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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지 열하...청더(承德)
  • 온바오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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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함소리와 말 울음 소리가 날카롭다. 간밤 호우로 황토고원에서 발원한 강물이 거칠게 불어나 길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촉박한 일정, 베이징으로부터 닷새 만에 열하에 당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일행은 발만 구르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 기왕 기일 안에 대지 못해 죽을 목숨이라면 차라리 강물에 빠진다고 한 들 어떠랴. 장님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심정으로 “하룻밤에 아홉 번 강물을 건넌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중에서)
2백 여년 전 연암 박지원 선생이 압록강을 건너 육로로 찾아갔던 열하(지금의 청더:承德)를 뱃길을 거쳐 따라 나선다. 한국의 유명한 고전 ‘열하일기’는 1780년 연암 선생이 8촌형 박명원을 따라 조선의 사신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칠순연에 참가하기 위해 열하까지 갔던 여정과 감회를 담은 기행문.

연암 선생 일행은 두 달여 넘는 기간 천신만고 끝에 연경(베이징)에 도착했으나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고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쩔 수 없이 열하까지 또 다시 2백50km에 달하는 길을 재촉해야 했던 연암 선생 일행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베이징에서 청더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 소 포탈라궁이라 불리는 보타종승지묘
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지 청더 피서산장
▲ 한적한 여름궁전, 피서산장
청더는 베이징(北京)에서 동북쪽으로 두세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다. 청(淸)나라 황제들이 무더운 베이징의 여름을 피해 찾던 휴양지로 원래 이름은 열하(熱河),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뜻이다.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 내내 이곳에 머물면서 국사를 돌봤기 때문에 청더는 사실상 청나라의 “여름 수도” 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황제가 체류하던 저택인 “피서산장(避暑山莊)” 이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베이징의 더위를 피해 4월에서 9월까지 청더에 있는 피서산장에 머물렀다.청더는 한 여름에도 섭씨 28도를 넘지 않는다고 하니 피서지로는 제격.

그러나 청나라 황제들은 단순한 피서목적보다는 몽고족을 비롯한 주변 소수민족들을 달래고 통치하기 위해 이곳에서 6개월이나 지냈다고 한다. 피서산장 정문인 여정문에 한자뿐 아니라 몽골어 위구르어 만주어 등과 함께 쓰여 있는 것은 청왕조의 민족 융화정책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피서산자의 여의호, 배를 타보는 것도 좋다
피서산장은 1703년 강희제 때 만들기 시작해 87년이나 지난 1790년 건륭제 때 완성됐다. 베이징 이화원의 2배 크기다. 피서산장의 내부는 궁정구, 호수구, 평야구, 산지구로 나뉜다. 사실 피서산장은 평야와 산지가 넓지 궁전구의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건축물도 자금성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기 보다는 꾸밈없이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이다. 궁정구를 벗어나면 호수구가 펼쳐진다. 호수가 많은 강남지역의 풍광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한 시간여 산책 삼아 걸어서 돌아볼 수도 있지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호수를 가로질러 뱃사공이 내려주는 곳에 열하천이 있다. 청더의 옛 지명으로 겨울에도 강이 얼지 않는다는 뜻의 열하가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 열하천은 옛날 뜨거운 물이 솟는 일종의 온천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물이 고여있는 조금 큰 웅덩이에 불과하다.
민족융합을 위해 애쓴 청나라... 외팔묘
피서산장을 나서면 동쪽에서 북쪽으로 8개의 사찰들이 마치 호위병처럼 둘러서 있다. 황제의 궁전밖에 있는 8개의 묘라는 뜻의 외팔묘라고 불리는 이 절들은 강희제가 서부지역을 정벌한 후 그들의 종교와 예술을 수용해 지은 것이다. 원래는 12개였으나 현재 보령사(普寧寺)와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등 8개만 남아있다. 이들 사찰은 수많은 소수민족을 다스려야 했던 청나라 황제의 고민이 배어있는 곳이다. 외팔묘에는 다양한 민족의 건축 형태가 혼재되어 있고 비석 하나에도 한자, 만주어, 몽골어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연우루 (烟雨樓) : 저장 성(浙江省) 자싱(嘉兴)에 있는 연우루를 그대로 본떠 지은 건물. 건륭제는 연우루 마니아로도 유명한데, 재위 기간에 6번에 걸쳐 자싱을 방문했다고 한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눈앞에 아른거리는 연우루의 풍경을 자신의 별장에 재현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황실의 화공 13명을 자싱으로 급파, 연우루의 벽돌 하나하나까지 모두 그리게 했다.

이런 치밀한 사전 작업 때문이었을까? 연우루는 피서산장의 모조품 건물을 통틀어 최고의 걸작으로 극찬받고 있다. 특히 비오는 날 2층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가히 일품. 건륭제는 비만 오면 연우루에 올라 차를 마시며 경치를 감상했다고 한다.
※ 열하일기 세부 정보 : http://www.onbao.com/portal/search_list.php?searchName=%EC%97%B4%ED%95%98%EC%9D%BC%EA%B8%B0&settin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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