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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梨花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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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741-0815
1234
    현지어
  • 이화장(梨花莊)
  • ihwajang(rihwajang)
    분류
  • 여행/오락 > 여행지
    주소
  • 서울 종로구 이화동 41276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3.9km
배꽃이 피던 동네대학로 뒤편에는 이화동이 있다. 이화동이라는 이름은옛날에 배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라는 데서비롯되었다. 시간이 흘러 배꽃의 흔적은 아련하다.이화동 한쪽에는 1700여 평의 이화장이 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기거하던 집으로 지금은 이 전 대통령의기념관을 겸한다. 이화장은 조선 중기 문신신광한(申光漢)의 집터였으며, 정문 앞에는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광복때 귀국한 이 전 대통령은 2년간 돈암정에 머물다마포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옮겨왔다. 1948년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돼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으니,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관한 대부분의 업무가이화장에서 이뤄진 셈이다.이 전 대통령은 196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이화장에서 한 달간 기거하다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다.그는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야 이화장으로돌아왔고 국립묘지에 안치됐다.전 대통령 부부의 생활상이 그대로현재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과 사적관,조각당과 생활관으로 이뤄져 있다. 대문을 지나면사적관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1988년 8월 15일 건국 45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동상이다.맞은편 사적관에는 지금도 이 전 대통령의 생애를연구하는 학자들이 오간다. 사적관 우측 오르막에는조각당이 있고 좌측 길 끝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과생활관(비개방)이 있다.기념관은 이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활했던건물인데 지금은 5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1전시실은 대통령의 집무실이고 현관을 활용한2전시실에는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3전시실은 이 전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침실이다. 부엌으로 쓰인4전시실을 지나 5전시실에 이르면 두 사람의 생활상을엿볼 수 있다. 대통령 부부가 손수 속옷을 기워 입고,종이 상자로 옷장을 만들었으며, 양산 하나를 30년 넘게사용했다니 좀체 믿기지 않는다. 프란체스카 여사의몽당연필과 서툰 한글 글씨 등도 눈길을 끈다.후세에게 전하는 검소한 생활의 교훈이다. 기념관아래쪽에는 1985년 지은 생활관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의양아들인 이인수 박사 부부의 거처로 프란체스카여사가 생활하다 1992년 운명한 장소기도 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의 침실로 쓰이던 제3전시실* 검소한 생활을 엿보게 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와 몽당연필 등의 유품*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는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세운 동상* 조각당 가는 산책길은 이승만 대통령이 즐겨 걸었다.* 우리나라 초대 내각을 구상하고 발표했던 조각당 내부 모습*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가 살던 이화장 본관(이승만대통령기념관) 전경*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를 기념한 현관의 전시실 전경*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집무실 전경공간개요 조선 시대에는 인평대군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거처였다. 우리나라 초대 내각을 구상하고 발표했던 조각당이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이화장에서 임종했다. 지금은 이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5개의 전시실과 이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부부의 생활관이 있다.이용시간 09:30 ~ 17:00유적지 지정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6호지정 내역 조선 중종 때 문신(文臣)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 석양루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 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 실업가 권영일(權寧一)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게 되었다.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이곳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7월 23일에 이화장으로 안치되었다가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소요시간90관리기관 서울시 문화재청관광팁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초석, 조각당 사적관에서 우측 길을 따라 산책로를 오르면 조각당에 이른다. 겉보기에는 초라한 단칸방일 뿐이지만 이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 최초의 내각을 구상하고 발표한 유서 깊은 장소다. 조각당 인근의 산책로는 이 전 대통령이 즐겨 걸었다고 한다. 없음 낙산 공공미술 감상과 공원 산책 이화장은 낙산 자락 아래다. 길을 따라 낙산 방면으로 오르면 낙산 인근의 공공미술도 만나고 낙산공원에도 오를 수 있다. 이화동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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