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아 지난 7월말 한국에서 선생님들 가족팀이 단체로 산둥을 방문했다.



해신 장보고의 유적지를 비롯 우리의 선조들이 한때 활약했던 교동반도 일원의 신라방 신라소가 있었던 펑라이와 고구려인의 후예로 60여 년 간 활동을 했던 이정기 왕국이 있었던 청주, 그리고 지금은 한국인들이 중국내에서 가장 많이 진출하여 있는 칭다오를 둘러보고 귀국하는 중국에서의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기획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그들과 동행했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다. 첫째날, 인천에서 배편으로 석도항에 도착하는 일행을 맞으러 새벽5시에 칭다오에서 출발하는 45인승 버스에는 여유좌석이 있어 칭다오에 거주하는 몇 분이 함께 동행했다.



9시 반이 넘어 석도항에 도착하니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장보고 유적답사 차 중국에 오는 한국 단체관광객을 맞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우리팀은 초중고생 자녀들 17명을 포함하여 전체 42명이 버스에 올랐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법화원 장보고 기념관이었다. 최근에 말끔히 단장하여 새로 개관한 장보고 기념관은 장보고 동상을 비롯해 장보고의 일생이 담긴 다섯 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으며, 중문과 영문 그리고 한글로 설명이 있고, 한국어로 설명이 나오는 오디오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장보고의 유년시절과 당나라에 건너온 청년시절, 그리고 서주 무령군 소장으로 발탁되어 항당 세력 이정기의 후손을 궤멸시키며 당나라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고 신라로 돌아와서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다.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파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산둥 땅 곳곳에서 활약하던 신라인들의 집합장소로도 이용되었던 불교사원 법화원을 석도에 세운다.



이미 1,200여 년 전에 세계화(?)를 꿈꾸며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지만, 신라에서는 반역자로, 당의 역사기록에는 이방인의 간략한 활동기록으로 남아 있는 반면 일본인 승려 엔닌에 의해 쓰여진 기행문에 그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념관 뒤에는장보고 기념탑이 있다. 법화원은 당시만 해도 이 일대의 이름있는 불교사원이었으나 한때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시기에 훼손되었다가 후에 복원된 사찰로, 주로 신라인 승려들이 묵었다.



<2005년 8월 15일~ 8월 21일 제2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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