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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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 청계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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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광통교 청계천길
  • Gwangtonggyo Cheonggyecheon 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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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오락 > 역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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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구 서린동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6km
** 길이름 유래 : 주체적으로 국력을 키우고 싶었던 조선 태종은 청계천에 조선 최초로 큰 석조 다리를 놓고 국력이 광대하게 뻗어나가라는 뜻으로 광통교라 이름을 지었다.

** 스토리 :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나에게 한 남학생이 강의 끝에 따라 나오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작가의 작품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나요?”

“글쎄....... 아무래도 작가의 작품은 그 작가의 성격을 대변해준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말씀인데요. 이방원의 ‘하여가’를 보면 성격이 너무나 유순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느껴지는데 실은 야망으로 가득하고 끝끝내 지독한 복수를 하는 독종이었잖아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는 남학생의 얼굴을 한 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대학생의 질문이라고 보기에는 좀은 어린 질문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자 학생이 ‘하여가’를 읊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시조를 읊는 녀석의 모습이 신선해서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다음 강의가 없는데 자넨 시간이 어떤가?”

“저도 괜찮습니다.”

나는 학생을 데리고 교수휴게실로 들어갔다.

“차나 한 잔 하세. 자네 이름이.......”

“고영석입니다.”

“그래. 영석군은 고전문학 외에 무엇을 좋아하나?”

“뭐 음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고전문학은 좋아하기보다는 그냥 학문으로 하는 거고요.”

“그렇군. 나는 말일세. 고전문학이라는 학문을 하려면 작품의 역사적인 시대 배경까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왜 그 말을 하는 고 하니 ‘하여가’는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던진 이방원 자신의 마음일 뿐 순수한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해서야. 그 시조의 답가가 바로 정몽주의 ‘단심가’일세.”

그러자 고영석 학생은 곧바로 단심가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영석은 막힘없이 운율을 맞추어 시조를 읊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그거야. 이방원의 ‘하여가’는 부귀영화를 누리면 어떠냐고 묻는 것이고 정몽주의 ‘단심가’는 일편단심 나라와 임금만을 생각한다는 자신의 뜻을 서로 시조로 주고받은 걸세.”

나는 고영석이 내 말에 눈을 빛내며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일이 기분 좋았다. 그 덕에 나는 수다스러운 교수가 되어 역사적 배경 강의를 시작했다.

고려 말기, 정몽주와 이성계는 고려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개혁 방법에는 서로 상반된 입장이었다. 이성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체제 안에서는 절대로 개혁을 실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체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으며 권신들에 의한 제약이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 개혁이지요.”

그러나 정몽주는 이성계의 개혁 방법이 자신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좀은 놀랐다. 무예에 출중하고 활의 명수이며 군사를 지휘,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난 이성계는 무인답게 자기 식으로 개혁을 이루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신진사대부들을 조정의 중요한 자리에 앉혀 개혁을 한다면 충분히 개혁이 가능한 일입니다. 무력은 용납할 수 없는 반역입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1392년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왕조 수호 측에서는 그 기회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강경파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꺾으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급히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일 이후 방원은 집안에 연회를 벌이고 정몽주를 연석에 불러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하여가’ 라는 시조로 그의 마음을 물었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를 지어 답을 하고나오다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다. 귀가하던 정몽주를 방원이 자신의 휘하 조영규를 시켜 살해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순수한 시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 설명에 영석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중 고등학교 시절 과목 중에서 역사를 제일 싫어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자네가 이방원은 야망이 가득하고 끝까지 복수하는 독종이라 말했는데 그건 이방원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하! 그건 청계천에 놓인 다리들을 알아보는 중에 광통교가 ‘신덕왕후의 혼으로 놓인 다리’라는 제목을 검색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자네가 광통교와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게.”

고영석은 좀은 쑥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광통교 이야기는 이성계가 신덕왕후 강씨를 만나는 데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야 이해가 쉬울 테니까.”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답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떠서 버들잎 한 줌을 뜯어 물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지요. 여인은 ‘갈증이 심하여 달려오셨으니 냉수를 급히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하였습니다.’고 수줍게 대답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여인의 미색이 아주 빼어났지요.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는 이야깁니다. 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신덕왕후 강씨였습니다.”

고영석은 찬찬히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성계의 부인 한씨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 할 때 시집 와 남편을 고생하면서 받든 '조강지처'이다. 한씨와는 무려 6남 2녀나 낳으면서 잘 살아왔지만 이성계는 21살이나 연하인 강씨를 보자 한 눈에 반해 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대단한 세도가의 규수였던 것이다. 이성계가 끝까지 그녀를 총애한 까닭은 꼭 아름다워서만이 아니었다. 일단 젊기도 했지만 총명하고 집안이 권문세도가였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강씨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강씨 본인도 정책을 세워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할 만큼 똑똑했다. 한씨는 개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고 강씨가 조선개국 최초의 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비가 된 강씨는 태조의 전 부인인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제치고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이것이 250년이나 이어진 복수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뜻이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여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 이방원과 신의왕후의 아들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 부인 소생인 아들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끝내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지명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거야. 분명코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격분했다.

그 와중에 신덕왕후는 1396년 8월3일 위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차를 바치게 하더니 다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와의 소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신덕왕후의 능에 제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곤 하였다. 이방원은 죽은 강씨에 대한 아버지의 그런 지나친 사랑에도 화가 끓어올랐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방원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과 장남 방번을 모두 제거하고 사위도 살해하자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앉힌 강씨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이방원이었다.

이성계는 아들들의 권력 다툼에 가슴이 아팠지만 누구 편을 들 수도 없는 아버지의 입장이었다. 방원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형 방과를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했다. 그 왕이 정종이다. 그 후 정종은 즉위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강씨의 무덤인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한다. 태조가 승하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고영석은 중간 점검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나를 쳐다보며 잠시 이야기를 중단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재촉했다.

“이야기 계속하게. 이제 정릉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듯한데.......”

“예. 교수님. 태종은 ‘도성 안에는 능묘가 없으며 사신이 묵는 태평관과 너무 가까우니 성 밖으로 옮기라’고 하명을 합니다.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1409년에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하게 된 것입니다. 있던 자리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병풍석과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그 석물들을 궁궐 공터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태종의 명이 그러하니 이장을 하는 사람들도 빚쟁이 이삿짐 부리듯,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 대충 새 능을 만들 수밖에요. 이장한 후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 속에 묻혀 능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광통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다음해인 1410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유실되자 병풍석과 정자각 석물들을 광통교 보수 공사에 사용하게 허락하였습니다.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다녀서 신덕왕후의 기를 짓누르자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태종의 측근 누군가가 태종에게 권유했겠지요.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는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고 합니다. 교수님,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집니다.”

고영석은 입이 마른지 물 두 컵을 가져다 내게 한 잔을 권하고 본인도 벌컥벌컥 한 잔을 마셨다. 내가 그 뒤를 이었다.

“수고했네. 역사 과목을 제일 싫어했다는 사람치고는 아주 상세히 사연을 알고 있군 그래. 희한한 것은 광통교의 석물들이라네. 신덕왕후 능에 있는 석물을 쓰면서도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공사하는 사람들이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사용해서 그런지 제대로 바르게 쓰이지 않았다는 거지. 동물의 모습이나 인물이 조각된 석물들은 대부분 다 거꾸로 쓰였다는 사실이네. 도대체 인간의 분노가 어디까지인지 서글프고 두려운 생각이 드는 부분이지. 그래도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인데 전처 자식인 방원은 복수의 마음으로 철저히 짓밟은 거야.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왕비가 죽어서 버림받은 것이지. 1669년 현종 10년에 송시열이 건의하여 왕비릉을 갖추고 260년 만에 복권됐어. 복권 후 첫 제사를 모시던 그날 11월이었는데 겨울비가 세차게 쏟아졌다고 전해지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는 비라하여 ‘세원지우(洗原之雨)’라 한다네.”

영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인간의 원한이 그렇게까지 깊이 사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 영석이 뒷이야기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이미 왕비의 능에 있던 석물들은 광통교에 그대로 남아 아직도 백성들이 밟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의 혼으로 놓은 다리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신덕왕후의 혼이 그 다리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는 지도 모르지.”

“교수님 덕분에 역사가 재미없다는 편견을 완전히 버리게 됐습니다.”

“내가 고전문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가 된 것 같으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영석은 깊이 허리를 굽혀 꾸벅 절을 하고 휴게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빈 휴게실에 앉아 나는 긴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잠시 맥을 놓고 앉아 있었다.

※ 청계천 광통교는 왕실 권력 다툼의 끝을 보여준 한 예라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감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가장 추악하고 잔인할 수 있는 것도 인간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광통교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다리를 밟으며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역사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소재가 되었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4대문 안 길 이름),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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