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도 입교와 감천동에서의 생활
손판암 할아버지가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부산에서 조그맣게 가내 공업을 하고 있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고 1957년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일하기를 얼마, 다시 이모의 지인 소개로 해양 경비대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해양 경비정에 승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해양 경비정은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있는 도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출근을 했다. 두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 부모님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육지에 있어도 염려가 되는데 배를 타는 험한 일인 데다 또 사고가 날지 모른다며 일하러 가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손판암 할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갔다.
밀양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는 동안 시골에 물건을 팔러 온 태극도 교인을 만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후천 개벽하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태극도에 입교했고, 손판암 할아버지도 부모님을 따라 태극도를 믿게 되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부모님 지인의 소개로 동향의 여성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9년 부부가 함께 부산으로 와 태극도 본부가 있던 감천동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의 생활은 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궁핍하였다. 밥을 해 먹을 수 없던 감천동 주민들은 노깨가루로 연명하였다. 노깨가루는 밀의 껍질로, 밀가루를 빼고 남은 껍질 부분으로 반죽이 잘 안 되었다. 왕겨와 비슷해서 끓여 먹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손판암 할아버지의 기억에 의하면 1959년 당시 감천동에서 생활하던 태극도 교인 수는 2만 명이 넘었다. 1955년까지 태극도 종단은 부산 시내 보수동 산비탈에 있었다. 그런데 부산역 주변에서 대화재 사건이 발생하면서 화재에 약한 판잣집들을 대상으로 도시 계획이 입안되었다. 부산시에서는 태극도 교도들에게 감천동 지역으로 집단 이주할 것을 권하였다.
부산시에서 처음 이주지로 추천했던 곳은 감천동이 아니라 영도였다. 그런데 영도 터를 본 태극 도주가 길지가 아니라고 생각해 반대했고, 이후 감천동으로 정착이 진행되었다. 1955년 7월 택지를 조성하여 그 해 10월 800가구 4,000여 명의 교인이 감천동 산기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면서 감천동이 태극도 마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세도 약해지고 교인들이 거의 대부분 떠나 이전의 성세는 사라졌다. 현재 감천동에 남아 있는 태극도 신도는 1,0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조의 제사가 있는 날에는 전국의 교인이 이곳 감천동을 찾아와 참배를 한다. 감천동은 도로가 넓지 않은 탓에, 태극도 제사가 있는 날에는 수많은 버스 행렬로 도로 교통이 마비되기도 한다.
부산은 피난 도시로 사람들이 넘쳐나던 탓에 모두가 궁핍했지만 특히 감천동에 살던 주민들의 형편은 더 열악하였다.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취직이 어려웠다. 고물 장수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대다수였다. 거기다 생활 범죄도 많아 사람들이 기피하던 동네였다. 그런데 이 소외된 지역에 1962년 부산 화력 발전소가 들어오면서 변화가 생겼다.
화력 발전소를 건립하려면 먼저 땅을 매립해야만 한다. 화력 발전소가 들어설 자리에 있던 돌산을 발파해야 했는데, 부수어 뜨린 돌을 부산항까지 운반하는 노역을 마을 사람들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 힘들고 고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마을 모습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59년 거대한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휩쓸었다. 부산 지역도 피해가 많았는데, 전국에서 구호목이 들어와 그 나무들을 마을 여기저기 쌓아 놓고 관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손판암 할아버지는 동사무소에서 일을 하던 호적 계장과 친분이 있던 탓에 나무 관리를 맡을 수 있었다. 또 그때 전국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이 발족하면서 문맹 퇴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던 탓에 손판암 할아버지는 부두 일과 구호목 관리를 같이하면서 재건국민운동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 영장이 나와 3월에 입대하였다. 입대하기 전까지는 아이가 없었는데, 그가 군대에서 군복무를 하는 사이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아내는 이웃이 쓸모가 없다며 밭에서 거두지 않은 배추나 무를 주워 국을 끓여 먹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농번기에는 시부모가 있는 마을로 내려가 집안일을 도우면서 기거하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1965년 제대한 후 잠시 부모님이 있는 밀양으로 갔다가 일을 구하지 못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감천동 주민들은 생활이 무척 궁핍하였다. 6·25 전쟁의 영향도 있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돈을 벌 만한 특별한 기술이 없는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 부산 화력 발전소 건설을 기점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하면서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부산 시내 수많은 건설 현장마다 주민들이 인부로 나가 돈을 벌어 오게 된 것이다. 일을 하면서 벌어 온 돈으로 궁핍했던 생활도 조금씩 개선이 되었다.
제대 후 부산으로 내려온 손판암 할아버지는 이웃에 살던 도목수 밑에서 보조로 일을 도우며 건축과 관련한 전반적인 업무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시내 여러 곳에 건축 현장이 펼쳐졌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다니면서 현장 일을 처리하였다. 일종의 서기, 사무장과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이다. 눈썰미가 있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빨리 건축 도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일을 한 사람들도 도면 읽는 법이 서툴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경력은 얼마 안 됐지만 평면도나 상세도와 같은 도면을 볼 줄 알면서 손판암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작업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목수 아래에서 3년 동안 건축 현장 일을 배우며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았다고 판단한 손판암 할아버지는 독립해서 주택과 공장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성실함과 책임감, 여기에 남다른 안목을 가진 탓에 그에게 건축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 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당시 부산에서 유명한 동서해운 양재운 사장의 집을 짓는 일도 맡게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건축 현장을 떠나지 않는 손판암 할아버지의 성실함을 신뢰하게 된 양재운 사장이 주변 지인과 친척들 가운데 건물 지을 일이 있으면 그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1968년부터 1970년 사이 건축업으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부산의 여러 유명 인사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국제신문사 편집국장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70년부터는 개인 사업자로 일을 했는데, 의뢰가 들어온 일 가운데서 골라서 할 만큼 사업이 잘 되었다.
1970년대를 넘어가면서 감천동 지역 판잣집들의 높은 화재 위험과 노후화 등의 문제가 제기되자 부산시에서 주택 보수 승인을 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판잣집들이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붕에 슬레이트가 얹히고, 건물 높이가 블록 12장 정도에 해당하는 어느 정도 통일된 집들로 주택 보수가 진행되었다. 거의 모든 세대에서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보다 조금 더 늦게 집을 짓는 경우에는 건물 높이가 블록 15장, 16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그 위에 다락방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한 방에서 부모와 같이 생활하던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독립된 개인 방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자녀들이 결혼 후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면서 빈 방은 세놓기도 하였다.
현재 2층 집들은 대개 이러한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건물 외부에 별도로 색을 칠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다채로운 색으로 건물 외부를 채색하고, 이것이 감천 마을만의 독특한 경관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직장과 결혼 등을 통해 비교적 낙후된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감천동은 이전의 전성기를 지나 조금씩 쇠락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건축업으로 모은 돈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계획할 수 있던 손판암 할아버지의 삶에 변화를 준 것은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면서였다. 1991년부터 손판암 할아버지는 사하구 구의원에 당선돼 6년 동안 다양한 일을 하게 되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특히 건축이나 도시 개발과 관련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건설 현장과 계획 부서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점을 중간에서 잘 풀어 주는 그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지금은 지방 자치 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월급 등이 나와 경제적으로 안정된 수입을 제공하지만 막 지방 자치 제도가 시행되던 그때는 구의원으로 당선돼도 활동비나 급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건설 현장을 방문한다거나 사람을 만날 때면 모두 개인 돈으로 대접을 하는 등, 구의원으로서 품위 유지와 선거 비용에 그 동안 모아 놓았던 돈을 많이 탕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