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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의 산토리니, 감천 문화 마을
감천동의 역사
감천동은 천마산(天馬山)과 아미산(蛾眉山) 사이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986년 발간된 『사하지』에 따르면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라고 하였다. 감(甘)은 검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신(神)’을 뜻한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감내가 ‘검내’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기와 조각과 고려 청자 편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는 요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 때는 감천만을 출입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하는 수문(守門)과 공청(公廳)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감천만 해변은 작은 어촌과 함께 큰 소나무들과 몽돌 자갈밭을 가진 경치 좋은 해수욕장이었으나, 1962년 이후 부산 화력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그 아름다운 절경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5대에 걸쳐 감천에서 살아온 토박이 김용조에 의하면 지금의 감천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던 감천진영학교와 함께 바다 쪽으로 ‘감내포’라고 불린 곳을 중심으로 광복 전후 100여 가구가 살았으며, 6·25 전쟁과 1960년대 이전까지는 과거의 모습을 유지했다고 한다.

바다와 가까운 감천 1동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었다. 여기서는 고인돌 6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감천 2동은 6·25 전쟁 이후 피난을 내려온 태극도 교인 수천 명이 집단 이주를 한 곳이기도 하다. 부산 중구 보수동에 있던 태극도 본부와 교인들의 판잣집이 1955년 7월 부산시의 철거 계획에 따라 감천 2동으로 옮겨 왔던 것이다.

당시 태극도 교조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가 감천 2동 전체 지역을 9개 구역으로 나누어, 집과 집들은 서로 통하고 경사면을 이용해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 질서정연한 마을로 조성한다는 계획 아래 교인들의 정착촌을 만들게 하였다. 감천 고개에서 옥녀봉 쪽으로 1감, 2감, 3감, 4감으로 나누어 계단식 택지를 구획하고, 본부가 자리한 중앙 지대 5감 남단에서 천마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쪽으로 6감, 7감, 8감, 9감을 정해 구궁구곡(九宮九曲)의 형상을 이루게 하였다. 태극도 마을이 만들어진 초기에는 3,000가구 1만 명이 넘는 교인이 거주하였으나, 1958년 도주 조철제가 사망하면서 교단은 분열을 겪게 되었고, 교인들 세도 약해졌다.

감천동 일대 판잣집들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으로 개조되었고, 1980년대에는 슬래브 주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판잣집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마을의 특색을 잘 보여 주는 가로 구조 골목들과 감으로 나누어졌던 초기 구획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특색 있는 경관을 잘 보여 준다.

감천동은 6·25 전쟁 당시 팔도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에 의해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애달픈 한국 현대사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장소다. 1960~1970년대 개발과 아파트 재개발 등에 의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대부분의 도심과 달리 이곳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부산의 옛 경관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또한 항도 부산 특유의 산복 도로가 놓인 동네면서 초기 태극도 교인들에 의해 구획된 마을의 질서정연한 구조와 골목길이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귀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신흥 종교 태극도의 탄생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출신인 조철제는 항일 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망명하던 중 기차가 대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三界)의 진주(眞主)이니 이는 막중한 천기(天機)라. 그대가 나의 도통(道統)을 이어 치천하 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 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大公事)를 성취하되 내 명교(明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 이화(無爲而化)로 광구 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 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 상제(天尊上帝)로다.”

1921년 조철제는 다시 구천 상제로부터 “속히 환국하라.”는 계시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 후 조철제는 전국 각지를 편력하였다. 충청남도 태안 안면도와 전라북도 정읍군 감곡면 황새 마을에서 포덕 활동을 하는 한편,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호 증산(甑山)]의 누이동생 선돌 부인을 만나 1921년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교명으로 교단을 창립하였다.

이후 조철제는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에 120여 칸의 큰 교당을 짓고 새로운 취지 강령과 도규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때 모여든 신도 수가 10만여 명에 달해, 당시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車京石)이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는 것에 비유해 일반 사회에서는 조철제를 ‘조천자(趙天子)’라고 불렀다. 또한 진업단(眞業團)이라는 신도 단체를 만들어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척 사업을 벌여 20여만 평[66만여㎡]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함경북도 무산과 북만주 목단강 근처에서는 벌채 사업을 벌였으며, 전라북도 전주군 이서면의 사금광(砂金鑛)과 충청북도 음성의 무극 광산 등 금광 사업에도 손을 대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1936년 조선총독부가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단행했던 ‘유사 종교 해산령’에 따라 교당 건물이 철거되면서 본부가 해체되다시피 하였다. 1948년 조철제는 본부를 부산시 보수동으로 옮기고 태극도라는 명칭으로 다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5년 조철제는 3,000가구 1만여 명의 신도를 부산시 감천동으로 집단 이주시켜 도인촌을 건설하였다.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하자 태극도는 조철제 아들인 조영래(趙永來)의 구파와, 조철제 사망 직후 잠시 종단 책임 직인 도전(都典)을 맡았던 박한경(朴漢慶)의 신파로 분리되었다. 박한경의 신파는 그 후 서울로 이전하여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라는 별도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태극도는 전국에 123개 교당과 약 18만여 명의 신도를 갖고 있다. 신앙 대상은 양위 상제(兩位上帝)로서, 강일순(姜一淳)[호 증산(甑山)]과 조철제다. 신조(信條)는 1. 음양 합덕(陰陽合德), 2. 신인 조화(神人造化), 3. 해원 상생(解寃相生), 4. 도통 진경(道通眞境)이며, 강령은 1. 안심(安心), 2. 안신(安身), 3. 경천(敬天), 4. 수도(修道)다. 경전으로 『진경(眞經)』을 사용한다.
태극도 교도 손판암 할아버지의 감천동 이야기-병약한 어린 시절
감천동 토박이나 다름없는 손판암 할아버지는 193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는데, 호적에는 1942년생으로 되어 있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위로 누나와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당시 생활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그는 봉황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한 친구들 가운데 중학교로 진학을 한 친구는 전체 학생 중 불과 세 명뿐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대부분 넉넉지 못한 탓이었다. 더욱이 그는 어린 시절 몸이 병약해서 농사를 짓기도 어려웠다.

어린 시절 병약한 아들을 걱정한 어머니가 한 유명한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큰 바위에 팔면 팔자가 좋다”고 해 ‘바위 암(巖)’ 자를 넣어 ‘판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던 그를 부모님은 태고종 소속의 은선암이라는 암자에 보내 스님 밑에서 한학을 익히게 하였다. 그 시절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공부하였다.

한창 고향에서 보리타작을 할 무렵 손판암 할아버지는 스님에게 마을로 내려가기를 청하였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집으로 내려가서 힘든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스님의 허락을 얻어 마을로 내려갔지만 부모님이 그를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다. 농사일을 해 보지도 않았고, 힘도 약했기에 산에 가서 스님에게 글공부를 더 배우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그 길로 다시 두 시간 넘어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 공부를 해야 했다. 집이 가난하기도 했고 또 몸에 특별히 병이 있었다기보다는 허약한 체질 문제라고 여겨 병원에 다니지는 않았다고 한다.

암자에서 공부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그의 집이 윗동네에서 아래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손판암 할아버지도 암자를 떠나 가족과 함께 가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는 참봉을 지낸 어른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손판암 할아버지를 보더니 자기 집으로 와서 한학을 계속 수학할 것을 권유해 공부를 이어 갈 수 있었다.
태극도 입교와 감천동에서의 생활
손판암 할아버지가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부산에서 조그맣게 가내 공업을 하고 있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고 1957년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일하기를 얼마, 다시 이모의 지인 소개로 해양 경비대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해양 경비정에 승선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해양 경비정은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있는 도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출근을 했다. 두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 부모님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육지에 있어도 염려가 되는데 배를 타는 험한 일인 데다 또 사고가 날지 모른다며 일하러 가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손판암 할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갔다.

밀양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는 동안 시골에 물건을 팔러 온 태극도 교인을 만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후천 개벽하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태극도에 입교했고, 손판암 할아버지도 부모님을 따라 태극도를 믿게 되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부모님 지인의 소개로 동향의 여성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9년 부부가 함께 부산으로 와 태극도 본부가 있던 감천동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의 생활은 밥을 먹을 수 없을 만큼 궁핍하였다. 밥을 해 먹을 수 없던 감천동 주민들은 노깨가루로 연명하였다. 노깨가루는 밀의 껍질로, 밀가루를 빼고 남은 껍질 부분으로 반죽이 잘 안 되었다. 왕겨와 비슷해서 끓여 먹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손판암 할아버지의 기억에 의하면 1959년 당시 감천동에서 생활하던 태극도 교인 수는 2만 명이 넘었다. 1955년까지 태극도 종단은 부산 시내 보수동 산비탈에 있었다. 그런데 부산역 주변에서 대화재 사건이 발생하면서 화재에 약한 판잣집들을 대상으로 도시 계획이 입안되었다. 부산시에서는 태극도 교도들에게 감천동 지역으로 집단 이주할 것을 권하였다.

부산시에서 처음 이주지로 추천했던 곳은 감천동이 아니라 영도였다. 그런데 영도 터를 본 태극 도주가 길지가 아니라고 생각해 반대했고, 이후 감천동으로 정착이 진행되었다. 1955년 7월 택지를 조성하여 그 해 10월 800가구 4,000여 명의 교인이 감천동 산기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면서 감천동이 태극도 마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세도 약해지고 교인들이 거의 대부분 떠나 이전의 성세는 사라졌다. 현재 감천동에 남아 있는 태극도 신도는 1,0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조의 제사가 있는 날에는 전국의 교인이 이곳 감천동을 찾아와 참배를 한다. 감천동은 도로가 넓지 않은 탓에, 태극도 제사가 있는 날에는 수많은 버스 행렬로 도로 교통이 마비되기도 한다.

부산은 피난 도시로 사람들이 넘쳐나던 탓에 모두가 궁핍했지만 특히 감천동에 살던 주민들의 형편은 더 열악하였다.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취직이 어려웠다. 고물 장수나 넝마주이,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대다수였다. 거기다 생활 범죄도 많아 사람들이 기피하던 동네였다. 그런데 이 소외된 지역에 1962년 부산 화력 발전소가 들어오면서 변화가 생겼다.

화력 발전소를 건립하려면 먼저 땅을 매립해야만 한다. 화력 발전소가 들어설 자리에 있던 돌산을 발파해야 했는데, 부수어 뜨린 돌을 부산항까지 운반하는 노역을 마을 사람들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 힘들고 고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마을 모습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59년 거대한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휩쓸었다. 부산 지역도 피해가 많았는데, 전국에서 구호목이 들어와 그 나무들을 마을 여기저기 쌓아 놓고 관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손판암 할아버지는 동사무소에서 일을 하던 호적 계장과 친분이 있던 탓에 나무 관리를 맡을 수 있었다. 또 그때 전국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이 발족하면서 문맹 퇴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던 탓에 손판암 할아버지는 부두 일과 구호목 관리를 같이하면서 재건국민운동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 영장이 나와 3월에 입대하였다. 입대하기 전까지는 아이가 없었는데, 그가 군대에서 군복무를 하는 사이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아내는 이웃이 쓸모가 없다며 밭에서 거두지 않은 배추나 무를 주워 국을 끓여 먹으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농번기에는 시부모가 있는 마을로 내려가 집안일을 도우면서 기거하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1965년 제대한 후 잠시 부모님이 있는 밀양으로 갔다가 일을 구하지 못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감천동 주민들은 생활이 무척 궁핍하였다. 6·25 전쟁의 영향도 있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돈을 벌 만한 특별한 기술이 없는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 부산 화력 발전소 건설을 기점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하면서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부산 시내 수많은 건설 현장마다 주민들이 인부로 나가 돈을 벌어 오게 된 것이다. 일을 하면서 벌어 온 돈으로 궁핍했던 생활도 조금씩 개선이 되었다.

제대 후 부산으로 내려온 손판암 할아버지는 이웃에 살던 도목수 밑에서 보조로 일을 도우며 건축과 관련한 전반적인 업무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시내 여러 곳에 건축 현장이 펼쳐졌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다니면서 현장 일을 처리하였다. 일종의 서기, 사무장과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이다. 눈썰미가 있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빨리 건축 도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일을 한 사람들도 도면 읽는 법이 서툴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경력은 얼마 안 됐지만 평면도나 상세도와 같은 도면을 볼 줄 알면서 손판암 할아버지는 현장에서 작업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목수 아래에서 3년 동안 건축 현장 일을 배우며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았다고 판단한 손판암 할아버지는 독립해서 주택과 공장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성실함과 책임감, 여기에 남다른 안목을 가진 탓에 그에게 건축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 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당시 부산에서 유명한 동서해운 양재운 사장의 집을 짓는 일도 맡게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건축 현장을 떠나지 않는 손판암 할아버지의 성실함을 신뢰하게 된 양재운 사장이 주변 지인과 친척들 가운데 건물 지을 일이 있으면 그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1968년부터 1970년 사이 건축업으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부산의 여러 유명 인사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국제신문사 편집국장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70년부터는 개인 사업자로 일을 했는데, 의뢰가 들어온 일 가운데서 골라서 할 만큼 사업이 잘 되었다.

1970년대를 넘어가면서 감천동 지역 판잣집들의 높은 화재 위험과 노후화 등의 문제가 제기되자 부산시에서 주택 보수 승인을 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판잣집들이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붕에 슬레이트가 얹히고, 건물 높이가 블록 12장 정도에 해당하는 어느 정도 통일된 집들로 주택 보수가 진행되었다. 거의 모든 세대에서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보다 조금 더 늦게 집을 짓는 경우에는 건물 높이가 블록 15장, 16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그 위에 다락방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한 방에서 부모와 같이 생활하던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독립된 개인 방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자녀들이 결혼 후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면서 빈 방은 세놓기도 하였다.

현재 2층 집들은 대개 이러한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건물 외부에 별도로 색을 칠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다채로운 색으로 건물 외부를 채색하고, 이것이 감천 마을만의 독특한 경관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직장과 결혼 등을 통해 비교적 낙후된 마을을 떠나게 되면서 감천동은 이전의 전성기를 지나 조금씩 쇠락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건축업으로 모은 돈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계획할 수 있던 손판암 할아버지의 삶에 변화를 준 것은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면서였다. 1991년부터 손판암 할아버지는 사하구 구의원에 당선돼 6년 동안 다양한 일을 하게 되었다. 손판암 할아버지는 특히 건축이나 도시 개발과 관련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건설 현장과 계획 부서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점을 중간에서 잘 풀어 주는 그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지금은 지방 자치 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월급 등이 나와 경제적으로 안정된 수입을 제공하지만 막 지방 자치 제도가 시행되던 그때는 구의원으로 당선돼도 활동비나 급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건설 현장을 방문한다거나 사람을 만날 때면 모두 개인 돈으로 대접을 하는 등, 구의원으로서 품위 유지와 선거 비용에 그 동안 모아 놓았던 돈을 많이 탕진하였다.
부산의 마추픽추를 꿈꾸는 감천 문화 마을
감천 2동에는 ‘감천동 문화마을운영협의회’라는 이름의 협의체가 있다. 이 단체는 2010년 2월에 결성되었는데, 지역의 주민 대표와 문화 예술계 전문인 및 해당 지방 자치 단체 공무원으로 구성되어 마을의 발전을 위한 여러 안건을 협의한다. 현재까지 과정에서는 ‘주민 참여형 마을 재생’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할 만하다.

회칙에는 협의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협의회는 감천 2동 천마산과 옥녀봉 사이의 산 비탈면에 계단식으로 형성된 마을의 역사성과 문화 예술적 가치 및 지역 특성을 살려 원 도심의 보존과 재생이라는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주민과 예술인 및 지역 사회 단체의 참여와 협의를 통해 생활 친화적인 도심의 문화 마을로 가꾸는 데 기여한다.’

보존과 재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과거의 모든 것을 없애거나 지워 버리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식의 재개발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2009년 감천 2동을 다녀간 아시아경관디자인학회 회장 사토 마사루 교수를 포함해 감천동을 찾는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관심과 시선은 감천동이 갖고 있는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확인해 준다.

감천 2동은 산기슭의 경사면을 수평으로 구획한 여러 층의 가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질서정연한 느낌을 주며, 아울러 비교적 근거리의 시점을 제공해 마을을 한눈에 조망하는 시각적 경험을 갖게 한다. 또한 감천 2동의 색채 역시 다른 산복 도로 마을과는 차이를 보인다. 크게는 밝은 색조들과 녹색 계열 및 분홍이나 청색 계열로 나뉘지만, 보라색이나 진한 벽돌색 등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색채의 조합을 볼 수 있다.

지나간 시절 오랫동안 버려지다시피 했던 감천동에 새로운 변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사하구 무지개 공단 끝자락에 위치한 예술 문화 단체 ‘아트팩토리인다대포’가 문화체육관광부의 마을 미술 프로젝트 공모에 당선되어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라는 이름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설치 미술을 전공하는 작가들이 마을의 빈 터나 벽면에 미술 작품을 만들고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작품 10점이 마을 곳곳에 만들어졌다.

사업 초기 현장을 지나던 몇몇 주민은 “생필품을 주는 것이 맞지 귀중한 세금으로 무슨 낭비를 하는가”라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트팩토리 기획자들과 참여 작가들은 문화체육관광부의 마을 미술 프로젝트 공모에 응모한 것이고 프로젝트 실행의 대상지로 감천 2동을 선택했던 것으로, 주민들이 우선적으로 요청하는 도로나 상수도, 하수도 등 환경 개선 사업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의 ‘미로미로(美路迷路) 프로젝트’는 앞선 프로젝트와 달리 마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어서 주민들과의 접촉이나 협의가 보다 긴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2010년 2차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문화 마을 만들기’에 대한 생각이나 ‘문화 마을 운영협의회’와 같은 협의체 구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업이 일회성으로 끊기지 않고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면서 활동에 참여한 작가들이나 주민들 모두 ‘문화 마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또한 해당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긴밀한 협조가 문화 마을 만들기 추진에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문화 마을로의 변모와 문제점
이렇듯 감천동은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지금과 같은 ‘감천 문화 마을’로 변화하였다. 과거에는 태극도 교인들의 집단 이주지였다면 지금은 그와 다르게 ‘문화 마을’이라는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감천동의 독특하고 이국적인 경관이 사진작가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면서 관광지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과거와 같은 도시 재개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면서 도시를 어떻게 재생·복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씨름하게 되었다.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 작품[조형물]이 설치되고, 또 마을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지면서 마을의 예술적 가치도 커졌다. 외부 사람들이 찾아와 과거 감천동 주민들의 지나 온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러 복합 문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다양한 변화가 생기면서 이전 감천동이 가지고 있던 낙후된 지역으로서의 부정적인 인상은 희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 마을로의 변화가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었을까? 손판암 할아버지가 보기에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을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길 가에 자리한 주택들은 여러 모로 개선되고, 다양한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작은 가게나 카페 등의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작지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길 가에서 뒤로 들어간 공간들은 이전과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또한 마을을 찾아오는 외부인의 사진 촬영 등으로 주민들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노출되는 불쾌한 경험을 감당해야만 한다. 여기에 관광객이 버리고 간 음식물 쓰레기나 생활 쓰레기 등의 문제들이 겹쳐지면서 감천동 주민들 간에도 분열과 갈등이 생겨났다. 이렇듯 다양하고 복합한 문제들을 협의체에서 얼마나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또 해결점을 찾아가는지가 앞으로 감천동 문화 마을의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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