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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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피살당한 사건은 국내를 비롯해 전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홍콩 시사주간지 아시아주간(亚洲周刊)은 자체 취재와 북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남이 해외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아들 김한솔이 사실은 한류 팬이라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전했다. 온바오닷컴은 '당신은 모르는 김정남'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의 원문을 번역해 그대로 전한다. *편집자 주.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된 후 앞서 두 차례 사람을 파견해 해외에 이주한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부 여론은 김정은은 시종일관 중국의 후원에 의지한 반대파가 김정남을 방패로 군사정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김정은이 척결한 고모부이자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은 '친중파'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졌다. 장성택이라는 후원자를 잃은 후 김정남은 베이징의 비호에 의지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김정남이 중국이라는 '요람' 안에 있다보니 북중관계는 잡음이 끊이지 않아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김정남이 중국 경내에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김정은 정부 전복 등의 대형사건이 터지게 되면 중국의 지지하에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있는 모든 공산국가 중 아마도 북한만이 유일하게 자식이 부친의 권력을 계승하는 봉건왕조 제도를 유지했다. 김일성 직계 친속에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북한 정권을 장악하면 북한 건설의 근본, 즉 김일성이 만든 '주체사상'과 서로 충돌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김정일의 후계자 역시 오로지 그의 세 아들 중에서 나타나야 했다. 장남 김정남의 모친은 성혜림이었고 차남 김정철, 셋째 김정은의 모친은 고영희였다.

북한은 유교 전통사상 영향을 깊숙히 받아들인 국가로 줄곧 장자 계승제도를 시행했다. 한국과 일본이 초기에 전한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이 부친의 자리를 계승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가장 유력했다. 2001년 일부 한국 언론이 이같은 사실을 전했다.

2004년 김정일이 62세 생일을 보낼 때가 되서야 일부 한국 언론이 김정일의 후계자는 아마도 전해지는 바의 장남이 아니라 셋째 아들 김정은이 될 것이라 전하기 시작했다.

김정남은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부친의 총애를 받았다. 김정일의 공적 업무는 바빴지만 종종 시간을 빼서 김정남을 데리고 지적 유희를 즐겼고 그에게 사격과 운전을 가르쳤다. 김정일의 매부인 장성남은 앞서 김정남의 후견인을 담당했다. 김정남은 앞서 러시아와 유럽에서 유학을 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 1999년 봄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지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김정남은 이미 북한 노동당의 중앙호위총국에서 직무를 맡은 적이 있고 '김일성의 충성 근위병'으로 불리는 호위총국 국장이자 군대 원수인 이을설 원사의 직접 지도를 받았다. 김정남은 또한 '컴퓨터광'이기도 해서 2001년 북한사이버위원회 지도자를 맡아 북한정보기술정책 제정을 책임졌다.

김정남이 가장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북한이 경제를 재건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김정남이 어린 시절 스위스 제네바에서 9년간 유학하며 자유사회를 이해한 후에 굳건한 신념이 생겼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김정남이 장자이지만 후계자의 옥좌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2001년 일본 불법입국 사건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김정남이 대중의 앞에 극히 적게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매체 역시 김정남과 관련된 어떠한 보도도 없었다. 때문에 일본 측에서는 입국한 남자가 김정일의 장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2001년 5월 1일, 일본 도쿄 나리타국제공항에서 해관은 위조여권을 소지한 한 남성과 여성 1명, 4세 아들을 억류했다. 이 남자는 어쩔 수 없이 통역을 거쳐 일본 해관 관료에게 자신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며 여성은 아내인 신정희, 4세 남자아이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일본에 온 것은 아들을 데리고 도쿄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일본이 뜻밖에도 네 사람의 사실을 확인 조사하지 않고 즉각 송환조치한 것이다. 이같은 사건은 김정일의 분노를 샀고 김정남은 이같은 영향을 받아 다시는 총애를 받지 않았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난 90년대 중반 김정남이 일순간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일본에 잠입하려다 추방당한 후 후계자의 꿈은 사라졌다고 여긴다. 여기서부터 김정남은 해외에서 생활하며 평양 권력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하지만 아주주간이 북한 고위층으로부터 파악한데 따르면 김씨 가족을 잘 알고 있는 관계자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김정남이 추방당한 원인이 부친에게 중국의 개혁개방 모델에 근거한 경제개혁을 진행해야 한다는 간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정남은 지난 90년대 후반 해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북한 전역을 시찰했고 북한경제의 고질병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이해했고 부친에게 개혁개방을 강력히 건의했다. 설에 따르면 김정일은 이와 비슷한 의견을 들은 후에야 엄중한 경계를 시작했다.

이외에도 김정일의 마음은 이미 김정남의 모친인 성혜림에게 있지 않았고 오로지 고영희에게 빠져 있었다. 김정일은 고영희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고 이들을 극도로 애지중지했다. 김정남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 역시 하루하루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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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으로 하여금 더욱 부담을 느끼게 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김정남은 북한에서 점차 일어나기 시작한 자본주의단체 집회에 나타나 이를 지지하고 여기서 중국식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같은 언행은 부친의 노여움을 샀다.

북한 대한국정보기구인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에 속했던 장진성(张真晟) 씨는 "1996년 8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단체 집회에 건장한 체구의 젊은 남성이 나타났다"며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 있게 '부친이 내게 국가경제를 약간은 재정비해보라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경제를 재건하려면 중국식 개혁개방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여긴다. 우리가 먼저 기업을 설립한 후에 다시 자회사를 설립해나가는 식으로 발전시키면 자본주의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 사람이 바로 김정남이었고 당시 엄청난 흥분감을 느꼈다"며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개인적으로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아는 바에 의하면 김정남의 행동은 매우 신속했다. 집회가 끝난지 일주일도 안 돼 평양 도심에 위치한 대동강구역에 있는 한 아파트에 '광명성총공사'라 적힌 간판을 세웠고 회사 건물 착공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장남의 일련의 행동에서 '위험한 사상'이 싹틀 수 있다고 예감해 그를 경제부문에서 전출하고 그에게 정치를 더 배울 것을 요구했다. 이어 아들의 심복을 체포하고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을 제한했다. 이후 김정남은 실질적으로 비밀경찰인 국가안전보위부의 부부장을 맡게 됐다. 김정남이 이같은 결정에 얼마나 실망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장진성 씨는 "김정남이 이 일로 부친이 우둔하고 완고해 융통성이 없음을 더더욱 느꼈을 것이고 이는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고 여겼다. 이 때 김정남은 해외로 이민할 것을 결심했다.

한국 관련 부문에 따르면 김정남은 베이징, 마카오에 아내 셋과 자녀 셋이 있다. 베이징 북쪽 근교에 있는 빌라에는 전부인 신정희와 아들 김금솔이 있으며 마카오에는 둘째 부인 이혜경과 아들 김한솔, 김송희가 있다. 이외에 김정남은 마카오에 또 하나의 집이 있는데 여기에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출신의 서영라가 살고 있다.

마카오 세자르로드 8~10번지는 안가 빌라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의 둘째 부인인 리 씨와 아들 둘이 이 곳 빌라의 12층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는 이전에 이 빌라는 찾은 적이 있다. 빌라 안에 들어가니 6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이전에 일정 기간 12층에 사는 남매를 종종 본 적이 있지만 최근에는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기자가 김정남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곧바로 즉석에서 "이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들 남매는 마카오 타이파에 위치한 국제학교에 다녔는데 일본 기자가 학교에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자 곧바로 학교에 다시 오진 않았다.

한국 정보부문이 파악한 현황에 따르면 마카오 최남단에 위치한 포우사다 데 콜로아네(Pousada de Coloane, 중국명 竹湾豪园) 361번지 역시 리 씨와 아들 두명의 거처인데 현지 주민에 따르면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국정부문 관료는 "김정남과 둘째 부인은 이미 별거한 상태"라고 밝혔다.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마카오 옛 거리 관음당(观音堂) 부근의 분향각(芬香阁) 12층이 김정남과 그의 보디가드 및 친구들이 종종 술을 마시는 곳이다. 하지만 분향각의 경비는 "뚱뚱한 김정남은 본적이 없지만 분명 외국 기자가 몇차례 이 곳에 와서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은 있다"고 밝혔다.

한 외신은 이전에 알티라 호텔(新濠锋酒店) 식당과 카지노 1층 홀에서 김정남을 몰래 촬영한 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호텔 식당 종업원은 "김정남은 이전에 분명 이 곳을 종종 찾았지만 2010년 3~4월 이후로는 온 적이 없다"고 밝혔다. 같은해 3월 26일은 바로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을 때이다. 설에 따르면 김정남은 자신의 안전을 우려해 마카오를 떠났다.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에서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한솔의 신변안전 역시 매체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일부 소식에 따르면 김한솔은 프랑스 파리에서 학업을 마친 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김한솔은 현재 22세로 김정남과 둘째 부인의 아들이다. 2011년 10월, 그는 순식간에 한국과 일본의 뉴스메이커가 됐다. 같은해 9월 30일, 누군가가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YouTube)에 김한솔로 보이는 남성이 북한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논하는 것을 제보했고 한국, 일본 언론이 이 사실을 안 후 곧바로 이를 무섭게 추적했다. 다음날 김한솔의 사진, 글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틀 뒤에는 유튜브에서의 그의 계정 역시 '정보는 오직 친구에게만 공개'로 설정돼 비공개로 전환됐다.

김한솔은 보스니아국제학교(세계연합대학 모스타르 분교)에 등록된 계정을 썼다. 앞서 보스니아 현지 언론은 "막 입학한 김한솔의 부친은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라고 전한 바 있다. 학교 대변인 역시 "김한솔의 국적은 북한이며 그의 영어는 매우 유창하다"고 말했다.

김한솔은 비자수속을 마친 후 보스니아에서 수업을 듣고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숙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아는 바에 의하면 이 국제학교의 1년 학비는 약 2만5천달러(2천868만원)로 북한 사람의 평균 수입의 100배를 넘는다.

김한솔은 SNS 홈페이지에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취미는 촬영, 관광, 와인, SPA 등이며 좋아하는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리멤버 타이탄(Remember the Titans)' 등이었다. '민주주의냐? 아니면 공산주의냐?'는 질문에서 그는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또한 "나는 북한사람이며 현재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다. 북한에도 인터넷이 있다. 나는 북한 인터넷에 위성통신시스템을 설치했다. 조신민주주의공화국은 영원히 왕성하게 번영할 것이다", "나는 북한의 중산층 생활 수준에 속해 있다. 하지만 설령 맛있는 음식이 있고 먹고 싶다 하더라도 함부로 먹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음 속으로 항상 북한 인민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사람이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한솔의 대화기록을 보면 '김철'이라는 친구와 자주 채팅을 했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김정남은 싱가포르, 홍콩 등 동남아 호텔을 오갈때 종종 썼던 이름이 '김철'이라는 가명이었다.
김한솔, 한국 아이돌에 푹 빠졌다
김한솔은 아마도 가장 먼저 외부세계의 현란하고 다채로움을 느낀 북한 소년일 것이다.

김한솔은 마카오 국제학교를 다닐 때 한국 아이돌 빅뱅(BigBang)을 모방해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몸에 꼭 맞는 수트를 즐겨 입었으며 한쪽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다녀 보기에 패션이 매우 멋졌다. 그는 종종 해외에 멀리 나가 번화한 외부세계를 체험했다.

14세 때는 친구와 함께 마카오에서 톱가수 비(Rain)에 미쳤다. 그는 스킨헤드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채로 홍콩, 마카오에서 중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 친구 5명과 비를 쫓아다녔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당시 콘서트 티켓이 29만원이었다"며 "티켓은 모두 김정남이 구입해준 후 친구들을 초청했다"고 밝혔다.

마카오 교포는 "김한솔이 짜장면, 탕수육, 돼지고기볶음, 명태국, 냉면 등을 좋아했고 한국음식점에 종종 나타났다"며 "강남홍, 서울관, 한성회관이 그가 자주 나타나는 장소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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