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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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 서관(연암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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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京畿道胡同
  • jīng jī dào hú tóng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베이징 베이징 시청구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955.6km
◆ 1780년 8월 4일

◆ 연암 일행이 머물렀던 사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연암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옥하관은 옥하 언덕에, 회동관은 건어호동에 있다 했으나, 서관은 매우 애매했다. 별수 없이 한·중 학자들의 공동 연구결과를 참고했다. 옥하는 자금성으로부터 동류하는 인공 하류로서 지금 장안동가(長安東街)와 남성장(南城墻)이 마주치는 옥하중교(中橋)의 서쪽을 가리킨다. 지금은 쩡이루(正義路)와 둥자오민샹(東交民巷)이 만나는 최고인민법원 일대가 바로 옥하관 옛터다. 회동관은 옥하관의 별관으로, 현재 북경에서 가장 번화한 왕푸징(王府井) 간위후퉁(甘雨胡同·乾魚胡同과 동음이라서 통용함)에 위치했다. 그러나 1779년에 실화되자 임시 사관인 서관에 유숙했다. 지금의 시단루(西單路) 서북쪽 민족문화궁이 있는 그 북쪽의 징지다오후퉁(京畿道胡同)이 바로 그곳이다.

◆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관(使館)도 수난의 역사를 겪었다. 명 만력2년(1574), 하곡 허봉(荷谷許?)이 명나라에 출사했을 때 머물렀던 옥하관이 강희 연간에 러시아 사람에게 강점당하고 그 뒤 별관으로, 서관으로 전전했던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부터 광서 20년(1894)까지 청나라에 파견한 조선 사절만도 661차였다는데.

◆ 그럼에도 조선 사절의 진용과 의전은 대단했다. 사절마다 200, 300명이 50, 60일 동안 3000리를 주파했다. 그중 사절에게 관급하는 식단이나 물목이 ‘열하일기’ 8월2일자 일기에 밝혀 있다. 그것들의 후박이 직급별로 뚜렷했다. 풍부하고 다양한 식단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이렇게 실학적인 관아의 규정이 북학의 나라 청국 북경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 북경은 연암 인생 43년 사상의 중심지요, 그가 중년 들어 추구했던 실학의 쇼윈도다. 그는 북경에서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을 3000년간 한 문 한 길로 통일시킨 것이 요·순으로부터 시작한 ‘유정유일(惟精唯一)’이라는 중심적·통일적인 중화주의란 사실이고, 또 하나는 부와 선진을 상징하는 27만 칸의 유리창(琉璃廠) 다락 난간에서 ‘천하의 지기 한 사람 있으면 한이 없겠노라’는 절대 고독론에 몸서리를 친 기억이다.

◆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사로잡혀 붕붕 떠다닌 지 닷새째, 그는 또 다른 충격으로 한동안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북경 거리를 구경 나갔다 술 몇 잔 걸치고 꼬꾸라져 잠든 8월4일, 정사(正使)의 마두(馬頭)인 시대로부터 내일 새벽이면 열하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청나라 예부의 급보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밤낮 나흘 동안 북경에서 열하까지 224km를 불가의 ‘404병(病)’ ‘81난(難)’과 같은 고행을 하는 심정으로 뛰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은 경축 사절의 인원 제한으로 수족과 다름없던 장복이를 북경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 사실 1780년 청나라 고종 고희 경축 사절의 여정은 출발부터 고행이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에 도강해 건륭의 생일이라는 사실 외에 경축식이 열리는 시기, 장소 등 정확한 의전 지시가 일절 없었다.

◆ 7월2일 통원보에서 장마에 갇힌 지 사흘째, 부사가 문짝과 수레로 뗏목을 만들어 건널 것을 제안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시 나흘 뒤, 결국 하인 30여 명이 맨몸으로 가마를 메고 세찬 물살을 간신히 건너는 모험을 벌였다. 북경에 입성하던 8월1일, 맨 처음 사절의 표자문을 청나라 예부에 제출한 뒤 나흘을 기다린 것도 정확한 의전 지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 8월4일 밤, 정사의 초조는 극에 달했는지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노라고 연암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 조울증은 연암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연암의 꿈결에도 별안간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무너지듯 요란스럽게 압박하더라는 것이다.

◆ 과연 8월9일 아침까지라는 도착 시기와 사람 74명에 말 55필로 사절의 규모를 제한하라는 요구사항을 통보받았다. 우리 사절은 100시간 내로 산 설고 물 선 500리 남짓 길, 그것도 큰물 큰바람이 개지 않은 북녘 땅을 어여차어여차 가야만 했다.

◆ 그해 5월25일 한양을 떠날 때부터 건륭의 고희연을 열하에서 주최하지 않을까 짐짓 예견했지만 그들은 얼른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당시 청나라를 가장 위협했던 양대 변강인 티베트와 몽골, 그중 티베트의 6세(世) 활불이던 얼더니(額爾德尼)의 건륭 경축 사절이 전용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수미복수(須彌福壽)의 사원을 신축해 건륭의 생일을 맞은 것으로 보아 경축 시기는 짐짓 예정된 것이었다. [참조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 사진 : 민족문화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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