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선양 베이링공원
대립과 투쟁의 세상사
선양의 주요 역사 관광지로는 베이징 자금성의 모태가 되었다는 후금(後金)시대의 왕궁 ‘선양 고궁’과 함께 청태종 ‘황타이지(黃太極)’부부가 잠들어 있는 능역 베이링(北陵)공원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통상 북릉(北陵)이라 불리는 소릉(昭陵)은 유적지이고, 베이링공원은 북릉을 포함한 주변 금도(禁道)를 포함한 공원이다. 얼핏 보아 모래로 덮은 것처럼 보이는 능의 봉분은 이곳 특산인 흙이라고 한다.
이 외 시간 여유가 있으면 청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능역으로 알려진 복릉(福陵 : 동릉이라고도 한다)을 들를 수도 있는데, 능역은 있으되 정작 능은 없다. 능역을 찾을 길 없는 몽골 칭기즈칸의 경우처럼 훗날 발생할지도 모르는 정적으로부터의 능역 훼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청나라 발흥지이자 청태조의 6대조까지 챙겨둔 선양 인근 신빈(新賓)지역의 능원 영릉(永陵)과 함께 모두 청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이다. 모두 명나라 때의 능원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청나라 고유의 특징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양 고궁, 북릉, 동릉, 이 세 곳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황타이지는 당시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명나라가 지배하던 중원으로 쳐내려가기 전 전략적으로 지리적 배후인데다 명나라와 지근관계에 있는 조선이란 화근을 미리 평정하고자 지금의 한반도를 유린했다. 즉 북릉에 잠들어 있는 청태종 황타이지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의 굴욕을 안긴 장본인이다. 북릉을 비롯한 이 유적지 세 곳 모두 우리에겐 쓰라린 역사를 담고 있는 곳들이어서 반드시 가 볼 곳이로긴 하되 마음 한편으로는 별로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에 그다지 관심 없고 중국이라면 그저 짝퉁상품과 가리봉동만을 떠올리고 싶은 한국인이라면 굳이 애써 가보지 않아도 되는 곳들이다.
이외 주요 관광지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뜻 깊고 쓰라린 역사 유적지가 있으니, 지금은 선허구(沈河區) 아동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선양관(沈陽館)’이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가 삼전도 조약으로 잡혀와 볼모생활을 했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상하이임시정부 건물을 비롯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두, 근대 한국 역사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eague)로 일컬어지는 이회영 일가가 설립했던 창춘지역의 신흥무관학교와 일제 강점기 시절 우국지사들이 이합집산했던 선양 연변가 등과 함께 공히 중국인들이 앞장서 내세울 리 없는 곳이니 그저 우리가 알아서 들러보고 챙겨볼 수밖엔 없는 곳이다. 사적지임을 알리는 입구 팻말에는 ‘선양관’이 아닌, 세월을 건너뛰어 사용된 ‘일제 남만주철도 봉천공소’로 되어 있다.
사실상 주청(駐淸) 조선대사관 기능을 수행했던 이곳에서 주로 정치적 사안에 몰두한 소현세자와는 별개로 세자빈 강씨가 지금의 남탑(南塔) 인근지역에서 무역과 함께 농경지를 개간해 약 200명에 이르는 심양관의 대식구를 무사히 잘 건사함은 물론 포로로 잡혀온 수많은 조선인 노예들을 속환(贖還)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는 조선 여인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8년 간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환국하지만, 부왕인 인조의 정치적 견제로 인해 세자는 독살, 세자빈은 사약을 받고 집안이 몰락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폐쇄적이었던 조선을 개방으로 이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훗날의 사가(史家)들은 애석해 하고 있다. 무릇 선양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쯤은 들러볼만한 곳이다. 시내 중심가인 중가(中街) 인근 차오양가(朝陽街)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도 좋다.
▲ [자료사진] 선양세계원예박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