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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5-05 14: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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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동 상하이 특파원 sdyeo@chosun.com





지난 3일이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 설립 60주년이라고 해서 연길(延吉)에 갔다가 근처의 용정(龍井)을 보고 싶었다. 마침 자치주 설립 기념일을 앞두고 용정 외곽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가 새로 단장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9년 전 비암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일송정과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제일중학교)를 둘러본 기억도 되살려보고 싶었다.

찾아간 윤동주 생가는 확장 작업이 지난 4월부터 시작됐으나 전시관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건자재와 작업 도구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입구의 큼지막한 돌엔 연변자치주 주장(州長)을 지낸 조선족 이덕수씨가 한자로 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옛집(中國朝鮮族愛國詩人 尹東柱故居)'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경내 통로 좌우의 돌들과 바닥엔 서시(序詩)를 비롯한 윤동주의 시(詩) 119수가 모두 새겨져 있었다. 안쪽 생가 건물에는 작은 방 4개가 있는데, 제일 왼쪽 방엔 '시인 윤동주 서거 67주기 추모'라는 한글이 적힌 얇은 종이가 쓸쓸하게 벽에 걸려 있었다.

28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애국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면서 '조선족 윤동주'라는 생소한 말을 떠올렸다. 그가 차가운 후쿠오카 감옥에서 절명(絶命)하지 않고 6개월만 더 버텨 광복을 맞았더라면, 그리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천수(天壽)를 누렸더라면, 아마 우리도 그를 '조선족 시인'으로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윤동주의 기억과 함께 우리는 과거 연변 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용정을 기억한다. 당시 연변의 최대 한인(韓人)도시였던 용정은 항일운동 등 연변 지역에서 일어난 큰 사건과 운동들의 중심지였다. 그 뿌리에 대해서는 "1883년 함경도 회령에서 건너온 장인석·박윤언 등 두 농민이 밭을 일구고 우물자리를 발견해 근거지를 마련한 뒤 용정 개발이 본격화됐다"고 '조선족 역사'는 적고 있다. 연변 지역에 논벼 농사를 처음 도입한 것도 용정의 한국인들이었으니 연변 지역을 개척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연길이 용정을 대신해 조선족의 중심 도시가 돼있다. 연길에 돌아가 한국 사람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조선족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놓고 작은 토론이 벌어졌다. 늘 나오는 얘기고 결론도 없는 얘기지만, 그들에 대한 동족애와 생활인으로 부딪히며 겪는 갈등이 대화 속에서 교차했다. 누구는 "조선족은 핏줄을 나눈 우리 동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중국 공민(公民)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조선족은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벌을 말 달리던 선구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면서 역사 속의 조국(祖國)인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얻기를 원하는 생활인들이다. 연길의 한 조선족은 솔직하게 말했다. "연변 지역에 아직 변변한 한국 대기업이 없다. 삼성반도체가 70억달러를 들고 서안(西安)이 아니라 연변으로 왔다면 수많은 조선족의 곤궁한 삶이 해결되지 않았겠는가"라는 아쉬움이었다.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홍콩과 동남아에 진출해 큰돈을 번 중국 화교들이 중국 대륙에 거액을 투자하는 동족(同族) 의식을 못내 부러워했다. [기사제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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