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바오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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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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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현지어
  • 김도현 생가(벽산생가)
  • Byeoksan Birthplace
    분류
  • 여행/오락 > 역사유적
    주소
  • 경북 영양군 청기면 벽산길 12
  • 거리 [서울](로/으로)부터 211.9km
김도현 생가(의병장으로 출발하여 도해 순국으로 의기를 드높이다) ...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다양한 민족적 저항이 있어났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의병투쟁이었다.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처음으로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을미 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했고 일반농민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존왕양이를 내세우고 일본 침략군과 거류민을 공격했으며,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1차 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진 뒤, 단발령이 철회되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자 대부분 해산되었다.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이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다면,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907년 일제는 열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때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항일 의병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 방식은 의병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국권을 빼앗기자 교육과 산업을 크게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실력양성운동도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국의 방식을 선택하여 민족의 의기(義氣)를 높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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