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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한성정부 선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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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한성정부 선포지)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종로 54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8km
매해 섣달 그믐날(12월 31일) 밤 12시에 ‘제야의 종’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곳이 바로 보신각이다. 보신각은 조선시대 한성 사람들에게 종으로 시각을 알려주던 곳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은 물론, 학생단이 주도한 3월 5일 만세 시위대가 정오에 보신각에 모여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3월 9일에는 상인들이 보신각 주변에서 철시 투쟁을 하기도 했다.
한편, 보신각 주변에 국내에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유인물이 ‘13도 대표’ 25명의 명의로 하여 뿌려졌다. 이는 여러 임시 정부가 통합될 때 한성정부가 정통으로 인정받게 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1413년(세조 4) 종루를 통운교를 옮기고 1458년에는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달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되었다. 그 후 1619년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때 세운 종각은 임진왜란 전의 2층 종루가 아니고 1층 종각이었으며 여기에 건 종은 명례동 고개에 있었던 원각사의 동을 옮겨 왔다고 한다.
종각은 그 후 조선 후기까지 4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듭하다가, 고종 32년(1895)에는 '보신각'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로써 한성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성품인 사단(四端)이 적용된 인(동대문-흥인지문), 의(서대문-돈의문), 예(남대문-숭례문), 지(북대문-숙정문)의 4대문에 신(중앙-보신각)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을 의미하는 곳이 되었다.
보신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53년에 중건하였고, 1980년에는 2층 종루로 고쳐지었다. 이때 이전의 문 달린 보신각이 아닌 사방이 트인 누각으로 짓고, 1985년에는 기존의 종을 국립박물관으로 보내 보존하고 새로 주조한 종을 걸었다.
널리 알려진 ‘제야의 종’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의식이 아니다. 1929년 경성방송국이 특별기획으로 정초에 보신각 종소리를 내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33번 종을 치는 것은 조선시대에 밤 10시에 28번을 쳐서 4대문을 닫는 ‘인정(또는 인경)’과 새벽 4시께 종을 33번 쳐 문을 여는 ‘파루’ 중 ‘파루’를 채택한 것이다. 33번 치는 것은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도솔천의 33천에 사는 사람들이 무병장수하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인정의 횟수 28번은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에 종로는 일본인들이 주로 살면서 경제의 중심지로 떠오른 본정통(현재의 명동)에 대항한 조선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명동에 일본이 세운 미츠코시나 마나카이 백화점에 맞서 박흥식이 조선인의 자본으로 세운 화신백화점(현재 종로타워)이 바로 보신각 건너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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