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가 낳은 최고의 금자탑이자, 세계 최대의 불교 석굴군으로 유명한 막고굴은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

전진(前秦)시대 둔황에 머물던 낙준(乐尊)이라는 승려가 사방으로 빛나는 금빛을 보고 석굴 사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며, 이후 위진남북조와 수, 당, 5대10국, 송, 서하, 원나라를 거치며 1,000여 년에 걸쳐 석굴이 굴착되었다.

한창 전성기 때의 막고굴은 1,618m에 걸쳐 735개의 동굴이 있었다니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의 수는 모두 492개, 약 1,400개의 불상과 4만 5,000제곱미터의 벽화가 석굴안에 모셔져 있다. 이쯤 되니 사람들이 막고굴을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박물관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다.








▲ 둔황의 간판인 막고굴(莫高屈)


사라진 석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던 막고굴은 어느새 인류의 곁에서 사라지고 만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막고굴이 갑자기 사라진 때를 대략 12세기쯤으로 둔황의 중요성이 많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이 시기 유럽과 중동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한시도 조용할 때가 없었다.





매일 치고 박는 판국에 비단으로 사치를 부릴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실크로드가 오늘날의 이란쯤에서 막혀버린 것. 둔황은 철저한 상업도시.

길이 막힌 판국에 장사를 할 수도 없었지만, 장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한번에 배로 대량의 물건을 수송하는 시대가 되니 낙타와 카라반의 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지게 된 것.

13세기 말이 되면 둔황은 아예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1,500년 전과 같은 작은 오아시스 마을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막고굴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석굴의 발견과 도굴






그러던 1900년 막고굴을 관리하던 왕원록(王园录)이라는 도교도사가 16굴 안에 감춰진 17번 굴을 발견하면서 막고굴은 다시 세인들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17번 굴에서 엄청난 양의 고문서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불교 경전은 물론 중국 황제의 칙령, 마니교의 기도문집, 티베트 전통의학 처방전,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의 경전, 위구르인들의 토지매매 계약서, 인도의 경전 등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다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17번 굴의 소문이 당시 중국을 떠돌아 다니며 문화재 사냥에 여념이 업던 외국인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헝가리 출신의 스타인이 첫 테이프를 끊는다. 그는 약 1만점의 고문서를 구입해 줄행랑 쳤고, 이어 프랑스인 펠리오가 5천여점, 일본인 오타니가 300점, 미국의 워너는 불상과 벽화를 떼어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막고굴을 관람하다 보면, 왜 자연동굴을 이용하거나 건물을 짓지 않고 산허리를 깎아 인공적으로 조성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주장은 불교가 발생한 인도의 석굴사원 전통을 들 수 있다. 인도의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는 막고굴의 한여름보다도 훨씬 더 덥다.





그런데 석굴 안에 있으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듯해 그야말로 최적의 기후 조건인 것이다. 즉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는 환경적인 이유로 석굴이 발달한 것이다.

문제는 불교가 전파되면서 석굴 사원의 건설 자체가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는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중의 하나가 불교의 이동 경로와 석굴의 이동경로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석굴 사원의 전통이 같이 전파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인도의 아잔타, 엘로라 석굴▷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중국의 키질 천불동▷둔황의 막고굴▷뤄양의 룽먼석굴▷한국의 경주 석굴암은 불교의 전파시기와 100~200년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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