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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부산 해녀들의 물질 인생
그녀들의 약국
작고 한적한 바닷가, 봄이면 멸치 축제로 들썩이는 은빛 항구에 횟집과 어물전이 즐비하다. 항구 옆 죽 늘어선 가게들 사이 빛바랜 간판의 약국이 하나 있다. 여닫이문의 드르륵 소리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10여 년이 넘도록 이곳을 지키고 있는 약사 선생님.

대변항 어물전에서는 그저 ‘약국 언니야’로 불리는 그녀가 이곳으로 온 것은 1999년 즈음이다. 원래 해운대 큰 병원 옆의 목 좋은 자리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그녀가 대변항으로 온 것은 의약 분업이 시작이 되는 시점이었다. 환자에게 맞는 약을 만들어 가는 재미가 사라지자 약사 일에 회의가 들던 시기에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이다.

처음 대변항에 왔을 때는 바닷사람들의 거친 표현에 마음고생도 참 많이 했다. 항구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만 상대하다 온 그녀에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말이 거칠기도 하고, 표현이 투박하다 보니 상대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다. 겨우 5년째에 들어서야 사람들과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만큼 친해지는 기간이 꽤 길었다.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시내에 볼 일을 보러 갈 때면 “부산 나갔다 올게”라고 말한다. 같은 부산시이지만 그들에게는 항구와 시내가 다른 지역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다. 그녀가 듣기엔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선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소외감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말일 것이다. 그들의 투박함은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진 보호막인지도 모른다.

대변항은 멸치잡이가 가장 중심이 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현지에서 나는 해물을 따서 장사를 하는 해녀들과 미역 양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생토록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살아가는 해녀들은 약국의 단골손님이다. 대변뿐만 아니라 동암, 공수, 학리, 월내에서까지 해녀들이 약을 지으러 온다. 그녀들은 오랜 시간을 바다 속에서 잠수를 하며 물질을 하는데, 이 때문에 수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압력 차이에 의한 문제는 모두 지병으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생을 한다는 관절이 말썽을 부리는 일은 오히려 애교스럽다. 수압 때문에 난청과 같이 귀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늘 있는 일이고, 여기에 더해서 편두통처럼 뇌에까지 영향을 끼쳐 발생하는 질환도 그녀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힘들어 죽겠다’, ‘아파 죽겠다’고 하면서도 물질은 멈추지 않는다. 대신 물질을 하러 갈 때에는 약을 한 첩 먹고 간다. 물 밖으로 나올 때는 압력 조절 때문에 귀가 ‘찡’ 하는 소리를 내면서 굉장히 아픈데, 미리 편두통을 막고 뇌혈관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약을 먹는 것이다. 이런 약들은 약국에서 따로 조제를 한다. 증상이 심한 사람들은 조제한 약을 먹거나 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네신'이나 '게보린' 같은 진통제를 하나 먹고 물질을 한다. 그래야만 몸이 좀 편안하기 때문이다.

유난히 삶에서 얻는 병이 많기 때문인지 이곳의 약 처방은 다른 지역과는 많이 다르다. 의약 분업 이후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조제하는 약을 구입할 수 없는 일반 지역과 달리 이곳 대변항은 약국에서 약사가 임의로 약을 조제할 수 있다. 이름 하여 ‘의약 분업 예외 지역’. 농어촌 지역에 한하여 의료 기관에서 2㎞ 이상 떨어진 곳으로, 지역 특성에 맞춰 전국에 몇 군데가 지정되어 있다. 5일분 이내에서 당장 필요한 약들은 그녀가 직접 조제한다.

약을 지으러 올 때에도 그냥 들어오는 법이 없다. 약국 문을 열자마자 화부터 내기 일쑤다. 매번 같은 식이다. 화를 마구 내면서 약을 지어 달라고 한다. 약이 안 듣는다며 약사인 그녀에게 큰 소리를 친다. 처음 약국을 시작했을 땐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말들이 모두 그들만의 친근함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니 하고 내 하고 친하다이가”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제사 지낸 다음날이면 제삿밥을 내어놓고 함께 비벼 먹는 이곳의 정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이제 그녀는 시내로 나가 약국을 할 자신이 없다.
해녀의 등장
갑자기 약국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인이 들어온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약부터 내놓으라는 말이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약사는 증상도 묻지 않고 웃으며 척척 약을 꺼낸다. 작은 마을에 이미 그녀의 증상은 소문이 나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는 어젯밤 응급실에 갔던 무용담을 들려준다. 며칠 전 횟집에서 멍게를 따 달라는 주문에 물질을 하러 나갔다가 먹은 떡이 이렇게 말썽을 부린다며 한참을 이야기한다. 약사는 그녀가 해녀이자 글을 쓰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약을 들고 일어서는 그녀를 따라갔다. 집에 들어서자 커피를 한 잔 마셔야 생기가 날 것 같다며 주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차를 가지고 나와 툇마루에 앉는다.

“찹은 데 앉아도 되나? 우리는 찬 데 앉으면 몸이 냉해 가지고……”

볕이 좋은 가을 낮인데도 바닥에 바로 앉지 못하고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으며 인사를 건넨다. 올해 나이 59세. 20대 초반 바다로 들어가 물질을 하면서 시작한 해녀 생활이 이제 거의 40여 년째인 말애씨는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옛날에는 제주도에서 넘어온 출장 해녀들이 많았다. 그렇게 육지로 넘어와 정착한 제주 해녀들도 이제는 모두 할머니가 되어 요즘은 물질을 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 새로 해녀가 되어보겠다는 젊은 사람들도 없어 말애씨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에도 막내 급이라고 한다. 처음 해녀 일을 시작한 그때에도 나이가 어려서 함께 물질을 하는 언니들 옆에서 막내 노릇을 하던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이제는 말애씨가 막내라는 틀이 아예 잡혀버렸다. 그래서 해녀들 사이에서는 ‘끗발’도 없지만 단지 바다가 좋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좋아 물질을 놓지 못한다.

나이 앞에 장사 없듯이 해녀들도 나이를 먹으면 물질하는 일이 점점 힘겨워진다. 약의 힘을 빌어가며 70대 초반까지 겨우 물질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쉽지는 않다. 신기하게 나이를 먹을수록 태생이 더 영향을 끼치는지, 70세가 되면 제주도가 태생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을 하지 못하는데, 제주도 태생들은 그나마 70대 중반까지 해녀 일을 한다. 제주도 사람들의 바다 생활에 대한 강단은 타고난 것 같다.

대변 마을에는 제주도에서 출장 해녀로 넘어와 정착한 이후, 자식을 낳고 그 딸이 다시 물질을 이어 받은 경우가 없다. 하지만 구룡포나 삼천포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직접 본적이 있다. 대변 해녀들은 대부분 이 지역 물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바닷가를 자기 고향으로 두고 태어난 ‘언니’들이 해녀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언니들도 이제는 70대가 다 되었다.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해녀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무시를 당하기도 했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나라에 반라 정도의 차림으로 물속에 거꾸로 들어가 허벅지며 다리가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을 옛사람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그래서 웬만한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자기 딸에게 절대 해녀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천대도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

언젠가부터 해녀들의 역할이 우리나라 수산업에 크게 기여를 하게 되면서 해녀들에 대한 인식도 조금 바뀌어갔다. 해녀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품목은 바로 ‘앙장구’. 이곳 사람들이 사투리로 앙장구라고 부르는 말똥성게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약 15년 동안 일본에 전량 수출되면서 외화 획득의 발판이 되었다. 그 덕분에 해녀들의 생계도 많이 좋아져서 자식들 공부도 시킬 수 있고 생활도 할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
오리지널 해녀
말애씨는 그저 바다가 좋다. 바닷물 속에 들어갈 때의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도 좋고, 속에 있던 열이 모두 가라앉는 느낌도 좋다. 이렇게 물질을 해가며 조금씩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는 삶이 좋다.

“내 바로 위에 언니가 대변에서 해녀 일 하는데 일등 사수가 또 하나 있어요. 세 살 위인데. 그 세 살 위짜리가, 용띠들이가, 지금 완전히 해녀로서는 늦게까지, 마지막까지 장식할 사람들이라. 지금 60대, 67살, 68살 고 두 나이 세대가 제일 많거든요. 끗발을 잡고 있고. 일단은 그 시대가 아마 앞으로 10년은 보겠죠. 10년을 보면은 아마 해녀는 사라지겠지. 할려는 사람은.”

해녀라고는 하지만 연중으로 작업하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연중으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1년 내도록 해녀 일을 주업으로 하는 ‘오리지널 해녀’라는 뜻이다. 67, 68세 되는 언니들 중에서 7~8명 정도가 해당한다.

“상꾼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최고로 위, 상중하로, 상꾼.”

몇몇의 언니들이 그나마 연중으로 물질을 하며 해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가을부터 겨울, 봄까지 해녀들이 가장 바쁜 시기에만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11월 20일 전후가 되면 말똥성게 채취가 시작된다. 그때부터는 잠시 해녀 일에 손을 놓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다 물질에 뛰어든다. 해녀들이 목돈을 벌 수 있는 가장 큰 기회가 바로 이 시기이다. 예전보다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말똥성게는 여전히 전량 수출을 하기 때문에 수협에서 모두 관리한다. 수협을 통해 중간 상인이 성게를 구입하러 오는 식이다. 상인들은 상품을 재포장하거나 2차 가공을 해서 일본 상회를 상대로 판매를 한다. 해녀들이 잡은 양에 따라 돈을 수협에서 내어 주기 때문에, 이즈음이 해녀들이 가장 큰 돈을 만져볼 수 있는 시기이다.

예전에는 우뭇가사리도 많이 했지만 요즘은 바다가 오염이 되어서인지 대변항 주변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화리나 동암, 공수 등은 대변보다는 바닷물의 상태가 나은지 그나마 조금 채취하기도 한다. 해삼은 말할 것도 없고 소라, 군소 등 모두가 이상할 만큼 줄어들고 있다.

“소라가 어디 다 가버리고 자꾸 숫자가 줄어요. 여름에는 추석 전에는 다 소라 같은 거 잡아가지고, 해녀들이 많이 잡았거든. 말똥성게 말고 또 성게라는 게 있거든요. 침 큰 거. 그걸 또 잡아가지고 일본 수출하고 또 그랬는데, 군소도 그렇게 많이 나더만은 자연산 군소가 자꾸 줄어든다니까요. 인제 중국에서 넘어온다대, 군소도. 중국산 군소는 질겨서 못 묵는다.”

이제 조금씩 잡아 오는 것은 제사 때나 집안에 쓰는 정도는 되지만 팔 수 있을 만큼의 양이 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늦여름, 초가을에 잡아 저장해 뒀다가 추석 때가 되면 수십㎏씩 내다 팔아 목돈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줄군소라 해가지고 참군소가 한 다섯 마리 쭉 줄로 해가 누워 있거든요. 풀밭에. 근데 지금은 줄군소도 어쩌다가 한 마리, 두 마리 정도는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도 다 사라져버리고. 군소가 없어. 개군소라고 잔잔한 거 있거든요. 그런 게 좀 있는데 그나마도 팔게 없어 팔게.”

해녀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말똥성게도 채취량이 많이 줄었다. 한때는 수협에 넘기는 양이 몇 백㎏씩 됐는데, 이제는 100㎏ 남짓. 그 정도로 채취량이 줄어들어서 연중 가장 대목이라는 말똥성게 채취기지만 이제 해녀들이 만지는 돈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말똥성게를 할 때면 물질을 직접 못하는 할머니들도 모두 모였다. ‘개바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물속에서 물질을 하지 않고 물 밖에서 바닷가 돌을 뒤집어 생물을 잡는 것을 개바리라고 한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소일거리를 해도 모두 돈을 벌수 있었다. 그렇게 벌어서 함께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들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잠증을 소지한 해녀들을 모으면 모두 24~25명 정도가 된다. 이들이 모여 말똥성게를 채취한다. 입찰은 환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들에게는 1년 벌이이기 때문에 ㎏당 얼마를 받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입찰가도 지역마다 달라서 울산 쪽이 많이 나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대변 지역은 항상 적은 것 같아 아쉽다. 그 가격에 따라서 그녀들의 겨울나기가 결정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봄이 되면 미역을 한다. 자연산 돌미역을 채취하는 작업이다. 미역이 나는 자리를 바탄이라고 하는데, 해녀들마다 뽑기를 해서 각자의 바탄을 배당받는다. 여기에도 좋은 자리가 있어서, 미역이 많이 달려 있는 곳에 배당이 되면 좋다. 그 돌미역을 캐어서 봄을 산다. 대변항은 봄이면 멸치잡이가 성황이다. 예전에는 멸치가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멸치 축제까지 할 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다. 대변항에는 봄이면 생멸치의 맛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멸치 탕이나 구이를 팔아서 돈을 번다. 장사를 못하는 사람들은 멸치 회를 팔 수 있도록 멸치를 까는 역할을 한다. 한 동이에 얼마씩 멸치를 까서 봄철의 생계를 잇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봄에 미역을 한다고 물질을 조금 미루지. 겨울까지는 하고 음력설 지나고 나면 미역 일을 해요. 다시마 일도 조금 하고. 여름 되면은 인자 할 게 없으니까 바다에 나가지. 여름 되면 해삼이 조금 나거든.”

바다 속도 육지의 사계절과 똑같다. 여름이면 수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지듯 수초가 사라지며 물 아래 바위가 훤히 보인다. 겨울에 보이지 않던 수초가 봄이 되면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다. 올 여름은 해삼이 많이 나왔다. 작년에는 태풍 탓인지 조류 탓인지는 몰라도 해삼이 참 귀했다. 바다 속을 풀밭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말처럼 마치 농사를 짓듯 해산물들이 나고 진다.

해녀들 생활에서는 추석을 지낸 시점이 가장 비수기이다. 돌미역을 하는 해녀들은 이즈음에 돌 닦기를 한다. 미역이 잘 붙을 수 있도록 돌을 닦아주는 것인데 말똥성게를 하기 전에 빨리 끝을 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말똥성게를 한다. 돌 닦기를 하는 시기가 되면 해산물이 모두 들어가 버리고 해녀들이 잡을 것이 없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그녀들의 늦은 휴가이다.
해녀로 살아가기
말애씨의 아버지는 멸치 배를 탔다. 요즘 같으면 돈을 좀 벌었겠지만 예전에는 멸치가 크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하기 힘들 만큼 가난했다. 어머니는 체질적으로 물질을 못하여서 개바리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어머니와 달리 딸인 그녀는 그렇게 바다가 좋았다고 한다. 뭍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일은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그렇게 물질을 하는 언니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가 나를 많이 황홀하게 하더라고. 바다 속에 뛰어든 그 순간부터 별천지에 왔다는 그 기분을 떨칠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지 이런 것만 생각하지만 나는 바다에 노니는 재미에 빠져가지고.”

그렇게 20대 청춘을 바다에서 보냈다. 30대, 40대까지는 열정이 넘쳐서 물속에서만 살아왔지만 이제는 조금 힘에 부친다. 막상 현실이 되어 보니 ‘이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지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평생을 바다 속에서 살아가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해녀의 삶이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상꾼 언니들처럼 오로지 해녀로서의 삶을 산 사람들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견뎌내기 힘든 일이다. 그녀처럼 20대 초반에 뛰어들어 바다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홀로 보내는 사람도 흔하지는 않다.

한때는 바다를 떠나려고도 했다. 바다에 황망히 동생을 묻고 한동안은 바다가 보기도 싫어서 도시로 도망을 치듯 나갔다. 몇 개월 동안 방황을 하며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도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결국 그녀는 바다로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다시 바다로 돌아왔을 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삶의 목표가 모두 사라지고 끓는 열을 식히듯 바다에만 나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형제들은 모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이제는 자신과 어머니만 남았다. 더디기만 했던 시간은 그렇게 흘러 어느덧 내후년이면 환갑이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끼면서 물질을 하는 것도 조금은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막내인 그녀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지금 추세로 간다면 이제 해녀들의 물질도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남은 수단은 장사밖에 없다. 해녀들이 옥토라고 부르던 곳마저 매립이 되어 해산물을 채취할 곳도 많이 사라졌다.

“이제 바다가 조각이 나버려 가지고. 할래야 할 수도 없다 마.”
마을에 부는 바람
해녀들은 자꾸 나이를 먹어 가는데 일을 하겠다는 젊은 사람들은 없다 보니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바다까지 점차 오염이 되면서 그녀들의 생활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항구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방파제를 세우고 태풍을 대비하는 구조물들이 세워지면서 바다 속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자그마한 항구와 산이 어우러져 빼어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하던 대변항은 정책적으로 발전이 진행되면서 바다가 매립되는 등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해녀들이 잡았다고 하는 해산물은 자연산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양식보다 사람들이 훨씬 좋아한다. 꽃멍게는 대부분 호남에서 양식으로 오는 것이지만 돌멍게나 털멍게 같은 것들은 해녀들이 직접 따오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해녀들은 생계 수단을 찾기 위해 장사로 마음이 기울여졌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녀촌’이라는 간판을 건 식당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 대변에도 ‘파래장’이라는 해녀촌이 있다.

“그나마 대변 해녀들은 워낙 깡다구가 좋아가지고 포장마차를 개인적으로 했는데 그기 한 15년 20년 보자…… 한 90년대…… 한 2000년도부터 했나? 그래 개인장사를 전부 물가에서 하니까 이 자치제에서 바다 오염시킨다고 통합을 다 시켜 버렸는기라. 파래장에 전부 다 밀집을 시켜버렸어요. 그게 세월이 한 20년 얼추 될 걸.”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장사를 하던 해녀들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파래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해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74세인데 70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지금은 60대 중후반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고 있다. 지금의 파래장 자리는 바다와 접해 있던 곳으로 원래부터 해녀들의 주요 작업장이었다. 3조로 나누어서 낮에는 각각 물질을 하거나 장사를 하고 그 이후에는 야간조가 맡는다.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3명 정도는 밤을 새워 장사를 한다.

그녀도 처음엔 다른 해녀들과 함께 장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바다가 건네주는 일용할 양식을 받아 생활하던 순수한 사람들이 뭍에 올라와서 장사를 한 뒤 이전과 다르게 돈벌이 앞에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한때 그녀보다 나이 어린 사람 중에 해녀를 하겠다며 들어온 이가 있었다. 오리발도 신지 않았지만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하던 친구였다. 말애씨보다 4살 아래의 그가 지금까지 해녀 일을 했다면 막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도 도중에 일을 그만뒀다. 장사를 하겠다며 나갔다고 한다. 지금 대변에는 장사의 바람이 거세다.

최근에는 동부산 관광 단지를 개발하는 공사에 해수 담수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사람의 손이 닿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자연이다. 바닷물이 변하고, 그 속의 생태가 변하면서 채취할 수 있는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 해녀들의 반발로 1차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당장 돈을 받아들어도 마음이 좋지 않다.

“보상이라는 거는 결국 자연을 팔아먹는 결과밖에 안 되거든요. 내 생계를 담보로 돈을 받는 거라. 난 그게 굉장히 서글프고. 인자 돈을 얼마 지불하고 즈그는 자연을 즈그 마음대로 농간하겠다 그런 의지 아입니까. 우리가 거기 맞서 싸우면 힘이 없어요.”

항구 위에서 공사를 하면 벌겋게 흙물이 항구로 내려온다. 물질을 하러 바다 속에 들어가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파도라도 쳐서 바다 속을 흔들어 놓으면 좋으련만 올 여름처럼 뜨겁고 태풍 한번 없을 때에는 손 쓸 도리가 없다. 인간보다 예민한 바다 속 생물들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보상을 해준다는 말에 순진하던 마을 사람들이 사분오열로 찢어진다. 각자 보상을 받는 등급이 있는데, 해녀들은 1등 ‘상꾼’과 2등의 보상금 차이가 컸다. 그런 차이를 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많이도 싸웠다. 바다의 아름다운 순수함을 간직해 오던 조용한 마을에 개발의 바람이 불어 바닷가를 완전히 휘저어버렸다.
물질로 얻은 병
그녀가 마을 해녀 중 가장 좋아하는 상꾼 언니는 꼬챙이처럼 몸이 말라 살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그 언니는 1년을 통틀어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보름이 채 되지 않을 만큼 한마디로 ‘물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 정도의 악바리 근성이 있어야 상꾼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말애씨는 그 언니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해녀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말애씨와 그 언니도 모두 포장마차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손님들을 상대하며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일들이 많은 장사는 성격상 그녀들에게 맞지 않았다. 혼자 바다 속에 들어가 여기저기 풀밭을 개척하고 찾아다니며 채취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누구의 잔소리를 듣거나 틀 속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편하게 돈을 벌어보려 했지만 그마저 성격과 맞지 않아 결국 포장마차를 나왔다.

바다만큼 자신들과 딱 맞는 곳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일까. 말애씨와 상꾼 언니는 더 열심히 바다 속을 돌아다녔다. 힘에 부쳐 쉬는 날이 많은 말애씨에 비해 상꾼 언니는 1년의 대부분을 제집 드나들 듯 바다 속을 누빈다. 환갑이 넘은 나이인 상꾼 언니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오직 바다에 녹여낸 여인이다. 그런 성향이 말애씨와 맞아 강한 성격의 말애씨지만 상꾼 언니의 말은 참 잘 따른다.

차가운 바닷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작업의 특성상 해녀들은 모두 잠수병을 가지고 있다. 제일 처음 잠수병이 오는 증상은 몸이 차가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해녀들은 저마다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보일러 시설이 워낙 잘 되어 있다 보니 뜨거운 보일러 물을 틀어서 몸을 씻고 난롯불을 쬐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돈이 들기는 하지만 목욕탕에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꾼 언니는 일 년에 350일을 바다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유난이 몸이 차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몸이 따뜻해지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가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궁이불이다. 그녀는 새 집을 지을 때에도 집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고 공사비가 많이 들어 애를 먹으면서까지 아궁이를 없애지 않고 남겨두었다. 차가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면 아궁이에 불부터 피운다. 차가운 몸에 뜨거운 불이 그대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 불을 쬐어야 몸의 냉기가 가라앉고 피로가 풀린다고 한다.

그렇게 불 찜질을 하고 이튿날이면 다시 작업에 들어가기를 수십 년. 상꾼 언니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집이 까맣게 흉터가 되어 남았다. 화기가 피부까지 스며들어 흉터가 될 만큼 강해야 겨우 몸속의 냉기를 잡을 수 있는데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진정한 해녀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삶. 한 달에 보름 남짓 물질을 하면서도 온 몸이 시리고 아픈 말애씨는 그저 상꾼 언니를 존경할 뿐이다.

“옛날에는 해녀라 하면은 물소주를 입었거든요. 물소주는 제주도 해녀들이 입었던 거. 헝겊으로 만든 물소주라는 거 있어요. 머리 수건 두르고. 옷이 어떤 식으로 돼 있나 하면은. 어깨끈이 한쪽으로 되어 있고…… 그러니까 추위를 견디질 못하지. 70년대 중반쯤 고무 옷이 도입됐다 하더라고. 근데 고무 옷이 비싸니까 못 사 입고, 나도 마찬가지. 내 언니 꺼 받아 입었거든. 그러니까 언니가 새 거 사 입으면 난 헌 거, 다 떨어진 거 그거 입고 들어가면 들어가자마자 물이 들어오는 기라, 겨울에. 그러면 덜덜덜덜 떨면서 참고 참으면서 끝까지 하는 기라. 그 인내심이라 하는 거는. 그러다 보니까 몸에 뱅이 생기는 기라. 그러니까 몸이 냉해지는 기라.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뜨거운 목욕탕 가서 푸는 걸 좋아하는 거지.”

냉증은 그나마 따뜻한 물로 견딜 수라도 있지만 머리가 아픈 건 견디기가 힘들다. 그래서 해녀들은 모두 물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두통약을 먹는다. 예전에는 네신이라는 진통제를 먹었다. 그런데 물질을 하러 가지 않을 때에도 진통제를 먹는 해녀들이 있다. 작업을 가지도 않지만 두통이 떠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진통제에 중독이 되어 뭍에서도 두통약을 버릇처럼 먹기도 한다. 내성이 생겨 한 첩으로는 효과가 없어 두 첩씩 먹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나는 처음부터 네신을 먹는 걸 습관을 했어. 한 첩을 딱 가지고. 또 우리 겉은 사람은 예민하다 보니까 약에 잘 취해. 약에 취하는 성격이야. 그러니까 한 2/3 정도를 먹지. 어떤 사람들은 그걸 많이 먹고 그래 가지고 자기 몸을 그래 하는데. 우리는 또 그 선은 잘 안 넘겨지대.”

그나마 지금은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병에 들어 있는 물약이나 부작용이 적은 다른 진통제를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청심환.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에게 최고의 명약인 청심환은 해녀들이 아끼는 약이다. 홍삼이나 보약을 먹어서 체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몸에 열이 많아 물질을 해야 시원하다고 말하는 말애씨는 홍삼도 체질에 맞지 않아 걱정이다. 또 해가 갈수록 자꾸 빠지는 살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40㎏이 겨우 넘는 상꾼 언니는 그 몸으로 어떻게 걸어는 다닐까 싶지만 바다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 집 앞마당처럼 날아다닌다. 소라며 전복이며 어디 숨어 있는지 물 아래를 훤하게 들여다보는 도사 같다. 상꾼 언니처럼 뼈만 남게 되면 자신은 물질을 못할 것 같아 살이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말애씨는 너무 아득바득 힘 들여가며 수명을 단축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저 오래도록 체력을 유지하면서 물질을 하고 싶을 뿐이다. 상꾼 언니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도통 들으려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언니가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 후면 말똥성게 채취 기간이 된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가 해녀들이 가장 바쁜 시기이다 보니 매년 얼음 같은 겨울 바다에 들어가 산다. 작업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해녀들이 강하고 씩씩한데다 능수능란한 잠수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겨울의 추위는 그나마 악으로 참아보지만, 거센 물결의 힘에는 속수무책이다.

“물때가 안 좋을 때, 바다에 물이 간다 이라 거든요. 물살이 간다. 그게 뭐냐면, 물살이 잔잔하게 있지 않고 바람을 타면 막 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물이 막 간다니까네. 우리가 물에 떠 있으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거라, 물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거야. 오리발을 아무리 휘저어도 못 이기는 그런 상황이 오거든요.”

바다 멀리 해녀들을 데리고 가려는 물살이 느껴지면 무조건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한번 잠수해서 제대로 된 물건을 마음먹은 만큼 따기 전에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악바리 근성을 가진 해녀들에게는 ‘물때’를 잘 못 만나는 것만큼 속상한 일이 없다. 힘든 시절에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만 더’를 외치다 사고를 당한 해녀들도 많이 있었다. 얼른 욕심을 버리고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언제 바위틈 사이로 빠져나가 먼 곳으로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태왁 알아요? 태왁. 해녀들 타고 다니는 그게 표준말로 태왁이거든. 그에 대한 글을 한 편 쓴 게 있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요. 내가 태왁을 가슴에 끌어안고 바다 속에 떠 있으면 이건, 너무나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 대목이었는데. 사람이 거기에 하나 의지해 가지고 생명을 맡기고 바다 한가운데서 작업을 한다는 거,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해녀들이 뭐, 어찌 보면은 최악의 그 어떤 인내심을 요구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 같애. 으하하하.”

가끔 바다에 나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모습을 보면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시 물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보면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 해녀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이 맞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분을 삭이지 못해 머리끝이 서다가도,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이 되면 정신이 번쩍 드는 본능이 있어야 한다. 바다를 이기기 위해선 정신을 집중하고 모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속에 들어가서 숨을 참는 그 순간에 얼마나 참느냐에 따라 뭔가 하나를 더 건져올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물속에 들어간 이상 맨손으로 나올 수는 없다. 뭍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악을 써대는 사람도, 물속에 뛰어드는 그 순간에는 순한 양이 되어 버린다. 바다에 의해서. 하루하루 바다의 위력을 느끼며,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고개를 숙인다. 매번 지는 싸움이지만 그녀들은 또 바다와 싸우기 위해 나간다.
추억이 되어버린 ‘불턱’
해녀들이 장사를 하지 않던 예전에는 물질을 함께 하러 가는 동무들이 있었다. 물질하기 전에 같이 가자고 미리 약속을 하고 때가 되면 모였다. 물소주를 입고 들어가면 추워서 빨리 나오게 된다. 고무 옷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렇게 물질을 하고 뭍으로 나오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함께 불을 쬐고는 했다. 제주도에서는 이런 곳을 ‘불턱’이라고 한다. ‘불을 피우는 곳’이라는 뜻인데, 해녀들의 삶은 모두 불턱에서 이루어진다. 대변항에도 해녀들이 모이는 불턱이 몇 군데 있었다.

불턱에 모일 때면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고, 쌀을 한 움큼 가지고 작업장으로 갔다. 모닥불 옆에 옹기종기 앉아 추위를 달래며, 주전자에 쌀을 넣고 불에 얹어 밥을 한다. 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밥을 끓여 서로 나누어 먹으며 오늘 작업은 얼마나 했는지, 누구 집에 어떤 걱정이 있는지 이야기를 했다. 내일 날씨는 어떨까, 내일은 또 어디로 가보자 이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곳이 바로 불턱이었다. 그렇게 함께 모여 먹는 밥은 유난히도 맛있었다. 그런 순수한 시절이 지금도 문득 그리워진다.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점포에서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었다. 이제 특별히 필요하지 않으면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해녀가 많다. 물질보다 더 돈이 되는 장사를 쉽게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상꾼 언니들 7~8명 정도만이 여전히 바다를 지킨다.

동무가 없어진 말애씨는 늘 혼자 다닌다. 혼자 바다에 들어갈 때면 무서울 법도 한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간이 크다고 말한다. 멍게나 담치 같은 것들을 채취하기 위해선 연화리까지 나가야 한다. 대변 등대에서 바다를 건너며 연화리까지 헤엄을 쳐서 간다. 그렇게 건너가서 홍합을 따고 그것들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

혼자 물질을 하다 보면 무서운 일들이 참 많다. 파도나 물살처럼 자연 때문에 생긴 일은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드는 위험은 언제 나올지 몰라 그저 조마조마하다. 가장 무서운 일은 잠수한 상태에서 배를 만나는 것. 배가 바다 위로 지나가면 일반 파도와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이 간이 크다고 그렇게 말해대는 말애씨지만 그때만큼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배 뒤에 있는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물살을 완전히 휘저어 놓기 때문에, 자칫 기회를 놓쳐 몸이 빨려 들어간다면 그 자리에서 끝이다. 말애씨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고개를 내젓는다.

배를 만나서 고함을 지르기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혼자 다닌다. 대신 지금은 매립지 주변 바다로 장소를 옮겼다. 물속에 세워놓은 새로운 옹벽 아래에는 신기하게 무언가가 달려 있다. 해물들이 새로운 시멘트 냄새를 좋아하는 것인지, 유난히 새로운 구조물 아래에 생물들이 많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 광안 대교가 생기면서 그 아래에 전복같이 비싼 해산물이 엄청나게 많아져 그곳 해녀들이 횡재를 했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대변항 주변에는 최근에 새로 만들어진 옹벽들이 꽤 많아서 그 아래로 내려가 보면 멍게, 해삼, 성게 같은 생물을 제법 많이 딸 수 있다. 올 여름에는 계속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물론 배들이 많이 다녀서 위험하지만 어쩌겠는가. 돈이 거기 있는데.
욕심 없이 살아가기
하루 종일 물질을 하고 나오면 싱싱한 해산물을 얼른 팔아야 그나마 제 값을 받을 수 있다. 연화리나 서암 주변의 언니들은 기장 시장에서 직접 팔기 위해 오후가 되면 해산물을 가지고 시장으로 많이 나간다. 시장에 앉아서 소매로 직접 팔면 돈을 더 많이 벌수 있다. 성게나 홍합도 접시에 한 움큼 깔아놓고 만원씩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말애씨는 그렇게 팔지 않는다. 마을에서 장사하는 점포에 그대로 넘겨준다. 한 움큼씩 팔수 있는 물건이지만 ‘㎏로 달아서’ 넘겨준다. 크게 벌지 않아도 그렇게 먹고 살 수 있으면 됐다고 생각한다. 시장에 나가려면 큰 짐을 들고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야 되고, 시장에 하루 종일 앉아 “사이소, 사이소” 큰 소리를 쳐야 하는 것도 평생 해보지 않아 모른다. 이래저래 따지면 집 앞 횟집에 팔아버리는 것이 속 편하다.

더운 여름에는 고무 옷 속으로 물이 좀 스며들어야 시원하다. 겨울에는 그래도 따뜻하게 입어본다. 어차피 두꺼우면 움직이기 힘들어 따뜻하게 입는다 해도 부드러운 내복을 입는 정도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그렇게 계절을 느끼며 할 수 있는 만큼 물질을 하고 싶다. 그렇게 잡은 것들은 싱싱한 먹을거리를 찾아 대변항까지 온 사람들에게 맛있게 대접할 수 있도록 가게에 팔면 그만이다.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인생이면 족하다. 어차피 몸만 움직여 자연이 내어준 것들 가져오는 것인데 욕심 부리면 무엇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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