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노점상, 큰돈을 벌다
3년여 간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손님을 대하는 방법을 익혀서인지, 아니면 노점의 자리가 좋아서인지, 어쨌든 그의 가게는 시작부터 장사가 잘됐다. 지금은 쇠퇴한 구도심 지역이지만 당시는 국제 시장 주변이 부산의 최고 중심 상권이었다. 국제 시장에서 신창동 일원으로 이어지는 지역뿐만 아니라 유나 백화점과 미화당 백화점 넘어 광복동 쪽이나, 묵자 골목과 족발 골목을 지나 남포동이나 부평동 방면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미어터졌다.
이 지역은 젊은이들이 멋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그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OECD 가입을 향해 달려가던 때로,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소비 풍조와 그에 따른 거품이 심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당연히 옷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는 사람들이 유행을 안 타는 단색의 무난한 옷을 주로 사 입지만, 좋은 시절에는 멋을 부리는 데 과감해지기 때문에 밝고 화려한 옷은 물론이고 개성이 강한 독특한 옷을 많이 찾았다.
당시는 또한 서태지로부터 시작된 대중 문화의 해금기로서, 청소년들 사이에서 힙합 문화가 급속하게 확대되던 시기였고, HOT, 젝스키스 등 소위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힙합 문화의 확산과 함께 청소년들은 다른 아이들과는 차별화된 개성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멋 내기를 원했다. 엄마가 사다 준, 혹은 엄마와 함께 고르는 옷이 아닌 스스로 옷을 사 입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아이돌 그룹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소위 ‘서태지 모자’, ‘HOT 장갑’, ‘젝스키스 배낭’ 등이 인기를 끌었다. 패션 감각이 있고 멋을 부리는 데 과감한 아이들이 학교나 동네에서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정훈씨는 노점이 자리를 잡아가자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을 주 고객층으로 정하고 그에 맞춘 영업 전략을 펼쳐나갔다. 그는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공을 들였다. 그가 맞춤옷 상점에서 처음 상대했던 손님들은 품격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서비스 마인드를 충분히 배웠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린 손님들에게 잘 대해주니 찾는 아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리더 격인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잘 대해주고 가깝게 지냈다. 그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몰고 다녔다. 하나가 힙합 옷을 입고 구제 옷을 입으면 다른 아이들이 따라 입었다. 식사 때 그 아이들이 근처를 지나가면 불러서 노점 앞에 쭈그려 앉아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밤에 일 마치고 돌아갈 때면 곧장 아이들을 불러 맛난 음식을 사주곤 했다. 영업의 일환으로 일종의 투자를 한 셈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자신들을 이해하고 장단을 잘 맞춰주는 정훈씨의 가게에서 옷을 샀다.
아이들에게 정훈씨의 노점은 매력적이었다. 아이들이 선망하던 리바OO, 게O 등의 외국 브랜드의 정식 매장을 부산에서 찾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그리고 힙합의 본산지인 미국 사람들이 직접 입던 옷, 무엇보다 용돈의 범위 내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옷, 그게 바로 아이들이 찾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게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리바OO 501은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 만큼 잘나가는 핫아이템이었다. 심지어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딱딱하게 굳은 옷도 세탁 안한 채 그대로 팔려 나갔다. 일본 패션 스타일의 체크무늬 남방과 니트류 상의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장사하다가 옷이 동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장사하다 말고 케네디 시장에 뛰어가서 물건을 떼어오곤 했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매입가는 3,000원에서 1만 원까지 대중없었지만 보통 바지나 셔츠 한 벌에 2만 원씩 받고 팔았다. 노점이었지만 일종의 정가제였다. 그 때문에 아이들과 흥정할 일도, 마찰도 그다지 없었다. 겨우 4.95㎡짜리 노점에서 하루에 1백만 원어치씩 옷을 팔았다. 한달에 순이익만 1,500~2,000만 원을 올렸다.
정훈씨의 가게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아이들은 옷을 사지 않더라도 그냥 놀러 오기도 했다. 손님으로 만났지만 형제처럼 가까워진 아이들도 있었고, 이성으로 좋아해서 따라다닌 여자아이들도 많았다. 춤 잘 추고 성격 좋은 재진이와 재덕이는 유난히도 정훈씨를 잘 따랐다. 아이들은 정훈씨 가게에 놀러왔다가 종종 그 앞 노상에서 춤을 췄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길이 막혔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근처 점포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급기야는 당국에 민원을 넣어 단속반이 뜨기도 했다. 얼마 후 재진이와 재덕이는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의 멤버가 되어 톱스타가 되었다. 그들과는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