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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사-최익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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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 모덕사-최익현 집
  • Modeoksa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1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123.5km
충절을 온몸으로 실천:모덕사-최익현 집...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9세 때 김기현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벽계로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면서 이항로의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으로 재직시에는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관직을 쫓겨났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세력과 손을 잡아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열거하여 왕의 친정과 대원군의 퇴출을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후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가 ‘5불가소’를 올려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879년 석방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 사건이 일어나 국내의 정세가 대단히 복잡하였다. 당시 항일 투쟁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 평화적 방법이 아닌 집단적, 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외국을 배척하는 국수주의에서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의 항일 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그는 침묵을 깨고 상소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광무 2)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이어 중추원 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1900년 충남 정산으로 옮겨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비밀 편지를 받고 서울로 올라와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 외국에 대한 의존 금지 등을 상소하고 친일세력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시골로 잡혀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백성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이용 안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에는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관군의 포위를 당하자 같은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중지하였다. 서울로 호송된 그는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으나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면서 단식을 계속하다가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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