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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중구 토박이가 말하는 부산
중구의 토박이는 누구인가
‘토박이’란 대개 같은 지역에서 성인으로 3대가 연속해서 산 사람을 이르는 명칭이다. 중구는 2011년 6월 전국 최초로 「부산 중구 토박이 선정 및 예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여 1945년 이전부터 중구에 살고 있는 주민[세대] 또는 이 지역에서 3대 이상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는 주민[세대]을 중구 토박이로 명명하였다. 이들 토박이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이나 외지에서 중구로 건너와 국제 시장, 자갈치 시장 등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터를 닦은 이들이다. 1944년생인 동광동 주민 성병목[69세] 씨의 말은 토박이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옛날 집 증축해서 지금 1층에는 마트 운영하고, 2층에서 어머니[98세]하고 큰아들 내외하고 같이 살고 있고. 그라고 손자·손녀 두 명도 같이 살고…. 종손에다 나고 자란 곳이 중구라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부산광역시 중구의 토박이는 대략 최소 20대 이상의 손주와 50~60대 자녀를 둔 80세 이상인 자로, 중구에서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이라 상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들 중구 토박이들은 약 100년 안팎의 세월 동안 직접 듣고 보고 느낀 부산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1931년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나 동광동 동장을 하기도 했던 이영근[82세] 씨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태어난 곳을 ‘달구동네[닭동네]’라고 했는데, 도단집[양철 지붕 집]에 비 떨어지는 소리하며 아버지와 박치기 놀이 하던 기억, 그리고 아버지 술상 옆에 앉아 술 한두 잔 얻어먹은 기억이, 그런 기억이 주욱 납니다.”
부산의 공간에 대한 기억-근대 도시 부산의 형성과 경관 변화에 대한 기억
지난 100년 동안 부산의 공간은 일제에 의해 중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동래부의 변방이던 부산이 원도심의 지위를 갖게 되면서 동래는 부도심화 되었다. 그 뒤 일제가 물러가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저지대는 물론 고지대까지도 판잣집이 들어서면서 주거 공간이 급팽창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도시 개발로 많은 주거 공간이 헐리고 파괴된 위에 연립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대규모 공장 및 상가와 빌딩이 건립되어 도시 경관이 급격히 변모하였다.

또한 지난 100년 동안 거주 인구의 수나 구성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침략자로 들어왔다가 물러갔고, 1945년 귀환 동포들이 부산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에 1950년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부산 주민은 토박이보다 이방인이 훨씬 많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직장을 구하려고 농촌을 떠나 부산으로 오게 된 이들로 해서 이방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영근씨 말이다.

“부산항이 정치, 경제, 군사상으로 굉장히 중요한데, 바다 바로 옆에 바로 산이 있었으니 이기[이것이] 곤란했다 아입니까? 부산항에 넓은 배후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이나 화물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일본도 자기 나라로 우리를 수탈해서 가져가기 쉽게 하기 위해 해안선과 맞닿은 산들을 깎아 바다를 메우고 하는, 대규모 매립 사업이 불가피했을 낍니다. 어쨌든 그래서, 매립을 해서 부산이 현재 모습이 된 겁니다.”

부산 경관의 변화는 새로운 공간 창출과 전통적 공간의 포섭을 통한 경우로 진행되었다. 새로운 공간 창출에 의한 부산의 경관 변화는 축항과 매축을 통해 이루어졌다. 1988년 최초의 매축이 시작된 이래 부산에서는 부산항 매축 공사, 영선산 착평 공사, 부산진 매축 공사, 영도의 대풍포 매립 공사, 남항과 북항 연안 매축 공사, 적기만 매립 등 매립·매축 사업이 진행됨으로써 1930년대 말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전통적 공간의 포섭을 통한 부산의 경관 변화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이루어졌다. 철도는 최초의 지역 철도로 1909년 개통된 부산진~동래선을 비롯하여 시내 전차 노선과 부산~울산선이 있다. 철도가 시내 전차 노선과 연결됨으로써 시내와 교외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시내 전철은 명실상부한 도시 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이영근씨의 말이다.

“전차가 부산진에서 서면을 지나 동래 온천장까지도 갔지요. 일본 사람들 온천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 온천 할려고 전차를 놨지요. 그러다가 이어서 부산우체국 앞에서 대청동, 보수동에 대고 토성중학교까지 전차가 다니다가, 그 뒤에 부산우체국에서 시작해서 중앙동하고 광복동으로 해서 토성중학교까지 다니게 됐고, 나중에 보수동하고 옛날 경남도청[경상남도 도청], 구덕 운동장, 이렇게 다녔지요. 그러다가 1935년도인가, 영도 남항동까지도 들어갔어요. 영도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또 극장도 여러 개가 있어서 영도 다리를 지나 전차가 들어갔습니다. 전차가 1968년까지 운행을 하다가 말았죠, 아마.”
부산의 공간에 대한 기억-주요 공간에 대한 기억
중구 중앙동의 ‘40계단’은 영선산을 깎은 뒤 오늘날의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 여객 부두를 왕래하기 편하게 하려고 설치한 계단이다. 8·15 광복 이후 귀환 동포와 6·25 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이 이 40계단 주위에 모여 살며 생계의 방편을 강구하였고, 동광동과 영주동 판자촌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계단을 거쳐야만 했다. 이영근씨는 40계단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집이 이 근처여서 어릴 때 여기 와서 많이 뛰어놀았지요. 계단 총수가 40개가 되어서 ‘40계단’이라 불렀는데, 6·25 때는 각처에서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파는 ‘구호품 장터’였어요. 고향 등지고 피난 온 사람들이 만나는 이산가족 상봉 장소로도 유명했고…. 암달러상들이 이곳에서 진을 치기도 했는데, 대화재[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가 있은 뒤로 이 일대 주변 주택들이 불타 없어져, 구호품 시장과 암달러 시장이 성황을 이루었고….”

부산에서는 1910년 중구 대청동 복병산 배수지가 준공되면서 본격적으로 상수도를 이용하게 되었다. 부산 근대 수도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복병산 배수지는 성지곡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 와 각 가정에 공급하였다. 이 배수지는 저수용 연못 3개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배수지 형식을 따라 지하에 저수조를 시설하고 그 위에 복토한 후 잔디를 심어 놓았다. 여과 시설 입구와 벽체는 과소 벽돌 콘크리트조 혹은 붉은 벽돌조로, 벽체 상부는 석재로 마감하였다. 중구 화목 노인정의 서중봉[84세] 씨가 말하는 복병산 배수지에 대한 기억이다.

“복병산 배수지는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어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어. 일본인들이 만들었지. 각 집에 물을 그곳에서 공급했지. 아,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배수지에 독약을 타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쫙 돌았지. 그러니 일본 군인들이 깔려 가지고 주위에서 감시를 막 했어.”

토박이들 기억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시장이다. 먹고, 살고, 사람 만나는 일이 여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구에서 나고 자란 이영근씨는 중구에 있었던 근대식 시장에 대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중앙 도매 시장이 미나카이 백화점 부산지점 뒤에 있었지요. 이게 부산 시장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롯데 백화점 광복점 위치지요. 1층에는 생선, 과일 이런 걸 팔고, 2층에 일반 생활 용품을 팔았어요. 봉래초등학교 옆에 영주동 공설 시장도 있었고, 현재 부산 데파트 자리에는 동광 시장이 있었는데 일제 때는 혼마치[本町] 시장이었지요…. 중앙로 주변 상가 뱀탕 전문점이 많이 집결해 있었는데 가수와 악사들이 와서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일본인들만을 위한 시장이 있었는데, 부산역 앞에 있다고 역전 시장이라 불렀어요. 중앙동 옛 부산일보사 뒤쪽에 있었는데, 해방되자마자 없어졌지요.”

중구 화목 노인정의 서중봉씨가 기억하는 재래시장의 유래는 이러하다.

“국제 시장은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본토[일본]로 철수하면서 본토로 재산을 다 가져갈 수 없어 가지고 물건을 좌판을 깔아 놓고 팔면서부터 시작이 되었어. 그러다가 자연적으로 상설 시장이 형성되었어.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부평 시장은 6·25때 미국 보급품으로 나온 식량이 모두 통조림처럼 깡통에 넣어서 나왔는데, 그것과 같이 부평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는 뜻에서 ‘깡통 시장’이라고 불리는 거야. 그런데 부평 시장하고 국제 시장은 확실히 차이가 있어. 부평 시장은 주로 수입 제품이나 수입 식품·그릇·여성복을 팔고, 국제 시장은 도매로 판매하는 물건이 많아. 그런데 부평 시장이나 국제 시장은 지금은 다른 지역에도 시장이 크게 생겨서 부산이나 근처 사람들만 오지만, 예전에는 도매로 구입하려던 사람들이 경북에서도 오고 경남에서도 많이 찾았어. 보수동 책방 골목은 6·25 이후 책이 귀해서 외국에서 들어온 파지나 공부를 많이 한 책을 널빤지에 두고 사고팔던 것이 발전해서 사람이 모이고 하니까 골목으로 형성되어 팔게 되었어. 자갈치 시장은 옛날부터 자갈이 많아서 자갈치 시장이 되었지.”

시장에는 다양한 풍속이 있는데 이에 대한 서중봉씨의 기억이다.

“자갈치 시장에서는 마수[첫거래]를 안경 쓴 여자가 하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생각을 대체로 갖고 있어. 그런데 첫손님으로 애를 업은 아이 엄마가 오면 하루 운수가 좋다고 생각해. 장사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첫손님이 군말 없이 물건을 잘 사 가면 그날 장사 운이 좋지. 예전에는 하루 중 처음 번 돈에 침을 퇴! 퇴! 뱉고 이마에 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전 중에 손님이 물건을 교환하러 오면 장사하는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하지.”
부산의 시간에 대한 기억-일제 강점기
중구 화목 노인정의 서중봉씨는 자신이 겪은 일제 강점기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때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어. 지금은 소나 말이나 먹는 콩 껍질을 삶아서 죽을 만들어 배급했어. 배급도 배급 일지를 갖고 와 도장 받지 않으면 받을 수 없었어. 일제 때 동광동 일대에 목조로 된 2층집이 많았어. 그서[거기서] 왜놈 야쿠자들과 헌병들이 많이 살았는데, 우리 자형이 동광동에 살던 야쿠자에[의] ‘조선인 시다바리[졸개]’였는데, 야쿠자 패거리들이 국제 시장에서 세금 걷고, 극장 관리했어. 조선인 패거리가 있었지만 야쿠자한테 잽이[상대가] 안 돼. 왜놈 순사들이 야쿠자 편을 들어 주고 뒤를 봐 주고 하니….”

3대 토박이 영주동 할아버지[성명 미상, 79세]가 기억하는 일제 강점기도 조선인들에게는 역시 힘든 시기였다.

“나도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녔는데, 내가 덩치가 좋아 왜놈 아[학생]들하고 많이 싸웠어. 내가 하도 많이 싸우니까 우리 아버지가 경찰 명단에 올랐어. 그런데 한날 밤에 친구 분들과 ‘피전(皮廛)’을 하다가 경찰에 잡힌는데[잡혔는데], 다른 분들은 ‘훈계’ 조치를 받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손가락 2개를 잘랐어. 정말 숭악한[흉악한] 놈들이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꺼내 오기 위해 집 앞에 있는 헌병 대장한테 찾아가 온갖 잡일을 하며 용서를 구해 갖고, 그 덕에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어. 무서운 세월이지…. 이런 것도 생각나네. 일본 아들하고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조선인은 수업료가 1~2전인데 일본 아들은 수업료가 무료였어. 그 1~2전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조선인이 많았어.”

그런 엄혹한 시절에도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영근씨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으로 금메달 받았을 때 동네에서 또래들과 ‘손, 귀, 택’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선연하다.

“여섯 살 땐가 그럴 겁니다.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받았다고 모두들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했지요. 그때 우리 동네 두세 살 많은 선배가 연필 2자루를 상품으로 걸고, 달리기 시합을 시켰어요. 현 중구청에서 고관 입구까지…. 그 거리가 얼맙니까?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그리고 우리한테 놀이를 가르쳐 줬는데, 이런 겁니다. 손뼉을 치며 ‘손’, 귀를 잡고 ‘귀’, 턱을 만지며 ‘택’, 그렇게 소리 내고, 그리고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게 했어요. 아마 우리가 뛰면서도 그리 했을 겁니다. 그 선배가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한테 손기정 선수를 생각하도록 핸 거지요.”

왜 손기정을 손귀택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 어린 학생들은 손기정의 이름을 제대로 몰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영근씨는 일제 강점기 말 봉래국민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애국 조례와 신사 참배, 학예회 등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가지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 운동장에서 아침 조례[애국 조례]를 했는데, ‘교육 칙어’ 낭독을 하고, 국민 선서[황국 신민 서사] 그것도 외워야 되고, 봉안전(奉安殿)이라는 집 모양인데, 작은 집 모양의 물건인데, 그 앞에서 절을 하고 (했어요). 이 봉안전은 현관 중앙 옆에 설치되었는데, 학교는 현관 서편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해방 되어 갔고 없어졌지요. 태평양 전쟁 나고 나선가? 그 전에도 신사에 참배를 가라 마라 뭐 이렇게 했는데, 우리[학교]는 용두산 공원이 가까웠으니까, 그때 부산에 대표적인 신사가 용두산 신사였지 않습니까? 그때 학교에서 걸어서… 1, 2, 3학년은 안 갔지, 아마 4, 5, 6학년들은 남녀 학생들은 모두 매주 월요일 날 조례가 끝나며는 행진을 해 가지고 영선 고개를 넘어서 (현재의) 백산 거리로 해서 (현재의) 타워 호텔로 해서 용두산 공원으로 계단으로 해서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신사 입구에는 도래이가 있는데,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 입구에 도래이가 있고, 계단 양쪽에 사철나무가 주욱 있는데, (현재의) 팔각정 그 앞에서 좌악 줄을 맞춰 가지고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데, 우리는 그때 그기 뭐 강요인지 뭔지도 몰랐지요.”

“학예회를 하면 음악, 독창도 있고 중창도 있고, 시 낭송, 무용. 그런데 그때 무용은 별로 한 게 없고, 일본 무용은 배울라 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우리 무용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학교서는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나무로 만든 칼이 있습니다. 그기 이름은 모르겠네, 나무로 만든 칼, 그놈으로 율동을 하는데, 여학생들은 그런 걸 했고, 일종의 검무, 검무죠. 우리는 나무총을 갖고 ‘야!’ 하며 총검술을 그런 것을 했지요. 그런데 이기 따로 하는 기 아니고 연극의 일부로 들어갔지요. 학예회 때는 연극을 한다 아입니까, 어떤 해군 제독인데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라고, 이 도고 헤이하치로를 주로 소재로 해 가지고 연극을 했는데, 그때 검무나 총검술 이런 기 부분적으로 들어갔지요.”
부산의 시간에 대한 기억-광복 전후 시기
이영근씨는 1944년 부산공립공업학교[현 부경대학교]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5년제 학교였던 부산공립공업학교는 8·15 광복 뒤 6년제로 바뀌었고, 이영근씨도 6년간 학교를 다녔다. 일제 말기에는 일제가 전쟁 수요로 인해 공업 학교를 정책적으로 적극 지원했고, 당시 부산에서는 우수한 조선인 학생들이 공업 학교에 많이 진학했다고 한다.

“우리가 부산공립공업학교를 가게 된 것은 노다이 사건 때문에 동래고등학교나 부산상고는 한 번 더 그런 반일 데모가 나면 학교를 폐쇄시킬 거라 (당국이) 선언을 했고, 그 학교를 갈 수가 없는 기라. 까닥하면 학교가 문을 닫을 판인데…. 그래서 우수한 학생들이 동래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부산공립공업학교를 갔다. 일본 학생들이 우리보다 수준이 좀 떨어지는 거라. 그리고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우리 조선 학생 중에 신체가 좋은 애들이 좀 많았어요. 그래서 일본 애들이 우리한테 꼼짝 못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야! 까불지 마.’ 그랬는데, 그런 말을 조선말로 했다가는 큰일이 나는 기라. 일본말로 하는 것은 괜찮은데 조선말 하다가 걸리면 (일본인 선생이) 머리를 앞뒤로 깎아 고속 도로를 내는 기라.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절대 조선말을 못 하는 기라.”

부산공립공업학교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이 공학한 학교였는데, 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본인 학생들의 횡포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겪었던 일본인 학생들의 행패를 이영근씨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본인 상급생들이, 조그만 한 것들이 와 가지고 ‘건방지다’고 엄청난 기합을 주고 엎드려뻗쳐 해놓고 빠다[방망이]를 치는 기라. 우리 조선인 상급생들은 절대 그렇게 안 하는데, 일본인 상급생 이것들은 그런 일을 다반사로 했죠. 그렇게 맞고 교실에 들어와 보면 도시락이 없는 기라. 그리고 3, 4교시에 주로 체육 시간이나 운동장에 나가 집합이나 그런 수업을 하고 들어오면 도시락이 없는 기라. 그때 배급제라도 조선인 아이들은 어떻게 싸 와도 쌀밥을 싸 온다 말이지요. 계란말이라든지 이런 반찬에. 한 반에 조선인들이 서른 명 정돈데 그중에 한 열 명이나 넘는 애들의 도시락이 없는 기라. 그래 알고 보니까 2학년, 3학년 일본인 상급생들이 도시락을 훔쳐 갔는 기라.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면 주로 화학 실험실, 화학 실험실에서 까먹고 버려 놓기 일쑤였어요. 거 가면 도시락, 벤또는 있어요.”

일제 강점기 말에는 학생들도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이영근씨가 들려주는 부산공립공업학교의 사례다.

“일본인 선생들은 평소에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일본 자랑하는 거…. 이러다가 패망이 짙어 오면서 미국이 상륙해 오면 옥쇄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면서 가르쳤지요. 수영 비행장 닦을 때 장비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곡괭이, 삽 이런 거로 작업을 하는 거죠. 우리는 옆에 있다가 큰 돌멩이가 하나 나오면 비행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들고 날랐지요. 두 번만 하면 하루가 갔죠. 그리고 조선방직 공장이 불이 났다 말이죠. 솜 공장에 불이 났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또 응용 화학과라고, 우리 학과만 화재 피해 복구 작업에 그런 동원…. 수업 시간 까먹고 특히 영어 시간에 동원. 일제 말기에도 영어 시간이 있었는데, 1주일에 2시간인가 3시간인가 있었는데, (공부는 안 시키고) 다른 일 시키고. 그런데 에이 비 씨 이런 거 조금은 했죠.”

1945년 8월 15일의 상황을 이영근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 가까이 돼 갖고는, 바로 해방 직전에 (부산공업)학교 바로 옆에 전신 전화국이 있었는데, 사택들도 붙어 있었고. 그 옆 야산이 소나무가 울창한 숲인데, 거기서 우리는 방공호를 여러 개 파고 있었어요. 지금 남구청[당시 부산공립공업학교 자리] 바로 앞 구불구불한 도로가 그때 신작로였어요. 남구청 맞은편은 모래밭인데 야산이 있었어요. 완전 민둥산은 아니고 소나무도 조금 있는 작은 언덕인데, 거기에 소나무 두 그루가 보기 좋게 서 있었어요. 밑에서 보면 훤히 보이는 거죠. 우리가 니혼마쓰[二本松]라 했어요. 8월15일 날 일본 천황이 항복 담화 발표를 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방공호를 파고 있었어요. 12시에 방송이 있고 1시에 우리를 철수시켜서 학교에 돌아갔는데, (일본인) 선생들은 침통해 있고 일본 애들은 일본 애들끼리 속닥속닥하고 우리 애들은 우리끼리 속닥속닥하며 ‘전쟁 끝났다.’고 하고…. 그날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오는데 대연 고개 넘어 문현동 쪽으로 오는데 온천지가 환~ 하게 전기가 들어와 가지고, 그 전에는 그 고개에 서면 깜~깜했는데, 막바지에 1년 동안 등화관제 때문에 밤에 불을 못 켰는데. 암흑세계….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환~하니까…. 그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니혼마쓰) 소나무를 가지고 아치를 만들어 가지고 영어로 ‘웰컴’ 이라고 붙여 놓은 거라요. 아직 미군들이 오지도 안 했는데. 아마 마을 주민들이 만들었겠지요. 소나무를 가지고 아치를 만든 것을 우리는 개선문이라 했어요. 그런데 그게 우리 학교 앞만 있은 것이 아니고 부산 시내 다른 데도 몇 군데 있었는데, 이렇게 개선문을 만들어 해방을 기념했어요.”

8·15 광복 직후 부산에도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학생 신분이었던 이영근씨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는 치안 본부가 아닌 하부 단위인 영주동 파출소에서 활동했다. 이영근씨의 경험을 통해 당시 치안 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되고 영주동 파출소, 그때는 영주 교번소(交番所)라 했지요. 교번소에서 학생 치안대를 했어요. 치안대 본부는 초량에 봉래각에 있었는데, ‘학생 치안대’라는 완장을 차고 교번소 앞에 서 있기도 했지요. 학생 치안대가 지키는 창고에는 별별 물건들이 다 있었는데… 돼지 껍데기로 만든 군화, 담배, 모르핀 주사약…. 지키는 게 허술하여 사람들이 와서 슬쩍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나는 그런데 공부할 때 공책을 가지고 싶은 포원(抱願)이 들어서 전지 종이를 가져갔어요. 무거워 교번소에 잠깐 들러 쉬다가 집으로 가져가서 원도 없이 썼죠. 모든 학생들이 학생 치안대 활동을 핸기 아니고 많이 안 했어요, 저는 좀 적극적으로 했어요. 참가 학생들은 교대 교대로 근무를 했는데, 9월 며칠까지 했어요. 그리고 10월에 학교를 갔어요. 학교가 1달 늦게 개학을 한 거죠. 우리는 일본 경찰들하고 충돌은 없었는데 치안대 본부에서는 총격전이 있었어요. 해방이 돼서도 일본 순사들이 치안권을 우리한테 안 넘기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일본에 반대적인 감정이 있고 일본놈을 조심해야 된다 이런 감정이 있었어요. 그런 것이, 우리는 독립투사 이야기도 집에서 들은 바가 있고, 김구 선생이 상해에서 임시 정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어쩌고저쩌고 미국에서의 이야기, 그 다음에 팔로군에 김일성 장군, 김일성 장군은 열두 가지 전술로…. 이런 거 다 알지요, 누구나 할 거 없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했지요. 김일성 장군은 말 타고 올 것이고 이승만 박사는 비행기 타고 올 것이고 김구 선생은 기차를 타고 올 것이고, 마 그런 정도…. 그리고 ‘미국을 믿지 마라,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놈 다시 일어난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에 우리가 모두 하는 소리였습니다.”
부산의 시간에 대한 기억-6·25 전쟁 시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외지 사람들이 국제 시장에서 담배 장사, 옷 장사, 심부름꾼을 했다. 당시 부산에 미군의 보급창이 있어서, 거기서 나온 군용 물자가 거래되었고, 밀수품도 거래되었다. 80대 초반의 토박이 최철씨는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어. 그 당시 국제 시장에는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장사를 많이 했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 지금에[의] 중앙 부두에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여기서 보급 물자 일부를 일반 민간인 사람들에게도 보급했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약삭빠른 브로커들은 미군 장교들과 접촉해 가지고 이런 물자를 빼내 팔기도 하고, 어떤 브로커는 짬밥통[잔반통]까지 돈을 주고 거래를 했다 하더라고. 1953년에 국제 시장에서 큰불이 났는데, 하루 종일 타고…. 그라고 나서 지금처럼 여러 공구[구획]로 나누어졌지. 6·25 때 부산역 옆에 작은 미군 부대가 있었어. 그런데 그서[거기서] 나온 ‘꿀꿀이죽’으로 피난민들은 끼니를 때웠지, 미군들한테 구걸도 하고….”

최철씨는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들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6·25 사변으로 많은 철거민과 피난민들이 아미동으로 옮겨 가서 살았어. 내 친구들 이야기 들어 보면 그때 당시 아미동은 일본인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때는 납골당 형식이었대. 그런데 그걸 집으로 고쳐서 살았다는 거지. 그 이전에는 그 주위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집이라고 해 봐야 묘지 주변에 판자 이어 붙인 울타리 치거나 나라에서 준 천막 치고 많은 가구가 함께 살았어. 많은 곳은 11가구도 살고, 가마니 깔고. 가마니 두 장에 한 가구가 살고. 변소도 없어서 구덩이 파서 공동 화장실을 만들고, 루핑 쪼가리나 박스 사용해서 집 짓고, 그래 산 거지…. 6·25 때 아미동으로 이주한 후 처음에는 강냉이 가루를 죽으로 만든 것을 배급 받아 먹었고 꿀꿀이죽도 먹었다고 했어. 꿀꿀이죽은 미군들이 남긴 음식 찌꺼기를 얻어 와 죽 끊여 만든 것이었는데, 가끔 이쑤시개나 병따개 같은 기 나오기도 했다네. 그래도 사는 기 힘들어도 살기 위해서는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하대.”

6·25 전쟁으로 각지에서 많은 화가가 모여들어 1950~1953년에는 광복로와 대청로의 다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시회가 많이 열렸다. 이 시기에 동광동 40계단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던 이영근씨는 궁핍했던 화가 이중섭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은박지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씨 이야긴데요. 피난 시절에 돈 한 푼도 없을 땐데 이중섭씨가 가끔 40계단 근처에 왔었어요. 그런데이중섭씨가 중구에 살려고 온 게 아니고… 일본에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을 갈려고 하면 그 [부산] 부두에 와야 할 꺼 아닙니까? 그런데 돈이 한 푼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동사무소[지금의 동광동 주민자치센터] 옆에 있는데, 그가[거기가] 40계단 옆이잖아요.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은박지 없어요?’ 그래서 은박지도 줘 가면서 이야기도 시켜 가면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거를 보고 그랬지요. 그런데 은박지 그림이 지금은 대단하지요. 그때 내가 스무남 살 가까이 됐나 그랬습니다.”
부산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기억-의식주
자갈치 시장을 가면 생선 장사하는 여성들도, 초량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들도 작업복으로 몸뻬 입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몸뻬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이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실시하면서 우리 국민에게 강제적으로 착용하게 한 옷으로, 허리와 발목을 조이고, 다른 부위는 풍성하게 하여 활동성을 최대화한 작업복이다. 4대째 영주동에서 살고 있는 김영희[69세] 씨는 몸뻬의 내력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처음에 이 몸뻬라는 것을 해괴망측하다는 이유로 기피했답니다. 그런데 활동하는 데 편리한 데다 일본의 정책으로 정착되어 작업복으로 널리 입게 되었지요. 돌아다니기 편한 옷으로 이 몸뻬만 한 게 없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민들이 몰려와 부산은 너나 할 것 없이 식량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많은 사람이 밀면과 꿀꿀이죽 따위를 먹으며 연명했다. 김영희씨의 기억이다.

“6·25 피난 시절 이북 사람들이 냉면 대신 만들어 먹었다고 들었어요. 밀가루하고 전분을 섞어 만드니 값도 싸고 양도 많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겠지요. 6·25 당시,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미군들이 먹다가 버린 짬밥통을 뒤져 빵 조각이나 햄 조각 같은 것을 먹고, 잔반으로 꿀꿀이죽을 끓여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그때 어머니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 포로, 거기서 석방된 포로에게 줄려고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을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네 노인분들이 명태를 많이 먹었는데, 그기 명태고방에서 나온 명태인지는 모르지만, 쭉쭉 뜯어 먹으면서 정말 맛있다고 하고, 술안주로도 즐겨 먹었어요. 또 당시에 명태 눈알이 고소한 데다 그때 명태 눈알을 먹으면 시력이 좋아진다는 말이 있어서 그렇게 먹었습니다.”

부평동의 이증식[80세] 씨는 1933년 두 살 나이에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에서 중구 보수동으로 이사 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광복 직후 일본 사람이 거주했던 기와집을 사들인 것으로, 당시의 기와집 모습 그대로다. 이씨가 거주한 집의 역사만 70~80년은 족히 된다고 한다.

“왜정 때 지은 집들은 걸어 다니다 보면 다 확실히 알 수 있지. 정말 오래된 데도 2층집이야.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집과 집 사이를 띄워서 짓지 않고 다닥다닥 붙여서 지었어. 우리하고는 다른 거지. 왜정 때 지은 집은 지붕을 자세히 보면 나무판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들었어. 지금 남아 있는 이층집들은 세멘[시멘트]으로 돼 있는데, 그기 처음에는 세멘이 아이고[아니고] 나무였다고.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모[올라가면] 계단이 삐걱삐걱 소리가 나.”

부산시에서 공공 주택 건립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60년대에는 시영 주택 건립이 활발해져 1962~1988년 말까지 총 2만 6,617가구가 건립되었다. 영주동 시민 아파트를 분양 받아 한때 살았던 김영희, 김학곤[73세] 부부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영주 아파트가 부산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아파트입니다. 4층 건물인데, 뼈대만 건립한 후에 분양을 했어요. 내부 장식은 입주자가 부담해서 했고. 시에서 신청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때 5만 7,000원인가 5만 8,000원인가에 12평[39.69㎡]을 분양 받았지요. 부자들은 2칸을 사서 터서 썼고요.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이고. 1970년에 입주를 했는데, 그 당시에 16블록이 현재 금호 아파트고 11블록, 9블록이 동아 아파트죠. 현재 남아 있는 기 2, 3블록입니다…. 이 산복 도로에 처음으로 버스가 올라올 때 얼마나 좋았는지, 86번 소형 버슨데 개통할 때 박카스 사서 기사한테 건네 주었어요.”
부산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기억-통과 의례
지난 100년 동안 탄생이나 돌, 백일 등에 얽힌 중구 토박이의 기억은 여러 가지 금기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산모에게 금기된 것으로는 음주와 약물 투여, 흡연으로, 절대 피해야 하는 행동이며, 상가(喪家)에 문상 가지 않는 것도 이제나저제나 같은 풍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김영희씨는 산모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과 태의 처리에 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문어, 낙지, 오징어 등이 금기 음식이었는데,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뼈 없는 아이가 태어날까 봐 그랬어요. 그리고 닭이나 오리도 안 먹었어요. 태어난 아이의 피부가 닭 껍질처럼 된다는 속설 때문이었지요. 애를 낳고 나서 태를 처리해야 했는데, 애 낳기 전에 깔아 놓았던 짚과 함께 싸서 불사르거나 돌에 달아서 바다에 빠트리기도 하고, 땅에 묻고 돌을 쌓아 돌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돌잔치나 백일잔치에 관해 김영희씨가 기억하는 것은 이렇다.

“돌잔치나 백일잔치가 원래 집에서 동네 사람들 초대해서 딸이나 아들 잘 크게 해달라는 뜻으로 잔치를 여는 건데, 동네 사람들한테 우리 아들딸을 자랑하는 마음도 있었지요. 못 먹고 못 입는 시절에는 아이들이 금방 죽어 버리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고, 또 1년 동안 잘 살아 있는 것을 축하해서 돌잔치를 했지요. 그래서 돌잔치에는 꼬까옷이라고 하여 오색 저고리를 입혔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신부 집으로 함진 애비를 보내는 풍습은 오래된 것인데, 원래 함진 애비는 결혼한 사람이나 그중에 첫애로 아들 난 친구가 하거나 결혼 날짜 잡힌 친구가 맡았다고 한다. 함 팔기에 대한 김영희씨의 기억이다.

“집에서 족두리를 하고 연지 곤지 찍고 있으면 신랑이 데리러 왔지요. 그리고 결혼을 해서 아들을 둔 신랑 친구가 함을 팔러 오는데, 함 파는 사람은 오징어 가면을 쓰고 함을 팔러 와요. 집 문 앞에 바가지를 놓고 돈 봉투를 올려 두는 집도 있었는데, 이렇게 했는데 함 파는 사람이 바가지를 잘 깨면 신랑 신부가 오래 잘 산다고 믿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부산의 역사를 돌아보면 눈이 핑 돌 정도로 빠르게, 종횡으로 변모되었다. 거주 인구의 수 또한 150배 이상 늘었으며, 거주민의 구성도 다양하게 변해 부산은 아주 복잡하고 혼종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구 토박이들의 기억의 편린들을 조각보처럼 꿰어서, 지난 100년의 부산의 일상을 복원해 보고자 하는 것은 꽤나 흥미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현재 할 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기억의 편린들을 작은 주제별 격자에 모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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