에도, BnC 골목에도, 묵자 골목에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장사가 계속 잘될 줄 알았다.

장사를 공치는 날이 많아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가게에 나와 허송세월을 보내느니 뭐라도 해야겠단 마음을 먹은 정훈씨는 가게를 닫아두고 친구를 따라 재생 잉크 카트리지 영업 일을 시작했다. 장사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봤었기 때문에 영업 일을 잘 해낼 것이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장롱에서 정장을 꺼내 입고 구두도 광을 냈다. 영업 일은 생각과는 달리 자신과 잘 맞지 않았다. 나를 찾아온 손님을 상대하는 장사와 내가 고객을 찾아가서 하는 영업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연히 영업이 잘 안됐다. 다시 노점으로 돌아왔지만 아르바이트비도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모색해야 했다.

정훈씨는 갑자기 찾아 온 IMF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발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태껏 딱히 점포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점이 워낙에 장사가 잘되니까 굳이 점포를 가질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IMF 위기와 함께 국제 시장의 부동산 시장은 완전히 붕괴가 되어 있었다. 수천만 원씩의 권리금을 주고 점포를 얻었던 상인들이 그 권리금을 몽땅 날리고 하나둘씩 떠나갔다. 건물주들은 상인들이 빠져나가자 점포를 놀리기보다는 세를 큰 폭으로 낮췄다.

그러한 상황을 정훈씨는 역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점포를 얻는 데 있어 사실 보증금은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비싼 권리금과 다달이 나가는 월세가 상당히 큰 부담으로 작용했었는데, 낮은 월세와 권리금이 제로 상태에 가까운 부동산 빙하기가 오히려 그에게는 기회가 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1998년 가을 그는 노점을 완전히 정리했다. 그러고는 노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지만 번듯한 점포를 얻었다. 결혼 상대로 점찍어둔 미선씨가 노상에서 쭈그리고 앉아 배달시킨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못마땅해 한 것도 노점을 정리한 또 다른 이유였다.

구도심 상권이 무너지면서 서면 상권 말고도 경성대학교 앞 상권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다. 평소 장사하며 알고 지내던 사람이 신생 상권인 경성대 앞에서 같이 가게를 차리자며 제안을 해왔다. 얼마간의 고민 끝에 자신의 점포를 차린 여세를 몰아 정훈씨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경성대 앞 주차장 하나에 세를 얻었다. 노점을 했던 경험을 살려 주차장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지인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새며 손수 점포를 만들었다.

하지만 국제 시장에 있는 가게를 오래 비워 둘 수가 없었다. 경성대 앞 가게에 갈 때면 함께 노점을 하던 형님에게 가게를 맡기고 가곤 했는데 둘 사이를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은 국제 시장 가게에 전념하고 경성대 가게는 동업자를 믿고 그에게 맡겼다. 얼마 후 동업자는 정훈씨 몰래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도망을 갔다. 국제 시장에서 가져간 옷들도 몽땅 팔아넘기고 떠났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던 가게였다. 나중에 가게가 있던 자리는 경성대 상권 최고 요지가 되어 큰 건물이 들어섰다. 정훈씨는 지금도 그 근처를 지날 때면 도망간 동업자를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쥔다.
새로운 도전
1999년 무렵부터 조금씩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국제 시장 상권은 그다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근이 가게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큰돈을 벌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국제 시장을 떠나기로 결심한 정훈씨는 그 해에 점포를 정리하고 미선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둘이 가진 돈을 모두 합쳐서 서면 대현 지하상가에 옷 가게를 차렸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부산 최고 상권이 된 서면에서의 옷 장사는 아주 잘 됐다. 장사가 잘 되고 돈이 모이기 시작하자 가게 근처에 옷 가게를 하나 더 차렸다. 역시 대박이 났다. 부산을 넘어 마산에도 옷 가게를 차렸다. 소매상을 넘어 평화 시장에까지 진출해서 의류 도매업으로 장사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외제차를 구입하고 수영과 골프를 시작하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다. 사진 동호회에 가입해 전국을 여행하며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정치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동안은 먹고살기 바빠 장사 외에는 다른 무언가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마침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고, 그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열혈 노사모 회원이 되었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는 서면에서 촛불집회가 열릴 때 자신의 가게에서 옷들을 쓸어 담아 가지고 나와 사람들에게 깔고 앉으라며 나눠주는 열정도 발휘했다.

2005년부터는 요식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대학가에 치킨 집을 차렸다. 오징어 등 해산물을 파는 가게도 열어 봤다. 몇 해 전에는 교외에 상당히 규모가 큰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사이 의류와 관련된 일은 아내 미선씨가 도맡아 했다. 물론 그가 승승장구만 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 옷 가게를 열거나 음식점을 차리면서 실패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특유의 쾌활한 성격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정훈씨는 2012년 초부터 새로운 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물건의 판매만 해왔는데, 이제는 판매뿐 아니라 제조업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그는 부산진구 전포동에 주꾸미 가공 공장을 짓고동우식품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 사업에 매진하기 위해 2012년 10월부로 20여 년간 해오던 의류 판매업을 모두 정리하고 공장을 확장했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동우식품 부설 연구소를 세우고 신제품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훈씨는 의류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이 아니라 ‘잠정적 중단’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20여 년 동안 장사를 해온 사람이라 그런지, 앞으로 자신이 어찌될지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바다 수영을 나갔다. 철인 3종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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