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 후 17년 중 '8년 적자'
"강성노조·저금리로 대규모 적자, 정상화하려면 1兆넘게 더 들여야… 가장 빨리 손 털고 나가는 법 찾아"
고금리 상품에 발목 잡히고 노조 반발에 구조조정 늦어져… 인건비 비중 他보험사의 2배

[조선일보] "독일 알리안츠 본사는 수렁 같은 한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한국에 1조200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독일 알리안츠그룹이 한국 알리안츠생명을 고작 300만달러(약 35억원)에 중국 안방보험그룹에 팔고 떠난다. 35억원은 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 1채 값에 불과한 헐값이다.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고 한국 시장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7일 알리안츠생명 한국법인의 전직 고위 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알리안츠생명은 한국 시장 적응 실패, 강성 노조, 저금리 등이 맞물려 대규모 적자를 내는 상황도 문제였지만, 재무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향후 2~3년간 1조원 넘는 돈을 더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독일 본사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한국에서 손 털고 나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독일계 알리안츠생명이 불과 35억원에 중국 안방보험에 팔린 사실이 드러나 보험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알리안츠생명에 1조2000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알리안츠 본사는 과거 고금리 시절 팔았던 보험 상품에 따른 금리 역마진, 강성 노조로 인한 구조조정의 어려움 등을 겪던 끝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한국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알리안츠생명 건물.
중국 안방보험그룹은 한국 알리안츠생명 인수 가격으로 1000억원 미만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500억원 이상을 제시한 IBK투자증권의 PEF(사모펀드)나 2000억원 선에 입찰한 중국계 사모펀드 JD캐피탈에 크게 뒤지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독일 알리안츠그룹은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지루한 협상을 벌이는 대신 안방보험그룹을 선택해 35억원이라는 유례없는 헐값에 넘겼다.

알리안츠생명 관계자는 "IBK투자증권 사모펀드는 정체가 불투명했고, JD캐피탈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동양생명 인수 과정에서 금융위원회의 대주주 적격 심사를 통과한 안방보험그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알리안츠그룹은 1999년 제일생명을 4000억원에 인수한 뒤 7차례에 걸쳐 8500억원을 더 증자에 쏟아부었다. 1조2000억원 넘는 돈을 투자한 보험사를 고작 35억원에 팔아치우기까지, 지난 17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7년 중 8년 적자 수렁

알리안츠그룹은 1999년 제일생명을 인수해 2002년 알리안츠생명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후 지난해까지 17년 중에 적자를 본 해가 8년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제일생명 시절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았고, 알리안츠 인수 후에도 연 7~8%대 고금리 상품을 팔았는데 저금리 상황이 닥치면서 역마진이 발생했다. 매년 1500억원 정도 적자 상태에서 영업을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다른 보험사들은 다른 상품을 팔아 역마진 상품의 비중을 낮추고 대체 투자 등으로 수익성을 높였는데, 알리안츠생명은 그 대응이 늦어져 차이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인수 초기에 한국 상황에 맞는 경영 전략과 신속한 구조조정을 시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알리안츠그룹은 2007년까지 외국인 CEO(최고경영자) 3명을 잇달아 보냈다. 인력 구조 개편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함께 고금리 역마진 상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에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CEO들로 인해 대응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보험업계에서 가장 강성으로 꼽히는 노조도 알리안츠그룹의 '한국 탈출'을 재촉했다. 2008년 한국인 CEO를 기용해 뒤늦게 성과급제 도입 등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노조는 234일간의 기록적인 장기 파업으로 맞섰다. 알리안츠생명 출신의 한 금융권 인사는 "알리안츠생명은 고정비용 가운데 인건비 비중이 50%를 넘어서 생명보험업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인건비 감축을 계속 시도했지만 노조 반대로 제대로 안 됐다"고 했다. 알리안츠생명 임직원은 1200명 선으로, 자산 규모가 비슷한 메트라이프생명과 비교하면 2배 정도 많다.

알리안츠생명은 다른 보험사와 달리 근속 연수에 따라 퇴직금을 더 얹어주는 '퇴직금 누진제'도 지난 2013년까지 유지하는 바람에 인건비 부담이 가중됐지만 노조에 막혀 개선책 도입이 늦어졌다. 이러는 사이 재무 건전성을 평가하는 RBC(보험금 지급여력) 비율은 하락했다. 2011년까지만 해도 금융 당국의 권고 기준(150%)의 2배인 300%를 웃돌았지만, 2014년 200% 밑으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183%로 낮아졌다.

◇2020년까지 1조원대 신규 자금 필요한 '밑 빠진 독'

당장 구멍 난 지갑도 문제지만, 알리안츠그룹의 더 큰 고민은 한국에 향후 1조원 넘는 뭉칫돈을 더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회계기준(IFRS4)이 강화되면서 유럽에 본사를 둔 모든 금융사는 해외 법인에도 똑같이 강화된 회계기준을 적용받게 됐다. '솔벤시(Solvency)2'라는 규정인데, 이는 부채를 평가할 때 장부가가 아니라 시가를 기준으로 한다. 그렇게 되면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유럽의 회계기준 강화에 따른 자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알리안츠그룹이 매각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도 "알리안츠그룹으로서는 당장 매각 대금으로 2000억~3000억원을 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 더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며 "이런 상황은 외국계 보험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만큼 한국 탈출이 꼬리를 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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