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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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NK는 지난해 11월부터 대북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북한의 인권 실현과 민주화를 위해 2004년에 창간된 데일리NK는 지난 10년간 북한을 제대로 알리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계도 분명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고 나아가 체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직접 대북방송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대북방송 시작 1년을 맞는 시점에, 우리는 라디오 등의 미디어가 통일에 기여한 독일 사례에 주목했다. 데일리NK는 지난 10월 말 독일을 방문해 동서독 통일에 일조한 언론인, 단체, 기관 등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들어봤다. 6회에 걸쳐 기획기사를 게재한다.




[통독 前 미디어 역할로 본 대북방송①]


“獨통일 일등공신 ‘미디어’…대북방송, 남북 통일에 일조”



[데일리 엔케이 ㅣ 김가영 기자] 독일 통일 있어서 라디오와 TV 등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동독이 1970년대 초반 서독 TV 시청을 허용한 이후부터 동독 주민들이 서독 언론을 통해 외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서독 분단 직후 동독은 주민들이 서독 언론을 접하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다. 때문에 서독은 동독의 방해 전파에도 대(對)동독 단파 라디오와 확성기, 그리고 삐라 등을 통해 자유세계의 정보를 동독으로 들여보냈다.



분단 직후 일당 독재 체제 하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야했던 당시 동독 주민들이 당국의 전파방해와 처벌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미디어를 몰래 접하며, 자유를 갈망했다는 점은 지금의 북한 주민들의 처지와 닮았다. 이때부터 동독 주민들의 의식 변화는 물론 서독으로의 여행 자유화 요구 나아가 반(反)체제 시위가 일어나, 동서독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 동독 주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평가되는 서독 라디오 방송 리아스(RIAS)의 1973년 당시 방송 제작 모습. / 사진제공=리아스 측




◆정직했던 서독 공영방송, 동독 주민 계몽에 큰 역할=북한으로의 TV 방송 송출이 불가능한 현재와 같게, 독일에서도 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서독 라디오 방송이 동독 주민들에게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구(舊)소련을 중심으로 동구권의 프로파간다 방송이 시작되자,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리아스(RIAS)라는 라디오 방송사를 설립한 게 대(對) 동독 라디오 방송의 시초다.



이후 리아스는 동서독 분단이 확실시되자 도이칠란드풍크(Deutschlandfunk)와 도이체벨레(Deutschewelle) 등과 함께 서독의 공영방송으로서 주요 매체로 방송을 하게 된다. 당시 동독의 국영방송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하 사통당, SED)에 유리하도록 포장해 보도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동독 방송만으로는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실과 동독체제의 모순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반면 서독 방송은 서독뿐만 아니라 동독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까지 가감 없이 보도하는 것은 물론, 드라마나 풍자 프로그램을 통해 서독 주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자국 내 방송이 아닌 서독 방송에 높은 신뢰를 보였다는 게 당시 미디어 종사자들의 증언이다.















▲ 리아스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Das klingende Sonntagsrätsel(미스터리한 일요일의 소리)”에 동독 주민들이 보내온 엽서. 리아스는 동독 정권의 검열을 피해 동독 청취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수신 주소를 자주 바꿔가면서 엽서를 받았고, 동독 주민들도 수백 통의 엽서를 보내며 리아스 방송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 사진제공= 리아스 측



한스 위르겐 피커트(Hans Jürgen Pickert) 前 리아스(RIAS) 편집주간 및 현 도이체벨레(Deutschewelle) 기자는 “본래 리아스를 포함한 서독의 방송사들은 대(對) 동독 방송을 위해 설립된 게 아니라 주 청취자인 서독 주민들을 위한 방송을 만드는 곳이었다”면서 “다만 제작진은 이 전파가 반드시 동독에 닿을 것이라 암묵적으로 믿고 있었고, 동독 주민들 역시 서독 주민들이 즐겨듣는 방송이라고 믿고 더욱 관심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독일연방공보처 측 관계자도 “서독 방송사들이 프로그램 제작 시 동독 주민들의 의식 변화나 체제 붕괴를 의도한 건 아니었다”면서 “단지 서독의 일상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을 뿐이지만 오히려 이렇게 자연스러운 방송이 동독 주민들을 계몽시키고 체제 전환까지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서독의 제1공영방송(Das Erste)과 제2공영방송(ZDF)이 라디오 방송과 마찬가지로 뉴스를 비롯해 각종 오락·교양 프로그램 등을 TV로 동독에 송출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독에서 TV로 서독 방송을 접하는 일도 더욱 대중화됐다.



동독 출신의 롤란트 얀(Roland Jahn) 現 슈타지 문서보관소장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독에서 서독 방송을 보는 건 큰 처벌을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낮에는 동독에 살지만, 저녁에는 서독에 산다’고 말할 정도로 동독에선 대부분 서독 방송을 즐겨봤다”면서 “1970년대 말이 되면 거의 ‘암묵적 관용’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동독 정부가 서독 방송을 보는 유행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편 사민당 빌리브란트의 신(新) 동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73년 이전까지는 동서독 간 전단지(삐라) 살포는 물론,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한 확성기 방송도 진행됐다. 특히 삐라 살포의 경우 동서독 모두 이를 전담할 수 있는 부서를 따로 마련해둘 정도로 전략적으로 이뤄졌다.



로버트 레베게른(Robert Lebegern)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 국경 박물관장은 “동서독 모두 로케트나 풍선, 바람을 이용한 장치들을 활용해 A4 반장 정도의 삐라를 한 번에 약 500장에서 1000여 장 정도 동독 지역으로 살포했다”면서 “동독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시켜 삐라를 수집한 뒤 이를 다시 슈타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레베게른 관장은 또 “확성기 방송의 경우 동독에서 서독을 향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서독에서도 청년들이 주축이 돼 베를린 장벽 근처에서 조직적인 방송을 진행한 바 있다”면서 “청년들이 베를린 장벽 부근에 임시로 세운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만들어 큰 버스에 스피커를 장착한 채 장벽 근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방송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동독 평화시위 모습.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동독 출신 전문가들은 취재팀에게 "서독 방송이 평화시위를 촉발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증언했다. / 사진제공=Bundesarchive



◆“서독 방송 없었다면 평화시위 생각도 못했을 것”=동서독 분단 시기에 서독 방송을 접했다는 동독 출신 전문가들은 서독 방송을 ‘세상을 보는 창’ ‘삶을 지탱해준 힘’ ‘정신적 다리’ 등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서독 방송이 사실 그대로의 정보를 줬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세계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것. 그리고 이는 곧 동독 체제에 대한 반감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고 동독 출신 전문가들은 말했다.



동베를린 출신의 안나 카민스키(Anna Kaminsky) SED 독재청산재단 사무총장은 “제대로 된 정보를 갈망했던 동독 주민들은 라디오나 TV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이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해줬다”면서 “이렇게 가공되지 않은 정보를 공유하면서 동독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고, 이는 민주화 시위와 국경 개방이라는 ‘적극적인 결과’까지 도출해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카민스키 총장은 “억압된 곳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중립적인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신들은 혼자 남겨지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게 특히 중요하다”면서 “대북방송을 제작할 때도 정보 제공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립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드레스덴에서 도이칠란드풍크(Deutschlandfunk)와 도이체벨레를 즐겨 들었다는 헤르베르트 바그너(Herbert Wagner) 前 드레스덴 시장(現 드레스덴 슈타지 박물관장)은 “서독 방송은 동독에서의 삶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줬고, 이는 후에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힘으로 이어졌다”면서 “만약 서독 방송이 없었다면 나는 서독 사람들이 우리를 잊은 채 자신들만이 자유를 즐겼다고 원망했을 것이다. 내게 서독 방송은 세상을 열어주는 창이자 정신적인 다리가 돼 줬다”고 회상했다.



위르겐 리히케(Jürgen Reiche)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관장도 “점처럼 분포돼 있던 동독 내 반(反) 체제 인사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다가, 서독 방송이 보도하는 동독 상황을 파악하고서야 각 지역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면서 “서독 방송을 보고 10만 명의 시민들이 한 데 모여 평화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처럼 대북방송도 북한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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