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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위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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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현지어
  • 玉田县
  • yù tián xiàn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허베이 탕산 위톈현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841.9km
◆ 1780년 7월 28일자

◆ 연암이 ‘관내정사’에서 회화의 정신론·표현론·도구론·책임론 등 꿈틀거리는 담론을 넉넉히 펼쳤지만, 7월28일자 일기에 연암 문학의 영혼 격인 단편 소설 ‘호질전’이 부록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호질전’은 한국문학의 대어다. 연암은 그날, 옛날 무종국(無終國), 곧 주나라 문왕의 아들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였던 옥전에서 묵었다. 정말 나그네로서 우연한 숙박이었다. 여느 날처럼 덤벙대는 푼수, 정진사와 함께 어슬렁어슬렁 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디서 생황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따라가 보니 네 벽이 서화로 가득 찬 곳에서 주인이 부처 앞에 분향하고 있었다. 연암은 그이와 수인사했는데, 소주 사람으로 이름은 심유붕(沈有朋), 나이는 마흔여섯이었다.

◆ 그 집 대청 바람벽에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연암은 흰 종이에 세필로 씌어진 장문의 글을 보고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고 탄복하며, 그 출처를 물었다. 필자를 알지 못하고, 다만 옥전에서 멀지 않은 계주(텺州) 장날에 산 것이라 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종이와 붓을 준비해 쫓아갔다. 고깃덩이를 만난 고양이처럼 연암은 앞부분을, 정진사는 뒤쪽을 맡아 정신없이 베껴 썼다. 심씨는 점잖은 조선의 두 선비가 허겁지겁 베끼는 꼴을 보고 의아했다. 연암은 이렇게 변명했다. ‘조선에 알려서 조선의 독자가 포복절도하게, 아니 먹던 밥을 벌 날 듯 튀게 하려고, 아니 갓 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우두둑 끊어지게 하려고.’ 연암다운 호기와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 연암은 애써 ‘호질전’ 창작 책임을 비켜갔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훑어본즉 정진사의 몫에 오자와 탈자가 많아 문리가 통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노라고 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저작에만 몰두했던 유학 대가 북곽선생과 정절부인인 과부 동리자 사이의 온갖 위선과 문란한 생각을 질펀하게 그린 뒤, 북곽이 사람 아닌 호랑이의 혹독한 질타를 받는 내용의 풍자 단편 ‘호질전’은 연암이 귀국한 뒤, 1783년에야 완성됐다. 그의 핑계대로 그날 밤 정진사가 한눈을 팔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호질전’은 없었을 것이다. 또 재구성, 재창작의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손질이 없었더라면 ‘호질전’이 누리는 오늘의 평가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정진사가 한눈을 팔지 않았더라면 ‘호질전’을 놓칠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호질전’을 박지원의 창작으로 보는 데 굳이 인색할 까닭이 없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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